™ My Story/나름대로 예술만끽

라스트갓파더, 심형래를 위한 영화

카잔 2011. 1. 4. 11:04



라스트갓파더

★★


영화를 보는 내내 에머슨의 글이 생각났다. "어른은 자의식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그들의 감정을 고려하느라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한다. 반면, 소년은 어른과는 다르다. "소년은 결과나 이해관계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 제 마음대로 순수하게 판결을 내린다. 오히려 우리가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랄프 뢀도 에머슨의 『자기신뢰 Self-reliance』 中)


자의식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의식 덕분에,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좀 더 평화롭게 살아간다. 에머슨이 언급한 것은 자의식의 역기능이다. 자의식은 도전의식을 좀먹는다.


프런티어 정신의 소유자, 심형래


영화에서 나온 슬랩스틱 코미디 장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에이! 이거 <변방의 북소리>나 그 뭐지 심형래가 펭귄 복장으로 나온 프로그램에서 모두 했던 거잖아. 창의성이 없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심형래의 도전정신이었다. 영화의 전개와는 상관없이 이런 생각을 이어갔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 혹은 가장 잘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무기다. 어쩌면 새로운 도전이란, 무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나 영역을 바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형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심형래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로 세계적인 영화 시장에 도전한 것이다. 나는 그가 프런티어 정신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비판이나 회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는 자의식의 역기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슬랩스틱 코미디 장면은 영화 내내 등장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이 영화는 별다른 재미를 주지는 못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초반의 슬랩스틱이 억지웃음을 만드느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웃음이 터졌다는 점과 영화가 한국을 알리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원더걸스가 실제로 등장하고, 추신수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를 본 3人의 반응 : 1명의 한국인과 2명의 미국인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뻔한 이야기 전개의 한심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 진지하게 임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했다. 특히 영구의 아버지로 분한 하비 케이텔과 대부의 오른팔로 분한 마이클 리스폴리(토니 역)의 열연이 고마웠다. 이 고마움은 애국심의 발로일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내가 왜 이 영화를 보고 있을까, 를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궁금한 것은 미국의 반응이었다. 나처럼 80년대 심형래의 코미디에 익숙한 시니컬한 관객이 아니라, 온 몸을 던지는 그의 유머를 처음 보는 그네들의 평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필명 'redion86'을 쓰는 미국인은 "진심으로 디워보다 훨씬 나아요. 미스터 심, 감독을 하고 싶으면 코미디 장르에 충실해 주세요. 공상과학 쪽에서는 프로듀서로서 더 적절해요. 아니면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내가 느끼기에, 'steakopera'라는 이의 글은 가장 호의적이었다. (어느 블로거가 영어 댓글을 번역해 둔 것을 인용했다. 출처는
http://database7.tistory.com/382)


"이거 잘 될 수 있겠는데. 이런 성격의 코미디를 접한 적이 없어서 미국인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어. 한국 버전의 <쓰리 스투지스> 같아. 심형래가 모든 걸 쏟아 부었어. 난 심형래가 영어로 해야 할 인터뷰가 더 걱정되는데, 그의 용기가 존경스러워. 그는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거라는 꿈이 있었잖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그를 응원해야 해. 웃기지 않으면 뭐 어때? 적어도 그는 노력했어. S.H.R(심형래) 파이팅!"


정작 심형래 본인은 이런 댓글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노력이 대단했다는 칭찬보다는 "맘껏 웃어 제친 영화였다"는 평판을 듣고 싶어할 테니까. 평론가들의 혹평을 예상했다는 듯 심형래 감독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론가를 위한 영화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남녀노소가 다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거예요. 어제 극장에서 온 가족이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대중들이 즐겨보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이 심형래의 영화철학이다. (진중권은 <디워>를 두고, 영화 철학이 없는 영화, 애국코드로 결점을 묻어버린 엉망진창 영화라고 폄하한 바 있다.) 철학이 무어 저리 경박하냐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면, 나는 침묵으로 대답하련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화하고 싶지 않지 않으니까.


심형래의 저력


어차피 난, 영화보다는 심형래 감독의 도전에서 느낀 바가 있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나 쓰련다. 먼저 그의 자신감이다. “영화는 전문가만 보는 게 아니에요. 1년에 한두 번 극장에 올까말까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요. 제 영화는 그런 사람들까지 끌어들입니다. 괜히 어렵게 만들고 배배 꼬고 싶지 않았어요. 제 영화가 흥행하면 그건 시장을 잠식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거예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관객의 평가를 받고 싶어요.”


촬영장에서의 첫 3일 동안 스탶들의 반응이 싸늘했다던데, 그것을 이겨내고 결국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그의 실행력이다. 개봉 1주일이 채 못 되어 130만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하니 (아직 초반이긴 하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러 많이들 왔다. 이것이 그의 대중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리우드 진출을 꿈꾼 게 사실이라면 그는 비전가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실망했어도, 그의 꿈꾸고 도전하는 삶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싶다.


진중권에 대한 단상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 "유감스럽게도 난 한 번 불량품을 판 가게에는 다시 들르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이번에는 봐드릴 기회가 없을 거 같다"고 썼다. <디워>를 불량품으로 비유한 것이다. "예전처럼 심빠들이 난리를 친다면 뭐 보고 한 마디 해드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불상사는 다시 없기를 바란다."고도 썼다. <라스트갓파더>를 안 보겠다는 말이다.


나는 진중권의 불량품 론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대할 때에는 '어제의 그'가 아니라, '오늘의 그'로 대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어제보다 선해질 수 있고, 도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불량품을 파는 것은 '가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그 가게는 언젠가는 불량품 대신 질 좋은 상품을 내 놓을 수도 있다고 믿어야 한다. 디워가 불량품이란 건 아니다. 그 영화는 못 봤다.


(사실, 가능성 자체는 선악, 옳고 그름이 없는 중성적 개념이다. 선해질 수 있는가 하면, 추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으니까. 인간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지녔다. 그러니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나의 담론이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수준을 넘어섰음을 밝힌다.)


20대 초반과 중반, 나는 강준만과 진중권의 책을 뒤적이면서 지적 자극을 많이도 받았다. <인물과 사상>의 지면을 통해 벌어진 두 사람의 지적 논쟁은 쾌감을 줄 정도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 분들의 책을 읽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강준만의 삶과 태도는 여전히 존경하지만, 진중권은 지식 전문가로서만 존경하기로 했다. 그 분은 종종 인간의 다양성을 간과하거나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쉽게 단정 지어 버림으로 좀 더 필요할지도 모르는 인식의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코미디 영화?


<라스트갓파더>는 오락영화다. 의미와 교훈, 그리고 진정성을 추구해 온 내게 필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나 조정래의 소설이 아니라, 이런 코미디 영화인지도 모른다. 조정래 선생의 『황홀한 글감옥』은 내게 매우 유익하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나 역시 조정래 선생처럼 리얼리즘과 역사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리얼리즘과 역사의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역사의식이 없는 개인을 '문제적 개인'으로 여겨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니까. 고행이 나를 높은 의식 수준으로 끌어준다고 하여, 모든 이들에게 고행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고행주의'가 되어 인간의 고유성을 말살한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은 삶의 전영역을 지배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다. 리얼리즘이 삶에 도움을 준다면, 코미디 역시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이가 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고 하면, 이것을 열등한 삶의 유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게다.


나는 어떤 지식인이 되고 싶은가?


얼마 전, QOOK TV에서는 2010년 한국영화 화제작 Best 3편이라고 하여 <이끼> <하녀> <아저씨>를 홍보했다. 공교롭게도 관람한 영화가 하나도 없어서 1월 중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얘기를 들은 한 지인은 "요즘 한국 영화는 왜 이렇게 잔인한지 몰라"라고 말했다. <아저씨>도 잔인해요? "그럼, 그것도 좀 무서운 영화지." 검색해 보니, <아저씨>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다.


심형래의 말을 곱씹게 된다. "온 가족이 다함께 볼 수 있는 예쁜 영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올해(2010년) 개봉한 한국 영화들을 한 번 보세요. 찌르고 죽이고 심지어 인육을 먹고…. 어떻게 아이들 손잡고 극장엘 가겠어요?"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보니 잔인한 한국 영화가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한국 영화의 그런 흐름을 인지하여 코미디 영화를 만든 것인지는 내가 알 길이 없다. 허나, 심형래의 말들, 한국 영화에 대한 지적과 그의 영화철학은 내게 생각꺼리를 안겨다 주었다.


나는 지식인을 꿈꾼다. 책이나 영화에 대하여 좋은 평론집을 내고 싶다는 꿈도 가졌다. 전문가도 사람인데, 심형래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럼 전문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과 감성을 지녔다는 말인가. 물론 지성은 남다른 면이 있어야겠지만, 그 지성이 사람들의 더 나은 삶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고민하는 전문가라면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감성을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도와 준 영화나 책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가 되기 이전에 공감력과 포용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내게는 『죄와 벌』보다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추천을 하고 싶지는 않다. 독서를 할 때에는 리얼리즘에 매달려 온 내게 가장 적합한 진단이니까.


이런 생각을 이끌도록 도운 이는 심형래인가? 진중권인가? 아니면, 에머슨인가? 조정래인가? 정답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다. 모든 분들의 영향으로 이 글을 썼다. 글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라, 짧은 글 한 편도 여러 사람들의 덕분임을 말하고 싶다. 내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겠지만, 그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꾸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