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햇살처럼 따뜻하게 살아가기

카잔 2011. 2. 28. 06:17

햇살처럼 따뜻하게 살아가기

- 똑똑함과 지혜로움의 구분에 대하여 ②

따뜻한 봄날의 햇살을 상상해 보세요. 한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말고, 봄날의 기분 좋은 햇살 말입니다. 나의 인격이 만물을 키워내는 햇살의 따뜻함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인생과 생명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가지만, 인생이나 생명은 저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노력하다 보면, 지금까지 얻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포용력, 아주 중요한 것들은 측정되지 않고 목격될 뿐이라는 사실, 누구에게나 삶의 신비가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햇살의 따뜻함을 닮아가기 위해 가져야 할 것들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장발장을 아시나요?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법의 집행이 아니라, 그의 잘못까지도 넉넉하게 받아 준 신부의 인격적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용서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따뜻함이었습니다. 따뜻함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28일 동안 브라질에 있으면서, 누군가의 손길이 나의 빨랫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어느 교포 가족의 회갑 잔치에 초대되었는데, 온 가족이 모여 식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여러 번, 아주 분위기 좋은 곳으로 안내를 받아 근사한 식사를 즐겼습니다. 이 모든 것이 따뜻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따뜻함은 종종 사람과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봄날의 햇살이 만물에 생기를 키워내듯이 말입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중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점점 사나운 죄수가 되어갔습니다. 주먹싸움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지요. 그의 의지를 꺾어놓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형무소에서의 세월도 흘러갔고 장발장은 출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죄수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하룻밤을 묵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여관 주인들이 이 위험한 전과자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 간이나 시골길을 헤메던 그에게 마침내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풉니다.

장발장은 편안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신부와 그 누이가 잠자리에 들자 침대에서 일어나, 찬장을 뒤져 가족 은잔을 훔쳐서는 어둠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아침, 경찰 세명이 장발장을 끌고 와 신부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훔친 은잔을 들고 달아나던 범인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 악당을 평생 사슬에 묶어 놓을 태세였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그들도, 장발장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읽던 저도 전혀 예상치 못했지요.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반갑게 말했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걸 잊어버리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빡 잊고 놓고 가셨나요?" 장발장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눈빛에 담아 노신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신부는 경찰에게 장발장은 도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은잔은 제가 선물로 준 겁니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경찰이 떠나자, 신부는 할 말을 잃은 채 떨고 있는 손님에게 촛대를 건네 줍니다. (촛대까지 주다니요?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장발장에게 이별을 고하며, 신부는 마지막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시기로 저와 약속하신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장발장을 공의로 판단한다면, 그는 다시 감옥에 가야할 것입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지요? 이미 19년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그에게 변화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가정해 보는 겁니다. 공의가 장발장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신부는 장발장에게 영원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촛대를 은혜의 소중한 상징물로 간직한 그가 여생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바쳤으니까요. 저는 세상에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때로는 법치(法治)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덕치(悳治)가 해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똑똑함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지혜로움이 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어낸 소설 속의 이야기니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보다 더욱 소설같은 실화도 하나 전해 드립니다.

1987년 벨패스트 서부 작은 마을, 재향 군인의 날이었습니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개신교 신자들 위로 아일랜드공화국군(army)이 던진 폭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무자비한 테러로 인해 11명이 죽고 63명이 다쳤습니다. 하지만, 이 테러 행위는 다른 많은 테러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었습니다. 부상자 고든 윌슨의 반응 때문이었지요. 그는 아일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이민 와서 포목상을 하던 신앙심 깊은 감리교신자였습니다.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윌슨은 스무 살난 딸 마리와 함께 콘크리트 벽돌 더미 1.5미터 아래에 갇혔습니다.

아버지와 딸은 손을 꼭 쥐고 구조대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딸은 "아빠, 정말 사랑해요"라는 말을 남긴 채 의식을 잃었습니다. 두 사람은 구조되어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척추와 뇌에 중상을 입은 마리는 몇 시간 후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을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 버린 것입니다. 딸의 아버지, 고든 윌슨은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너무나도 치가 떨릴 비극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슨은 병원 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을 잃었지만, 원한은 없습니다. 상대를 욕한다고 마리 윌슨이 살아나지도 않습니다. 오늘 밤 그리고 매일 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저들을 용서하게 하셔서 감사하다고."

고든 윌슨은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여생 동안 사랑을 좇아 살기도 다짐했습니다. 훗날, 신문에는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당시 정치가들이 한 말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든 윌슨의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도 그 고백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용서는 폭파범들의 파렴치한 정당화 논리를 이기고 우뚝 솟았다." 이후, 고든 윌슨은 아일랜드 국회위원으로까지 선출되어 평화와 사랑의 세상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람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벗어난 사람들조차 용서하기 힘든 우리들입니다. 어쩌면 용서보다는 공평한 처사나 복수가 우리 본성에 더욱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누구나 고든 윌슨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똑똑함(공평, 정의)을 선택하는 것보다 지혜로움(사랑과 용서)을 선택할 때,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고든 윌슨의 행동을 용서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그것은 분명 똑똑함을 넘어서는 어떤 것입니다.

정의만으로 판단했다면, 저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든 윌슨은 정의 그 이상을 선택했습니다. "당한 건 난데, 왜 내가 먼저 나서야 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똑똑함의 영역에 머무는 것입니다. 지혜로움은 공평함을 뛰어넘어 최선의 것, 최고의 것을 추구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염두에 두는 것이고, 때로는 공의보다 사랑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가 공평성의 문제나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집단 대 집단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최선의 행동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개인 대 개인, 특히 우리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범위를 축소시키고 싶습니다. 특히 똑똑함을 발휘할 것인가, 지혜로움을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글을 이어가려 합니다. 똑똑한 말이 있는가 하면, 지혜로운 침묵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잘못을 저지르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때, 분명한 책임 소재를 가리거나 적확한 충고가 필요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눈을 감아주고 침묵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의 침묵은, 마음 속에 비판과 불평이 있지만, 그저 입술을 닫아주는 침묵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아무런 비판이 없는 침묵이고,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침묵입니다. 마음에서 이런 저런 비판과 판단이 일어난, 입술만의 침묵은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말들의 대화가 있는가 하면, 마음의 대화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않은 교류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침묵할 순간인지, 충고할 순간인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 문제에 대해 제가 탁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분별을 돕는 키워드 하나가 '상황 분석'이 아니라, '마음 분석'이라는 것입니다. 상황의 공평함을 따지지 말고, 내 마음의 따뜻함을 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를 향한 애정의 따뜻함이 어떠한지를 들여다 보자는 말입니다. 그를 향한 애정이 있다면, 충고를 해야 할지 침묵을 해야 할지를 분별하는 일과 그 시기를 결정하는 일이 쉬워집니다. 애정이 있는 경우, 충고하고 싶은 마음보다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또한 애정이 있으니, 충고를 해도 관계가 깨어질 일도 거의 없습니다. 충고로 인해 상대가 잠시 오해해도, 결국에는 그를 향한 나의 애정이 계속되어, 맺혔던 오해를 풀어버릴 테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애정이 없어서 일어납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충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충고를 해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상대를 향한 애정을 키우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경우가 많습니다. 영원히 애정만을 키우자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밑바탕이 되어야 우리의 충고가 제대로 힘을 발휘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애정을 키우라는 저의 말에 해당되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정의롭게 충고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정의롭고 생각이 정확하고 어느 상황에서나 일관된 말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시니, 그들의 사랑법 역시 다른 사람들이 정의와 정확성, 그리고 말의 일관성을 지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기에, 충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은, 사람의 성장이 매우 신비롭고 우리가 얻은 지식이 피상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동기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과 사랑은 항상 상대를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자녀에게 눈높이를 맞추듯,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기준을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want)을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아이는 위험하거나 엉뚱한 것을 원하기도 하니까요. 상대에게 필요한 것(need)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때, 필요함의 기준을 나에게 두지 말고, 상대에게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향한 애정 어린 관찰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게 되니까요. 애정 어린 관찰을 하다 보면, 부분적으로만 보았던 나의 시각이 전체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 말입니다. 이해는 전체를 보기 위한 노력이고, 전체를 보아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일전에, 연락을 기다리던 이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제가 전화를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아,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 그녀의 소식을 듣고서야, 저는 왜 그녀가 그렇게 전화를 받았는지 이해했습니다. 가족 중의 두 명이나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전체를 보는 순간, 오해가 풀렸습니다.

글을 정리하면, 상대를 향한 애정을 키우자,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자는 것입니다. 충고를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못 견디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 충고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편하긴 하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충고의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기가 선한 것이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 때에도 애정을 키우려는 노력과 상대의 필요를 살피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더욱 훌륭하겠지요.

햇살은 자신의 따뜻함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가리지 않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자신의 특성을 쫒아 온 세상에 햇살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햇살의 따뜻함을 닮고자 한다면, 자기 안에 있는 인격적 특성을 쫓아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딴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이번 일 때문에 이런 것도 아니지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보실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되는 일이지만 결국 햇살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누군가를 신뢰하는가의 문제는 그의 행동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신뢰성이라는 인격적 특성이 성장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햇살의 따뜻함을 닮고 싶습니다. 애정을 키우는 것이고, 필요를 살피는 것이 비결이라 생각하여 쓴 글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이야기로 일상 속의 지혜로움을 발휘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글을 먼저 올린 까닭은 애정과 관찰이 지혜로움을 선택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