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물결치는 허벅지 근육 감상기

카잔 2012. 3. 18. 17:49



1.
휴일 오전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 때였다. 나는 글을 쓰던 중이었고, 시계바늘은 오전 9시 45분을 가리켰다. 차창 밖 잠실대로에서 호각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매주 휴일이면 잠실 롯데마트, 키즈니아 등으로 진입하는 차량들로 뒤범벅이 되는 곳이다. 교통경찰들의 호각이려니 했지만, 그것은 오후에나 벌어지는 일이다. '아직 차가 막힐 시간이 아닌데...' 하는 호기심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잠실대로가 한산했다. 잠실역에서 갤러리아팰리스에 이르는 도로를 통제하는 교통결찰이 보였다. 

'와! 마라톤이 있는가 보네.'



서울국제마라톤대회는 동아마라톤대회가 세계 최고 수준의 대회를 표시하는 골드라벨로 승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11년 개최된 국제마라톤대회 중에서 골드라벨 대회는 16개 뿐이었으니 희소성의 권위가 있다. 지금은 2012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83회 동아마라톤대회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나는 실내복을 벗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잠실역 사거리에 이르니, 대회 참가자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뜀박질을 할 때마다 물결치는 그들의 허벅지 근육이었다. 사람의 근육이 아름답다고 혹은 허벅지 근육의 역동적인 모습이 감동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감동을 느꼈다. 남자들의 허벅지가 아줌마들에게 섹스어필을 하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허벅지가 펼쳐내는 아름다운 움직임을 쳐다보았다. 넋을 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휴대폰 사진기로밖에 찍을 수 없음이 아쉬웠다.) 사람들의 뛰는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지만(퍽 우스운 포즈로 뛰는 이들도 있었다), 허벅지의 움틀거림만큼은 한결 같았다. 그것은 근육질 남성만이 아닌, 뜀을 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뿜어내는 것이었다. 깡마른 체형도, 물렁한 살결이 푸짐한 체형도 허벅지만큼은 꿈틀거렸다.

그들을 보며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들은 살아있었다. 적어도 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생생하게 살고 있었으리라. 헐떡이는 숨소리,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과 상하의, 뜀걸음마다 움직이는 다리 근육, 힘겨워서 일그러진 표정은 모두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도로가에 서서 응원하는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의 파이팅 외침까지도 에너지가 넘쳤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주자들을 응원하는 그 곳에 시들한 외침은 자리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짧다"고 말한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인생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라면 시들함, 의기소침, 에너지없음을 몰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비워진 자리에 채워야 할 것은 열정, 도전, 역동성일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것들 말이다. 마크 트웨인의 재치있는 말이 떠오른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살기 위해 노력하자.
장의사가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게 될 만큼."



2.
"엄마, 11시 정각이야"
"응. 15분 후면 아빠도 오실꺼야."

아빠는 출전했고 가족이 모두 응원을 나왔다. 나는 아이의 엄마이자, 한 마라토너의 아내인 여자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모자 후드티와 모자 차림의 그녀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시선은 줄곧 마라토너들이 달려오는 잠실대교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지하철역 난간 위에 서서 고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섰다. 엄마는 아이 얼굴을 어루만졌지만, 시선은 여전히 주자들을 향해 있었다.

잠시 시선을 아이에게 돌리며, 엄마가 말했다. "이제 13분에서 15분 사이에 아빠를 볼 수 있을꺼야." 어쩜 이렇게 구체적인 수치로 예상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하마터면 그녀에게 물어볼 뻔 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 늘 생각만으로 그친다.) 그녀는 남편이 마라톤을 하든, 등산을 하든 관심없는 아내가 아닐 것이다.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지지자가 되어 주는 편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얼굴이 잘 생겼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아들을 발견한 아빠의 기쁜 표정이 궁금했다. 그 순간의 아내의 눈빛도 보고 싶었다.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는 즐거움이 샘솟기 마련이고, 사랑과 즐거움은 바라보는 것은 삶의 에너지가 될 테니까. 명화를 감상할 때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3.
잠시 후, 나는 잠실역 인근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가슴은, 5분 전까지 관람했던 마라톤 대회가 준 감동의 열과 에너지가 식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에게도 내가 달려가야 할 마라톤(글쓰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표정 만큼이나, 내 길을 모두 달려간 후의 나의 표정이 궁금했고, 나를 대견해하며 기뻐하실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마라톤 대회가 안겨다 준 감동은 컸다. 그들은 모두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생각, 절정의 고비를 넘긴 승리이기에 기쁨이 클 거라는 예상, 조금만 힘들면 금새 포기해 버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인식, 이젠 나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 길을 달려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유의 결실을 맺고 싶어, 3시간 동안 글을 썼다. 내가 살아있던 순간이었다. 살아있음의 순간들이 쌓여간다면, 과정과 결과 모두에 만족하지 않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