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이상은, 김광석 그리고 서태지

카잔 2014. 1. 14. 11:37

 

 

1.

2009년의 8월과 9월을 유럽에서 보냈다. 54일 동안의 배낭 여행에서 빛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났고, 머물고 싶은 만큼을 머물렀다. 눈요기를 하느라 마음에 드는 옷을 만나면 유럽 스타일을 꿈꾸며 구매했다. 공부하고 싶은 주제의 자료나 책을 만나면 조금 무리가 되는 비용이라도 지불했다. (공부는 내 삶의 높은 우선순위고, 여행 책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했다.)

 

자유롭고 행복한 여행이 끝까지 이어지는 못했다. 

여행이 끝날 무렵, 쾰른에서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는 추억과 여행의 자취를 잔뜩 품은 배낭여행을 잃어버렸다. 꼼꼼히 기록했던 여행일지, 녹음기, 여행 기념품을 모두 잃었다. 큰 상실로 마음이 아팠고, 많이 울었다. 파리로 이동하는 열차에서 유레일 패스가 없어 쫓겨날 뻔할 때도,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초라해진 여행자의 행색에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이상은의 노래 <삶은 여행>이었다. 수십번도 더 들었던 <삶은 여행>, 그 노래가 나를 치유했다.

 

 

내게 이상은은 영혼을 위로하는 가수다. 김광석이 나를 감수성의 세계로 이끈다면, 이상은은 영혼의 고양을 이끈다. 오늘은 <언젠가는>의 노랫말을 음미했다.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내게는 젊음, 사랑 뿐만 아니라 그녀의 노래들도 참 소중하다. 그녀는 지금도 노래한다.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을.

 

 

 

2.

2011년에도 불상사가 일어났다. 노트북의 자료를 몽땅 유실한 것. 여행을 하며 찍었던 사진, 그간 써 왔던 원고들, 와우 수업을 하며 기록한 일지들, 강연을 해 왔던 PPT 파일들을 모두 잃었던 당시, 나는 십 수일을 미친 사람처럼 보냈다. 고통스러운 날들이었고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왜 내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불평이 아니다. 의문이다.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상실이라는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 

 

아직은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을 뿐.

 

'산다는 것은 하나 둘 상실을 체험해가는 과정이다. 학창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고, 커서는 여행의 기억과 소중한 물건들이 담긴 가방을 잃었고, 2009년엔 내 삶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노트북의 데이터를 몽땅 유실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혹은 좀 더 크게 경험한 것이지 나만 이런 일들을 겪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뜨겁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삶을 살면 더욱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하는지도. 사랑의 온도만큼 이별이 눈물겹듯이.'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는 이렇게 끝난다.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김광석은 삶의 진실을 노래한다. 삶에는 희망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허무와 현실도 존재한다. 김광석이 노래하는 것은 주로 후자다. 그래서 삶의 헛헛한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부른다. 그의 노래는 흥얼거리지 않고 읖조리게 된다. 정신을 판 채 흥얼거리기보다는 노랫말을 하나 둘 혀로 누르며 나직히 말하듯이 읖조리게 된다.

 

나의 감수성을 어루만지는 가수, 김광석. 나를 그가 좋다. 이상은을 좋아하는 까닭은 나를 치유하고 다시 힘을 내기 위해서라면, 김광석을 즐겨듣는 까닭은 내 감성이 지금 어떠한지를 느끼고 음미하기 위해서다. 슬픈 정서를 탐닉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울적한 기분을 딱 필요한 만큼 느끼며 희망과 포부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들 역시 삶이니까. 만남도 삶이요, 이별도 삶이다. 두 가지 모두 삶의 실체요, 의미다.

 

 

 

3.

나는 서태지를 존경한다. 이상은과는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고 싶고, 김광석과는 인간적인 친분을 맺고 싶다면, 서태지는 그저 우러러 바라보고 싶다. 그는 대중가수였지만, 실제로는 예술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서태지는 예술가의 장인정신을 가졌다. 그는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가 아니지만, 치열한 프로의식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음악적 완성도를 입혔다.

 

그는 예술가의 영혼을 지녔다. 예술은 형식미를 추구해야 한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 예술이다. 현대예술은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진부하지는 않다. 20세기 이전까지의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했지만, 20세기 이후의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해왔다. 서태지만큼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낸 가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서태지 이전에도 댄스 가수는 있었다. 뛰어난 브레이크 댄스 실력으로 80년대 후반 가요계를 접수했던 박남정이 대표적이었고, 소방차와 김완선도 있었다. 박남정의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은 <가요톱10> 5주 연속 우승을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노래는 기존의 반주와 리듬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태지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대중음악에 단절을 불러왔다. 완전히 창조적인 사람만이 단절의 시대를 만들어낸다. 서태지는 창조 자체였다. 1992년 3월 23일 발표된 1집 음반은 음악계에서 광복 이후 가장 큰 음악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어 랩을 유행시킨 이도 서태지다. 2집에서는 국악과 댄스를 접목하는 실험정신을 보이고, 성공했다.  

 

3집은 사회의식을 담기도 했다. <발해를 꿈꾸며>로 통일에 관한 담론을 음악으로 펼쳤고, <교실이데아>라는 노래로 교육계의 현실을 비판했다. 4집은 얼터너티브 락과 갱스터 랩을 담은 록 음악을 선보였다. 그는 모든 음악 장르를 포섭하여 서태지 음악으로 재창조한다. 창조와 재창조의 모습은 노래를 잘하는 대부분의 가수들이 지니지 못한 예술가적 특징이다.

 

이승철, 신승훈, 이문세는 가창력이 뛰어나거나 매력적인 목소리, 자신만의 분위기를 가진 가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앰범은 항상 비슷한 곡조의 노래들을 담았다. 9집에 수록된 곡이 10집에 수록된다고 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서태지는 다르다. 앨범마다 파격적인 변화를 이뤄냈고 그 변화를 적어도 4집까지는 엄청난 대중적 성공까지도 이뤄냈다.

 

최고의 학자들만이 평생을 통해 자기 사상의 변화를 이뤄냈다. 1기, 2기, 3기 정도로 학문의 생애를 구분하는 것은 그만큼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도약을 이뤄냈다는 말이다. 서태지의 1집에서 4집은 앨범 하나 하나가 모두 변화였고, 위대한 도약이었다. 나는 대중가수에게서 이 정도의 예술적 영혼을 발견했다는 것이 여전히 놀랍고 경외스럽다.

 

 

양현석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곡 하나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집중하고 몰입한다. 그가 은퇴를 한 것은 떠돌던 소문들(이를테면, 정치의 외압이나 멤버들과의 불화설)과는 달리 창조적인 예술작업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예술정신을 추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에겐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태지 씨는 힘들게 음악했던 것 같아요. 4집을 만들 땐, 거짓말이 아니라 5개월 동안 집 밖으로 한발짝도 낸 적이 없어요. 창작의 고통을 너무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너무 힘들어 했으니까 서태지 씨가 은퇴를 제안했을 때에도 '너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했어요. 너무 힘들어하는데 개인 욕심을 갖고 계속 갈 수는 없으니까."

 

힐링캠프에 출연해서, 은퇴의 이유를 털어놓은 양현석의 말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예술의 본질을 구현해냈다는 점, 자신의 예술정신을 구현해내기 위해 치열하게 실험하고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자기를 몰아붙였다는 점에서 나는 서태지를 예술가라고 부른 것이다. 서태지의 경이로운 창조성과 치열한 장인정신을, 나는 존경한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꼽은 적이 있다. 서태지 1집부터 4집까지는 모두 리스트에 올랐다.[각주:1] 전문가들도 그의 높은 음악적 성취를 인정한 것이다. 대중도 열광했고(그는 문화 대통령이라 불렸다), 전문가들도 인정한 서태지. 그가 데뷔한지도 20년도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노래는 현재적이다. 그는 시대를 앞선 가수 아니, 예술가였다.

 

(서태지의 1집 앨범 중 <이 밤이 지나가지만>을 보시면 그가 얼마나 현재적인지 맛볼 거라 생각한다. 서태지 이전의 최고의 댄스 가수는 박남정이었다. 그도 획기적이었지만 서태지만큼은 아니었다. 박남정의 <사랑의 불시착>부터 보시며 2비트의 쿵짝쿵짝 소리를 듣고서 서태지의 음악을 접해 보면 서태지의 창조성을 느끼시리라 생각한다.)  

 

 

 

 

 

 

 

  1. 서태지는 4개의 앨범이 모두 100위 안에 포함되어 최다 앨범을 올린 가수가 됐다. (1집은 24위, 2집은 30위, 3집은 57위, 4집은 36위) 서태지 다음으로 많은 앨범을 순위에 올린 가수는 김광석, 산울림이 3개, 이상은, 조용필, 이문세, 부활, 노찾사, 시인과 촌장, 듀스가 2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