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인문주의적인 어느 명절 이야기

카잔 2014. 2. 3. 10:59

1.

2박 3일 일정으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다섯 명의 식구와 함께 정겨운 식사를 했고, 외할머니와 둘이서 어머니 묘소에 갔습니다. 동생과 막창을 먹으며 젊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얘기도 나눴습니다. 고향 친구와도 아담한 카페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네요. 하나같이 기쁨과 의미가 깃든 순간들이었습니다.

 

2.

고향 방문 첫날, 외할머니께서 불쑥 물음 하나를 던지셨습니다. “니 아버지 이름이 뭐꼬?” “봉덕이 아버지 말씀이세요?” 그는 제 계부입니다. (어머니께서 재혼하셨거든요.) 곁에 계시던 외삼촌이 거들었습니다. “니 친아버지 말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얼른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외삼촌과 외할머니께선 며칠 전부터 이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신 눈치입니다.

 

“아! 삼촌, 김현근 아닙니까?” 삼촌은 아닌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어찌, 친부 이름도 모르냐고요? 친부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서 재혼하시면서 친부의 사진을 모두 없애셨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친부의 존재도 몰랐고요. 제가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친부 얼굴은 본 적이 없고, 성함은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무 살 즈음, 외삼촌이 쪽지 하나를 건네며 말씀하셨습니다. “니 친아버지 이름이니 기억해 둬라.” 그 쪽지에는 삼촌의 필체로 세 글자 이름이 쓰였더군요. 그걸 기억하며 ‘김현근’이라 말했지만 기억은 기록만 못하더군요. ‘근’자는 맞는 것 같아 계속 애를 써 봅니다. 30분 즈음 지났을 때, 번개같이 세 글자가 새롭게 생각났습니다.

 

“삼촌, 김근배 아닙니까?” 삼촌이 미소 지으며 화답합니다. “그래! 맞다. 들으니깐 바로 알겠네.” 할머니께도 알려 드렸습니다. 무슨 연유로 물으셨는지 끝내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나는 나대로 갑자기 일상 속으로 끼어든 세 글자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근.배. 나보다 10년이나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난 한 남자가 내 인생에 무슨 의미일까요?

 

저 물음은 일반상식 퀴즈처럼 지식 하나를 얻는 것으로 풀리진 않습니다. 인생을 읽어내는 지혜가 쌓이고 나를 아는 지식이 깊어지면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이해될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유의 질문들이 그렇듯이 말이죠. 타고난 기질과 재능을 발견하고 자라온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깨달아갈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게 됩니다.

 

둘째 날 저녁엔 동생이랑 둘이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동생이 좋아하는 막창을 4인분, 제가 (그나마) 좋아하는 삼겹살 1인분을 시켰습니다. 대화 주제는 다양했지만, 동생의 시험공부가 화두였습니다. 경찰공무원 시험을 올해로 4년째 공부 중인 동생의 얘기를 듣기도 하고 어쭙잖은 조언도 했네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두 청춘의 고민과 소통이 풍성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밤에는 암 투병 중인 친구를 만났습니다. 우린 아담한 매장의 카페에서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췌장암 수술이 잘 끝나 회복되는가 싶었는데... 지난주에 간, 복막, 인파선에 전이되었다는 CT 검사 결과를 들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알게 된지 나흘 만에 만난 우리는 일상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이내 암 이야기로 이어갔습니다.

 

“이제는 솔직히,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말의 뜻을 직감했지만, 되물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새로 시작할 항암 약 결정 하는 거?” 친구가 고개를 흔듭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겨낼지 말지?” 눈가가 촉촉해진 친구가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눈빛이 선연히 기억납니다. 그때 친구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다행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전화벨이.

 

우리는 밝은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습니다. 누구나 마음이 약해질 만한 상황이었고, 친구는 자신의 절친에게 진솔한 속마음을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화 이후에 보여준 투병 의지와 에너지 또한 그의 진심일 테고요. 자신의 현실(암의 무서움)을 무시하지도 말고, 삶의 기적 같은 가능성(인간 정신의 위대함)에 무심하지도 않기를 바라는 게 제 마음이고요.

 

3.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세 화두는 우리 삶의 철학을 형성하는 질문이요, 멋진 인생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이 질문들이야말로 인문주의의 정수고요.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이런저런 지식을 쌓아갈 게 아니라, 문사철 식견을 넓혀가며 저 세 가지 질문을 붙들고 고민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인접 학문도 공부하면서요.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서로의 일상을 담아내지 못한) 연예나 정치 이야기가 아닌 진짜 삶 이야기를 나눠서 기쁩니다. 친구와의 진솔한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 아픈 일상이 그의 삶이기에 소중한 대화들이었습니다. 즐거움과 고통이 깃들어 있는 게 인생이라면,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야말로 우리들의 인생살이일 테니까요.

 

전심을 담아 기원합니다.

여러분 일상에 의미가 가득하기를!

친구가 삶의 기적을 만들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