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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카잔 2014. 3. 20. 06:42

 

영화 <다이애나>를 보러 가는 기대감의 정체는 호기심이었다. 화려하게 보였던 그녀의 삶 그리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녀의 죽음! 그렇다. 무엇보다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궁금했다. 영화는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했지만, 호기심 충족이 아닌 다른 것으로 기대감을 채웠다. 영화 <다이애나>의 관심은 '그녀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삶'이다. 다이애나가 어떤 여자였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서 다이애나라는 사람의 일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으리라. 나의 리뷰도 영화를 통해 이해한 다이애나에 대한 단상들이다. '당신은 다이애나를 아는가?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1.

다이애나는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전략이나 전술은 그녀의 단어가 아니다. 사랑과 충동이 그녀를 표현하는 단어다. (그녀의 편지 끝인사는 "사랑을 담아, 다이애나"였다.) 그녀는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찰스 황태자의 이중 생활과 왕실에서의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충고했고, 남자친구 '하스낫'은 좀 더 부드럽게 접근했다. 그는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받아치기는 좋은 단기전술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전략이 뭐예요?"

 

하스낫의 태도는 호의적이었지만, 다이애나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마음 속 신념으로 행동했지, 생각으로부터 나온 전략이 아니었으니까. 아프리카로 날아가 지뢰제거를 위해 활동했을 때에도 세상의 반응은 엇갈렸다. 노동당 정책에 동의하는 행보가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정책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의 대답이야말로 다이애나였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온 것 뿐이예요."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단순했다. 복잡하지 않았다.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했다. 일각에선 충동적인 행보를 하는 것 같아 럭비공 같다고 비난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항상 휴머니즘이라는 하나의 마음을 향했다. 인파 속을 헤쳐 걸어가다가 앞을 못 보는 한 노인을 목격하고서 다가가서 자신의 얼굴을 만지도록 하는 그녀! 이것이 다이애나였다.

 

 

"국민들 마음의 여왕이고 싶어요. 마음 속의 여왕"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비전은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하게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과 동화되는 것이다. 마음 속의 여왕! 이 바람이야말로 그녀였다. 옳고 그름을 가려 따지는 것은 가슴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한 판단과 그에 따른 정책적 행보는 생각하는 이들의 재능이다. 

 

다이애나는 항상 자기다웠다. 휴머니즘을 쫓았고, 마음으로 소통하길 바랐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들 눈에는 그녀의 행동이 때론 옳았지만 대부분 그른 것으로 보였다. 느끼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 아닌 '좋고 싫음'으로 움직인다. 하스낫이 그녀의 영전에 갖다 바친 루미의 싯구야말로 다이애나를 이해하고, 살리는 슬로건이리라.

 

"옳고 그름 너머에 정원이 하나 있소. 그곳에 그대를 만나리다." - 잘랄루딘 루미

 

2.

다이애나는 이상주의자였다. "우리가 가능하게 만들어 봐요." 그녀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이런저런 운동을 벌였고, 한번은 550만 달러의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을 쫓아 열정적으로 달릴 때 빛나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통해 550만이라는 액수를 전해 듣고서 그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의 비전을 이뤄낸 기쁨이었다. 기쁨의 표현도 느끼는 사람의 전형처럼 풍부하고 진했다.)

 

(영화 곳곳에서 보인 그녀의 감정 표현은 다양하고 극적이다. 이상주의자이기 이전에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감정이 풍부한 그녀였다. 우울했고, 뜨거웠고, 흥분했고, 매우 유쾌했다. 감독과 주연 배우는 다이애나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고 잘 표현해 냈다. 취재진을 만났을 때, 그녀는 화가 났고 당황한 나머지 그다지 좋지 않은 선택을 했다. 질주로 따돌리겠다는 선택인데, 덕분에 고상하지 못한 사진을 찍혔다.)

 

취재진을 피해 달아나는 다이애나

 

 

3.

가슴이 따뜻한 이상주의자! 이것이 다이애나의 힘이요, 빛이다. 영화가 그렇듯이 이 글도 그녀의 밝은 면만을 찬양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자기 기질의 어두운 면도 고스란히 지닌 인물이었다. 영화는 줄곧 다이애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찬양이나 비난 일색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다이애나를 재현하려는 듯 그녀의 멋진 면 뿐만 아니라, 허술하고 부족한 면도 드러낸다.

 

그녀는 충동적이다. 감정대로 행동할 때가 많다. 남자 친구가 그리울 때면 언론을 신경쓰지 않고 불쑥 찾아가서 곤경을 자초하는 식이다. (하스낫은 그녀의 갑작스런 출현에 종종 당황했다. 그에겐 일도 중요했으니까.) 다이애나는 감정에 휩싸이면 자해도 했다. (이것은 느끼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약점이다. 우울한 감정에 빠지면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하염없이 감정 속으로 빠져든다.)

 

감정에 휩싸이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기도 한다. (스토커처럼 남자 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그녀였다.) 감정이 이성을 앞설 때가 많다. 머리로 앞뒤를 따지기 전에 마음이 먼저 움직여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하스낫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눈 앞의 장애물을 실제보다 가볍게 여기기도 했다. (하스낫과의 결혼은 그녀의 생각보다 높은 장애물이었다.)

 

이 모든 약점들은 그녀의 의식이 높을 때엔 모조리 장점이 된다. 유쾌하고 밝고 아주 표현을 잘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그렇더라도 다이애나가 보인 감정의 고저는 많은 이들에게 혼란스럽게 비쳤을 것이다. 즉흥적이고 예측불허의 불안정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녀의 약점은 기질에서 오는 특징이다. 기질적 단점은 낙관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불찰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기질적 단점은 균형이 결여된 장점이다! 다시 말해, 감성적이라는 단점은 이성이 조금만 곁들여지면 훌륭한 장점들이 된다는 말이다.) 

 

나오미 왓츠(다이애나 역)와 다이애나

 

4.

이상적인 사람 +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 사랑을 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다이애나가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 그녀의 눈앞에는 장애물보다는 장밋빛 미래가 더 크게 보인다. 결국 하스낫과의 사랑은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꽃피지 못했다. (적어도 주춤했다.) 세상사가 원대한 이상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서른 여섯의 다이애나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이 힘겨웠던 까닭이리라.)

 

2) 그녀의 눈에는 사랑 외의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스낫의 외모에서부터 그를 둘러싼 (국적, 종교 등의) 조건들은 무의미했다. 영화 속의 다이애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같은 멋진 남자 앞에선 허둥댈 순 있는 거잖아요." 또 다른 장면에선 "난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당신을 위해) 준비된 여자라고요." 이건 사랑에 미친 로맨티스트의 언어들이다. 미치지 않은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3) 그녀는 사랑에 모든 것을 던졌다. 남자친구를 지켜주기 위해 스캔들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는가 하면, 엉망진창이 된 하스낫의 집을 (왕실의 꽃이었던) 그녀가 손수 청소와 정리정돈을 한다. 재즈를 즐기는 하스낫의 취향에 맞추고, 냄새 나는 담배 연기도 잘 견딘다. 모든 것을 헌신하고 양보한다. 감정이 다운되지 않는 한 그녀는 최고의 연인이다. (감정이 다운되면 어떻게 되냐고? 우울해져서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 되거나 감정이 격앙되어 충동적이 된다.) 

 

 

5.  

카툴루스와 호라티우스는 고대 로마의 유명한 서정시인이다. 두 시인은 사람들이 사랑을 대하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해박한 이디스 해밀턴은 두 시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읽으시며 다이애나는 어느 쪽인지 생각해 보시라.)

 

"카툴루스는 단순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단순히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생각은 끊임없이 사랑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오직 사랑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펜으로 적을 수 있었다. 그는 레스비아만을 생각하는 연인이었고, 그의 장소는 이 땅이었으며, 그의 구역은 엄격하게 자신의 사랑과 미움에 한정되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강렬함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제한되어 있었다. (중략) 카툴루스는 우주에서 레스비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그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인생을 사랑하는 데에도 연인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요절했다."

 

 

"호라티우스는 결코 시인이 되지 않을 인물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심성을 타고나 시인이 된 사람이다. 시인으로서 그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식이며, 그 이전 또는 그 이후에도 상식과 시를 그렇게 잘 결합시킨 사람은 없었다. 시인은 감정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열정적이고 영감을 받은 존재라는 생각은 재고해보아야 한다. 호라티우스는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는 늘 열정이 없는 시인이었다. 어떤 여자든 한 번도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사랑이란 인생에 즐거움을 더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은 정확하게 그것을 실천했다."

 

가슴으로 느끼는 카툴루스와 머리로 생각하는 호라티우스를 양극단으로 하는 사랑의 스펙트럼에서, 다이애나는 카툴루스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문학사의 인물로 따지면 영국의 시인 존 키츠의 삶이 그랬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이 그랬다. 영화가 그려낸 다이애나의 모습을 문학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존 키츠의 삶과 괴테 소설의 유명한 주인공 '베르테르'를 통해서도 '느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6.  

세상에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한가 하면, 따뜻한 감성도 필요하다. 다이애나는 후자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고, 세상에는 다이애나의 도움, 아니 그녀의 존재 자체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것이 아쉽다. (왕실 음모설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음모설로 지목되리란 걸 예상했을 영국 왕실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7.

영화평론가나 영화전문기자의 글을 읽는 편은 아니나, 평론가들의 평점은 슬쩍 보게 된다. 그런데 <다이애나>에 대한 평론가와 기자 평점이 지나치게 낮다고 생각했다. 3명이 준 평균 점수가 3점이라니! (<씨네21> 김혜리, 박평식, 이용철이 각각 3, 4, 2점을 줬다.) 2점을 준 이용철의 한줄평은 이렇다. "죽은 자를 민망하게 만드는 한심한 작업."

 

나는 이 영화에 6점을 주련다. (고백하건대, 나의 점수는 오락가락한다.) 저네들의 명성과 나를 견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왜 그리 각박하시냐고, 근거를 묻고 싶긴 하다. (내가 높은 점수를 준 까닭을 안다. 나는 감독의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의 표현력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예술 비평은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의 우수성도 따져야 한다. '이런 내용을 다뤘어야 했다'고 내용만으로 하는 평가는 부당하다. 그렇게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형식의 우수성, 다시 말해 내용을 얼마나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했는지'도 가늠해 주어야 한다. 예술의 본질은 형식에 있으니까! (만일 감독의 의도가 '인간 다이애나'의 따뜻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다음의 김혜리 기자 평은 조금은 퇴색된다.)

 

"다이애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인간이었는지 이야기하려는, 오직 호의로만 똘똘 뭉친 영화가 대상을 드라이플라워같이 납작하게 눌린 생기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으니 아이러니다. 예의바른 히르비겔 감독은 다이애나 왕자비뿐 아니라 관련된 어떤 인물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다. 다이애나와 그녀의 연인을 제외한 영화 속의 모든 인물은 다이애나가 지나갈 때 주목하고 수군거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녀의 인생에 중대한 변수였던 전남편과 시집 식구들, 아들들의 이야기를 부자연스럽게 회피한다. 생의 마지막 날 저녁 호텔을 나서는 다이애나의 뒤를 줄곧 따라다니다가 그녀가 복도 끝에 이르는 순간 경호원에게 제지라도 당한 양 뒤로 쑥 빠져버리는 도입부의 카메라는, 영화 전체에 대한 꽤 정확한 예고였던 셈이다." <씨네 21> 김혜리

 

예술비평은 감독(이나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며 그것이 얼마나 잘 표현되었는지도 십분 감안해야 한다. 내용의 타당성, 정당성, 충분성을 묻는 것과 동시에 말이다. 다이애나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감독의 의도였다면, 나는 김혜리의 지적에 동감한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인간 다이애나'를 그려내는 것이었다면, 기자의 평은 조금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다이애나'를 심층적으로 그려내려 했다면, 역시 기자의 말이 합당할 것이다. 심층적이기 위해서는 왕실에서의 다이애나도 보여주며 호의와 적의의 균형점을 찾아서 그녀를 그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극본가와 감독은 여러 이유로 왕실 이야기는 제외 했으리라. 민감한 사안이어서거나 작품성 뿐만 아니라 대중성을 고려했거나 등등. (내가 감독의 의중을 과도하게 감안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정해야겠다.) 

 

하스낫, 다이애나, 도디의 실제 사진

 

 

영화 <다이애나>는 내게 무엇이었나. 내가 몰랐던 새로운 인간 유형을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인간이해의 깊이를 도와 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고 있던 이해(카툴루스 VS 호라티우스)에 사례 하나를 더해준 것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6점에서 점수를 좀 덜어내야겠다. (말씀드렸던 것 같다. 내 점수는 오락가락한다고.) 아니다, 이건 나의 경우일 뿐이니 그대로 두어야겠다. 하하.

 

영화는 다이애나에 대한 내 호기심을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카툴루스의 수많은 후예들을 위로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K 누나, L 양... 등등)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의 의도가 다이애나가 누구를 사랑했는가, 그녀의 사인은 무엇인가. 왕실에서의 삶은 어떠했나가 아니라, 다이애나는 어떤 사람이었나를 추적한 것이라면, 훌륭히 해냈다고 생각한다.

 

내용의 정확성, 완전성 등을 따지는 것과 동시에 내용을 표현한 형식의 효과성과 적절성도 따져야 한다는 내 비평관을 김혜리 기자의 평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유익이었다. 예술은 이성적 해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감성적 경험의 대상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예술비평이 더욱 예술비평다워진다. 철학서에 대한 비평과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