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 8일이 어두워졌을 때 한국을 떠났다. 9시간 넘게 날아서 도착한 시애틀은 여전히 12월 8일이었다. (시애틀과 한국의 시차는 15시간이다. 한국이 빠르다.) 시간은 오전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비행시간을 제외하더라도, 하루의 낮 시간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여행이라면, 나는 매일 여행을 떠날 것이다. 하루씩 젊어지는 여행!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젊어지는 것이 과연 멋질까, 하는 철학적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 그런 여행은 존재하지 않고, 게다가 하루씩 젊어지는 '인생'이나 '일상'이 아니라, 하루씩 젊어지는 '여행'이니, 선택은 자유다. 망상이지만, 정말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종종 여행을 떠날 것이다. 삶을 사랑하고, 삶의 소멸이 싫으니까. (삶은 한 번 뿐이어서 아름다운 것이라는) 소멸의 아름다움에 관한 생각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감안한 지혜일 테고.

 

기왕에 시간을 되돌린다면 스물 네 시간이 좋겠다. 열두 시간씩 되돌려진다면 잠잘 시간을 놓치기 십상일 것 같다. 나도 비행기 안에서 좀 자긴 했지만, 쪽잠이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인데, 여기서는 아침 11시가 되어가고 있으니, 잠자리의 달콤함이 슬쩍 그립다. 몸이 무거운 까닭이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더부룩하다. 오랜 비행을 감안하더라도, 몸이 축 난 건 처음이다. 조금씩 나이 먹고 있음의 표지인가, 하고 생각했다.

 

 

2.

좀 어때, 하고 입국 심사대 직원이 내게 영어로 물었다. 나는 머리도 아프고 속도 엉망이라고 대답했다. 직원은 유감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좀 어때?"라는 말에는 "Good" 정도로만 대답하는 게 이곳 인사 문화라는 걸 나중에 친구 남편을 통해서야 알았다. 벌써부터 시작된 셈이다. 여행자의 실수, 낯선 문화와의 조우, 새로운 배움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심사대를 지나 공항 라운지에 나와서도 내가 여행 중임을 실감하지 못했다.

 

공항 내 곳곳에 비치된 여행안내 자료도 여행 기분을 돋우지 못했다. 나는 몇 가지의 안내지를 뽑아 가방에 넣었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이동해서 의자에 앉았다. '나 왜 이렇게 능숙하지, 이곳에 사는 사람 같잖아.' 이것은 나만의 생각뿐인지도 모른다. 복장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표정은 얼른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을 테니까. 아니, 사실 복장은 북미 스타일로 신경을 썼다. 내가 북미 스타일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화장실에 앉았다. 화장실 개별 칸은 크고 깨끗했다. 휴지는 야들하고 부드러웠다. 덮개를 씌우는 커버도 있어서 흡족했다. 그때, 들어보지 못한 제목 모를 팝송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내가 해외에 와 있구나, 이곳은 미국이구나' 하고 실감했다. 낯선 공항도, 여행 안내지도, 넘쳐나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화장실과 팝송의 합작으로 이뤄낸 것이다. 여행이 이렇다. 인생이 종종 그런 것처럼, 예측 불허다.

 

LINK 티켓. 공항과 시애틀 시내간 요금은 2.75달러

 

3.

시애틀 공항의 약칭 이름은 '시택'이다. 시택 공항이 시애틀과 타코마 시 중간에 위치해서다. 공항에서 시애틀 시내로 가는 손쉬운 길은 LINK를 타는 것이다. 나는 마치 인천공항에서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듯이 편안하게 LINK를 이용했다. 공항에서 양치질을 하지 않았다는 걸 제외하면 마음이 편했다. LINK는 마틴 루터 킹 주이어 스트리트와 나란히 달렸다. 나는 거리를 쳐다보았다. 하늘은 예상대로 잿빛이었다.

 

내 마음이 왜 그리도 편안했을까? 우선은 여행자로서의 내 마음가짐 덕분일 것이다. 기껏해야 길을 잃어버리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암, 치매에 걸리거나 전신 화상을 당하는 일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일이다. 어제 헤어 디자이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제 친구가 파리로 출장갔는데요, 영어 못한다고 너무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중요한 일이면 영어 못하는 말단 직원을 보냈겠냐고. 중요한 일로 가는 거 아니니까 괜찮다고 그랬어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어를 못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거나, 반드시 들러서 처리해야 하는 일은 없다. 영어를 몰라도, 용기만 낸다면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을 일을 완수하는 데에 큰 장애물도 없을 것이다. 긴장하거나 걱정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숙박지를 못 정했더라도 돈을 좀 더 내고 가까운 호텔로 들어가면 되니까. 난 '되고의 마인드'를 품었다. '길을 잃으면 좀 더 걸으면 되.고.'

 

마음이 편안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곧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다. 한국에서 카톡을 주고 받을 때, 친구가 말했다. "LINK를 타고 Universy Street 역에 내리기만 하면, 내가 딱 서 있을게요." 사실, 친구의 말이 나를 무척 안심시켰다. 같은 말이라도, "역에서 잘 내려요. 쉽게 만날 거예요." 와는 달랐다. 여행 준비를 전혀 못했다는 카톡에는 "여행 준비는 비행기에서 하는 거 아니예요?" 라고 위로했던 그녀 답다. 마음이 편했던 결정적 이유다. 

 

시애틀 카페 <스토리빌> 파이크 플레이스점

 

4.

열차가 미끄러지듯 대학로 역으로 들어섰다. 열차가 채 서기도 전에 친구와 나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이 아닌 시애틀의 LINK, University Street  Station이 그리도 편안했던 것은 친구를 만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강연으로 자주 가서 익숙해진 도시지만) 언젠가 낯선 고장 광주로 가던 때, 군대 후임병을 만난다는 생각에 열차 전체가 훈훈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친구가 이런 존재다. 내가 시애틀 60만 인구 중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친구 한 명의 존재가 낯선 도시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말이 잘 통하고 생각도 지혜로워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지금 생각하니, 남미 사람처럼 반가운 포옹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악수만 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고, 그녀는 남편이 있는 사람임을 감안했던 처사지만, 반갑다는 말 한 마디도 못하다니!

 

우리는 일주일 만에 만난 사람처럼, 가까운 카페로 이동하여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첫번째 시애틀 여행지는 카페가 되었다. 친구는 아침에 마시지 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했고, 카페는 나다운 공간이니 괜찮은 출발이라는 생각이 쏜살처럼 스쳐갔다. 우리의 대화가 줄곧 이어졌기 때문이다. 친구가 사는 이야기, 남편 이야기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진솔한 생각들이 오고 갔다. 대화는 시애틀 날씨와 같은 진부하지 않은 주제였고, 서로를 좀 더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친구끼리의 이해는 아무리 깊어져도 지나치지 않다.

 

 

5.

자리를 옮겨 파이크 플레이스 시장 내에 위치한 로컬 식당에 갔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메뉴는 클램 차우더, 인기 많은 곳이고 친구가 종종 찾는 곳이란다. 샘플러로 시켜, 네 가지 종류의 차우더를 맛보았다. 자리가 없어서 대형 캐리어를 간이 테이블 삼아 식사했다. 기분이 좋았다. 여행 기분이 든 데다가, 차우더는 맛났고, '시애틀에 사는 친구'라는 존재가 여행 계획의 부재에 대한 내 염려마저 완전히 날려 버렸다. 

 

시애틀도 자신이 어떠한 도시인지를 알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애틀은 11월부터 익년 4월까지인가가 우기다. 일주일에 6~7일은 흐리고, 세찬 비는 아니지만 가랑비나 보슬비가 자주 내린다고 했다. 오늘 비는 좀 세찬 편이라고도 했다. 나는 비를 예상하고 왔다. 아니 기대 비슷한 감정으로 왔다. 우기 중의 여행이니, 시애틀다운 면모 하나를 만난다는 기대 말이다. 그래서 비가 반가웠다.

 

(독서처럼) 여행도 기대할 바를 기대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인 기대다. 합리적인 기대는 이해에서 온다. 상대의 본질과 특징 그리고 장단점을 이해하면 너무 높은 기대를 하여 실망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너무 낮게 기대하는 바람에 멋진 일을 경험할 기회를 놓치는 일도 드물어진다. 나를 소망했다. 친구를 만날 때에는 친구를 좀 더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시애틀과 마주할 때에는 이 도시가 어떠한 곳인지를 이해하는 여행이기를!

 

시애틀의 하늘은 여전히 비를 뿌린다. 나는 차우더 그릇을 비웠다. 속이 따뜻하니 마음이 더욱 편안해진다.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