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가끔은 북미여행

워싱턴대학교에서 보낸 하루

카잔 2014. 12. 10. 11:54

 

1.

12월 9일, 시애틀 여행 이틀째 날이다. 어제 그야말로 긴긴 하루를 보냈는데다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느라 꽤나 피곤했는데, 7시 30분에 눈을 떴다. 숙박 중인 Seattle University Travelodge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음식은 별로였지만 끼니로는 충분했다. 사과와 오렌지, 커피와 머핀, 삶은 계란과 오렌지 주스를 먹었다. 오렌지 껍질은 까기가 힘들었고, 사과는 푸석했다. 주스와 커피 그리고 계란은 맛났다.

 

식당에는 미국인 노부부들이 많았고, 동양인들도 두어 테이블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알아듣지 못한 영어 뉴스가 흘러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가는 비가 내렸다. 숙소 앞 OFFICE DEPOT에 들러 전압 컨버터와 핸드워시용 소독제를 샀다. 가죽가방을 들고 오는 바람에 비오는 날의 외출용 가방이 없어서 하나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왔다. 하루 이틀 더 지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객실로 돌아와 여행기 포스팅을 하나 올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헤르페스 각막염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11시 30분부터 무려 3시간 가까이 잤다. 1시간 30분을 예상한 낮잠이 두 배의 시간을 잡아 먹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몸이, 특히 눈이 회복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막염은 나을 기미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눈이 따갑고 눈물이 난다.

 

커튼을 걷었다. 반가운 손님이 나를 반겼다. 햇살이었다.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햇빛이 대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비타민 D를 생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외출을 서둘렀다. 오후 3시의 외출이니 두 시간 후면 어둠이 내리깔릴 것이다. 짧은 여행이 되게지만 아쉽지 않다. 진하게 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전에 글을 하나 썼고, 눈을 위해 쉬었던 것도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숙소 밖으로 나오니, 눈을 떠서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보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한 시간만 더 지나도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것 같았다. 맑은 하늘이 곧 사라진다 생각하니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중요한 것이라면 사라지거나 말거나 항상 소중하게 느낀다면 좋을 텐데, 왜 사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아쉬워하는 걸까? 다른 생각들도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소중한 것들이 드문 걸까? 드물기에 소중해진 걸까?

 

2.

오늘의 여행지는 단 한 곳이다. 워싱턴 대학!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선글래스를 썼으니 딱 여행자의 모습이다. 선글래스를 챙기면서도 '시애틀의 우기에 쓸 일이 있을까' 했는데, 나 뿐만 아니라 조깅하는 중년의 남성이 썬글래스를 쓰고 내 옆을 달려갔다. 마른 하늘에도 날벼락이 떨어진다는데, 우기에 햇빛 나는 일 쯤이야 당연하지! 나는 걸어서 워싱턴대학교에 갔고, 걸어서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두 다리는 평소에도 소중하지만, 여행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다. 튼튼할수록 유용하다. 늦은 오후, 아직 여행을 향한 정신적 열망이 남았더라도 다리 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날 여행은 그 즈음에서 마무리해야 한다. 중국 시안에서도, 페루 쿠스코에서도 예정된 일정보다 빨리 트래블 프로그램을 마쳐야 했던 것은, 참가자들이 다리 아프고 피곤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날 가지 못했던 곳에는 이튿날 혼자 갔었다.

 

두 다리가 튼튼하면 적잖은 비용과 시간을 절감해 준다. 나의 몸매는 부실하지만, 두 다리는 튼튼한 편이다. 씨름, 축구, 돼지싸움 등 허벅지와 다리 힘이 필요한 운동을 곧잘 한다. 나의 여행이 알찬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튼튼한 다리 덕을 좀 봤다. 왠만한 거리는 지치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다. 걸으면서는 자세히 볼 수 있고, 내 마음을 이끄는 골목길을 만나면 불쑥 들어설 수도 있다. 마음이 길을 선택했고, 두 다리가 순종했다.

 

아래는 기분 좋게 걸어다닌 오늘의 여행지들이다. 

 

 

 

 

3. 

워싱턴대학교를 방문한 날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비 내리는 시애틀의 거리를 걸으며 감상에 젖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저 신바람을 타고 도서관을 이리저리 쏘다닌 날이었다. 책, 독서, 공부는 나를 춤추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해리포터 촬영한 공간이 어디인지 확인하기보다는 그저 이런저런 책들을 펼쳐보고 내 상각의 나래를 펴기에도 시간이 아쉬운 날이었다. 내일은 여기에 다시 오지 말아야지. 사색과 공부도 행복하지만, 세상에는 그에 못지 않은 일들도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