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2일차 오후]

노스웨스트 번화가 중 하나인 펄 디스트릭트(Pearl District)를 돌아다니다.

 

Quility INN (Portland)

 

1.

숙소(Quality Inn) 체크인을 마치고 객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퀸 사이즈 베드가 두 개나 있는 객실인데, 이럴 때에는 여행 친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양가감정이다. 여행은 곧 삶의 일부이기에 함께 하기에 좋은 것들과 혼자 하기에 좋은 것들이 공존한다. 호텔 비용을 지불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식사 때에는 친구가 있으면 좋지만, 시장이나 미술관을 둘러볼 때에는 혼자가 낫다. 나는 지금 침대가 두 개 놓인 객실을 보고 있다. 친구가 떠오른다. 홀로 조용히 차 마시는 이 시간이 좋다. 친구 생각을 지운다. 혼자 치러야 하는 객실료는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가임을 알기에.

 

2.

포틀랜드의 지금 하늘은 잿빛이다. 오전 잠시 맑기도 했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바뀌는 날씨다. 시애틀에 일주일을 머물러서인지, 비만 내리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커피 잔이 비워지기도 전에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지 않으면 비가 내리는 줄 모를 정도다. 거리의 바닥을 보고서야 비를 인식한다. 고인 빗물이 비가 떨어지면서 수많은 동심원을 그린다. 하지만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시애틀이나 포틀랜드에서는, 가랑비를 햇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맞는다.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이거 좀 맞아도 돼요. 한국과는 달라요. 시애틀 비는 깨끗해요.” 포틀랜드는 왠지 더 깨끗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나는 우산을 쓰고 다녔다. 일단 비 맞는 것은 탈모에 영향을 줄 것 같아서다. 다시 비가 그쳤다. 우산을 가방에 챙겨 넣고 숙소를 나섰다.

 

3.

목적지는 펄 지구(Pearl District)다. 안내 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곳이다. “다운타운의 창고 거리가 모습을 바꾸어 새로 태어났다. 뉴욕의 소호나 밴쿠버의 예일 타운처럼 창고 거리는 공간을 이용한 갤러리와 인테리어 숍이 눈에 띈다. 레스토랑도 많이 생겨났고 매월 첫째 목요일(First Thursday)에는 영업시간을 연장해 운영한다.”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라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SUBWAY가 눈에 띄었다. 배가 고파 들어갈까 하다가 이왕이면 펄 디스트릭트에 가서 먹자고 생각하며 참았다.

 

어둡지만, 자전거 4대가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모습

 

컨벤션 센터 근처에 위치한 숙소에서 펄 디스트릭트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다. 숙소 주변을 구경도 할 겸 걷기로 했다. 걷는 동안 어두워졌다. 겨울의 시애틀과 포틀랜드는 5시면 한국의 밤 8~9시처럼 캄캄해진다. 퇴근 시간인가 보다. 차량 통행이 많아졌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베트남에서 보는 오토바이 행렬에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내가 브로드웨이 다리를 건너는 동안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미국에서 가장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라는 게 실감났다.

 

4.

펄 디스트릭트에 들어서자마자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가게는 SUBWAY였다. 자꾸 식당이 눈에 띄는 걸 보니 아무래도 얼른 밥을 먹어야겠다. 하지만 SUBWAY는 안 된다. 여기에 갈 거라면 진작 갔지. 나는 좀 더 걸었다. 하지만 많은 가게들이 이미 문을 닫았다. 이제 고작 6시가 넘었을 뿐인데, 거리는 한국의 밤 10시 분위기다. 길을 걷다가 눈에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HEAT & EAT! Ready-To-Go Dinners”

 

 

집에 가서 익혀서 먹기만 하세요, 정도의 의미일 텐데 이 가게가 마음에 든 것은 한 아주머니가 집밥을 하듯 요리를 하나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운터에는 한 남자가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게 밖에 게시된 메뉴판을 보았다. 대부분 Take Out을 위한 요리가 많았지만 가게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도 있었다. 가게 안에 테이블 하나가 보였다. 들어가서 터키식 크랜베리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테이블 옆에 잡지 몇 권이 놓여 있었다. 하나를 집어 들고 읽으면서 저녁 식사를 먹었다. <TRAVEL+LEISURE>라는 잡지인데 여행자에게는 매력적인 제목이었다. 게다가 <2014 WORLD's BEST AWARDS>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실은 잡지였다. 수상한 호텔, 섬, 레스토랑 등을 확인하고, 필요한 내용은 사진을 찍었다. 혹시 이걸 팔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카운터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이게 파는 건 아닐 테지만, 제가 값을 주고 살 수는 없을까요?”

 

 

남자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요리를 하던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도 비슷한 느낌의 웃음을 지었는데, 이내 허락했다. 남자는 내게 잡지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고, 나는 “찾아봤는데 가격 표시가 잘 안 보이더라”고 했다. 남자는 그냥 3달러를 달란다. 지폐 3장을 지불하면서 감사함을 전했다. 별건 아닌 일화를 기록해 두는 건, 자료를 찾고 확인하고 구입하는 것이 내가 여행하는 모습의 중요한 일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책이든, 잡지든, 팜플렛이든 말이다.

 

 

5.

펄 디스트릭트의 명소 중 하나인 자미슨 광장(Jamison Square)에 갔지만 역시나 조용했다. 광장 주변의 근사한 레스토랑도 문을 닫았다. 7시가 30분도 안 된 시각인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펄 디스트릭트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려던 내게는 난감했다. 몇 블록을 걸었다. 마음에 드는 카페 <daily cafe d>를 발견했다. 거기에 들어가면 1~2시간은 머물 테니, 찜해 두고서 세 블록을 더 걸었다. 카페에 들어갔다 나오면 정말 문을 다 닫아버릴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가게의 ‘OPEN' 간판 불은 꺼져 있었다.

 

 

<cafe d>에 들어섰다. 다행히 8시에 문을 닫는다. 시간을 확인하니 7시 05분! 한 시간이면 커피를 즐기고 심신을 정비하고 다음 동선을 생각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우선 카페 곳곳을 살펴보았다. 포틀랜드와 로컬 안내 자료를 한곳에 비치해 두었고, 카페 벽면에는 그림도 전시되어 있었다. 구입하고 싶으면 아무 점원에게나 물어보라는 안내와 그림마다 가격이 적혀 있었다. 모두 800달러였다. 카페는 음식도 팔았다.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즐겁게 또는 홀로 저녁 식사를 먹고 있었다. 나는 왜 이리 연하냐고 투덜대면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즐겼다(!). 자기가 에스프레소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면서.

 

 

6.

나는 아래 그림이 매우 좋다. 남자는 이쪽으로 가지만 저쪽에 대해 열려 있다. 편협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는 듯, 한 눈을 팔면서도 자기 길을 간다. 자기 길을 가는 모습은 발끝에 집중하는 고개 숙인 모습이 아닐 것이다. 더 나은 길에 대한 융통성 있는 눈으로 주변을 관찰하면서도 지금 걷는 길에 정성을 다한 발걸음을 선사하는 것이 자기 길을 걷는 모습이이라.

 

 

여자의 몸은 그쪽을 향하지만 자신의 길에 회의한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정적인 회의가 아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회의다.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적인 사유다. 10분이라는 시간 안에 생각과 행동을 모두 집어넣을 순 없지만, 일주일 또는 한 달이라는 시간에는 생각과 사유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남녀 모두 길을 걸어가되 그 길만이 진리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음 장면에서는 남녀가 향하는 방향이 서로 바뀔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남녀는 다른 곳을 향하면서도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의 방향이 바뀌는 다음 장면에서도, 서로 다른 길을 저만치 걸어가고 나서도, 세월이 흘러 서로의 삶이 모습이 많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는 게 사랑일 것이다.

 

(나는 화가가 이 모든 걸 고려하여 그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작가는 작품을 만들고, 독자는 해석을 만든다. 세계의 일부를 제대로 구현한 작품이 위대하고, 그것은 여러 독자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된다. 독자는 종종 작품에 해석을 더하지만, 때로는 메시지도 캐치하지 못한다.)

 

이 그림을 사오지 못한 게, 이제야 아쉽다. 아! 이 뒤늦은 후회를 어찌할꼬. 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조금 진정이 되고 아쉬움이 달래진다. 800달러짜리 그림을 어찌 살 것이며, 샀다면 또 어떻게 들고 다녔을까. 다행이다. 아쉬움과 다행스러움이 교차하는 감정이라니, 난 왜 이리 복잡하단 말인가.

 

펄 디스트릭트를 걷다가 체육관이 보여 잠시 구경했다.

 

7.

안내 책자를 펼쳐 펄 디스트릭트 부분을 다시 읽었다. “스트리트가 궤고 옆인 노스웨스트 19번가와 에버릿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일대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펄 북부의 자미슨 광장 일대는 몇 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아름답게 변했다. 고급 콘도미니엄이 들어섰고 포석을 깔아놓은 길가에는 화려한 부티크가 늘어서 있다.” 방금 둘러본 곳에 대한 설명이었다. 거리가 고급스럽긴 했다. 내가 있는 곳은 펄 디스트릭트의 북쪽 일부임도 알게 되었다.

 

 

 

 

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는 동안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그 곳. (여긴 너무 한산해서 펄 디스트릭트의 매력을 모르겠으니.) 나는 카페에서 나와 13번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걸었다. 과연 거리 양쪽으로 멋진 레스토랑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13번가와 에버릿 스트리트와의 교차로 근처로 갈수록 고급 레스토랑이 많아졌다. 에버릿 스트리트 13번가에서 이제 19번가 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북적인다는 그곳이다. 하지만 19번가 쪽 반대방향이 더 밝은 불빛이다. 결국 19번가에 갔더니, 황량한 주택가다.

 

 

안내책자의 오자다. 10번가를 19번가로 오기한 것! 안내책자를 탓할 마음은 없다. 20분 정도를 잡아먹긴 했지만, 덕분에 남쪽으로 걸으며 펄 디스트릭트의 면모를 맛보았으니까. TILT라는 곳은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은 레스토랑이다. 10번가 & 에버릿 스트리트에 위치한 컵케이크 존스에서 컵케이크를 맛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나는 펄 디스트릭트 이곳저곳을 다녔다. 펄 디스트릭트 남쪽으로는 포틀랜드의 다운타운으로 연결된다.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저녁 8시 30분밖에 되지 않았으니, 남은 하루는 파웰북스에서 보내면 될 테니까. 파웰북스는 밤 11시까지 영업한다. 천국 같은 곳이다. 내가 보기엔, 포틀랜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이기도 하고.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