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4일차] 2014년 12월 18일(목)

 

1.

밤새 여러 번 꿈을 꾸었다. 꿈에서의 날짜는 상욱이가 죽는 날이었다. 상욱이가 분명 살아있었는데, 나는 그 날 상욱이가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꿈은 이렇듯 비현실적이다. 어쨌든 꿈 속에서 나는 상욱이가 원하는 물건들을 챙겨서 병원으로 갔다. 나는 긴급했고 다급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뭐였더라. 꿈 속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물건도 가물가물하고, 그것이 실제 상욱이가 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장면은 카페에 가서 상욱이가 마실 커피를 내가 주문하는 모습이다. 이런 꿈을 여러 번 꾸었고, 내가 구해야 하는 물건은 계속 바뀌었다.

 

 

2.

오전 두 시간을 Grendel's Cafe에서 보냈다. (아마도) 미국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잡지를 읽었다. 미국식이라지만 한국에서도 자주 그리 즐겼던 사실을 감안하면 과연 글로벌한 시대다. 실제로 미국 문화는 전 세계의 많은 지역을 지배한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빼면, 미국에는 마치 한국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이 많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보다 친숙한 문화이기 때문이리라.

 

 

미국 문화의 글로벌한 진출 또는 장악은 순수한 문화의 전파보다는 정치적 헤게모니의 술수인 영역도 많을 것이다. 20대에 노암 촘스키의 저서 몇 권을 읽은 덕분에 미국의 다른 일면을 알게 되었지만, 이후로는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포틀랜드 거주를 꿈꾸는 배경 중 하나는 영어 학습의 이유도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아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미국을 아는 것이 더욱 유용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부는 비실용적일 때, 다시 말해 별다른 실용성이 없음에도 파고들 때 깊어지고 새로운 유용함을 발견하는 법이니 실용과 비실용의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카페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잠시 했는가 하면,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기도 했다. 벽면에 걸린 그림들을 어설프게 감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을 가장 많이 들인 일은 카페에 비치된 잡지와 책을 읽은 것이다. “이번 겨울에 꼭 해야 할 50가지 일들이라고 홍보하는 잡지의 유혹에 걸려들어 그 목록을 살폈고, 뒤적이다가 파텍 필립의 유명한 문구를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You never actually own a Patek Philippe. You merely take care of it for the next generation." 시계 홍보에만 쓰이기 아까운 참 멋진 문구다. 파텍 필립이라면 어울리기도 하지만, 미국은 파텍 필립 대신에 환경을 넣을 줄 알아야 하는 나라다.

 

 

카페에는 나를 매혹시킬 만한 제목의 책이 있었다. the Writer's Handbook60명의 위대한 작가들이 쓴 60개의 에세이를 담은 책이다. 서문에는 프랭크 맥코트라는 작가의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Being a writer is a splendid way to spend one's life."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문장이었다. 누구나 작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소명의 차원), 누구나 글쟁이가 되는 것은 유익하다(삶의 기술의 차원), 정도로 결론 내린 생각이었다. 앉아서 한 챕터를 읽었고,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세 개의 챕터를 페이지를 넘겨가며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읽어보고 유익하면 한국에 가서 구입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3.

점심식사를 <SIZZLE PIE>에서 피자와 콜라를 먹었다. 한국에서도 거의 먹지 않은 메뉴지만, 버거와 피자를 한 번씩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피자의 크기가 정말 엄청났다. 한 조각을 시켜서 배불리 먹었던 나는 두 조각씩 먹는 미국인들이 놀라워보였다. 테이블로 가져온 조각 피자의 '크기'를 실감나게 카메라에 담느라 3~4분이 지나서야 먹을 수 있었다. 미국도 웰빙 바람 탓인지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도 더러 보였다. 무가지 하나를 집어들어 뒤적이다가 영화 <Wild> 광고를 보았고, 이 영화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4.

6만원 대 착한 가격으로 예약한 숙소 Travelodge는 다운타운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는다. 식사 후 Travelodge하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들고 여행을 시작했다. 20분 남짓 걸었으려나.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하기로 생각한 레스토랑 Higgins가 눈에 보인다. 조금더 북쪽을 향해 걸으니 PORTLAND라고 쓰인 커다란 네온싸인이 눈에 띈다. Heathman Hotel 이다.

 

 

히스먼 호텔에 가는 이유는 어젯밤 파웰북스에서 포틀랜드 관련 책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책 Peaceful Place Portland에서 히스먼 호텔 라이브러리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호텔 측은 1992년에 작은 도서관을 마련했다. 히스먼 호텔은 전통적이고 품격 있는 호텔로 이곳에 묵었던 작가(존 업다이크 등)의 친필 사인본이 있기도 하다. 책은 친절하게 소개한다. “책장에서 책을 뽑아 읽거나 와인 테이스팅에 참가하려면 호텔에서 묵어야 하지만, 잠시 들러 구경하는 것이라면 호텔의 투숙객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5.

라이브러리에서 잠시 앉아 쉬다가 나왔다. 히스먼 호텔 1층 코너 초콜릿 카페에서 마시는 초콜릿을 한 잔 마시고 선물용 초콜릿을 샀다. 매니저가 너무 멋져 보여 말을 걸어 20분 동안 포틀랜드의 매력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히스먼 호텔은 위치가 좋다. 시청과 스퀘어, 노드스트롬 등 중심가가 도보 5분 이내 거리에 있다. 노드스트롬 백화점에 들러 잠시 구경하다가 중심가를 배회했다. 날이 어두워진지 오래되었고 마지막 일정으로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커피 한 잔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숙소로 걸어가는 밤거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굵은 비를 작은 우산은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문화예술회관으로 보이는 건물에서 나오는 부모와 자녀를 보면서, 참 좋은 부모를 가졌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어서가 아니다. 좋은 가정 교육은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선물이니까. 나는 아이가 부러웠다. For the next generation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인문주의를 권함』을 쓰면서, 다음 세대를 생각할 줄 아는 의식 도는 감성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더욱 생생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술회관 옆에는  좋아보이는 아파트단지가 있었다. 일부러 그 단지를 통과하여 걸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호텔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흠뻑 젖은 양말부터 벗었다. 좋다, 얼마간의 고독과 적막감, 마음 편한 숙소 그리고 자유로운 여행자의 일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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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