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즐거운 지식경영

나는 왜 공부하는가

카잔 2015. 4. 9. 11:30

1.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를 많이 하는 요즘이다. 천성이 치열하지 못해 매일의 공부량은 들쑥날쑥하다. 익힌 것도 있지만, 여전히 지성에 목마르다. 깊이 알고 싶고 제대로 알고 싶다. 본격적인 공부는 이제부터인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서양철학사의 얼개와 문예사조의 흐름을 잡은 공부였다. 지성사의 맥락을 잡은 것만으로도, 공부 갈피를 잡고 통합적 관점을 취했다는 점에서 유익했지만, 앞으로는 그 유익을 더욱 절절히 느낄 것 같다. 새롭게 배운 지식을 정돈하고 정리할 지식 아카이브를 만들어 둔 셈이니까.

 

지적 아카이브를 세우는 일은 3년 정도 걸렸다. 그리스 - 로마 - 영국 - 미국 - 이스라엘 다섯 나라를 중심으로 서양사의 거시적 흐름을 잡았고, 역사적 명장면과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얼개를 세웠다. 연표와 지도 확인을 곁들여가며 세부사항에 함몰되지 않고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양철학사는 무엇보다 고대 - 중세 - 근대 - 현대마다 철학사적 전환이 일어난 배경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시대별 주요 철학자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도 곁들였다. 서양 문학은 문예사조로의 접근과 고전 텍스트로의 접근을 모두 취했다. 개론 공부와 각론 공부의 조화를 이뤄 각각의 장점을 모두 얻으려고 노력했다. 

 

2.

얼개를 잡았으니 이제 고전 텍스트 하나하나를 탐독할 차례다. 신중하게 목록을 선정했다. 40여권의 고전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즐겁기도 했지만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쉽지는 않다. 도서 목록이 아무리 길어도 '이걸 언제 다 읽지?' 하는 푸념이나, '시간이 부족하네'라는 조바심은 일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게 아니라, 명작들을 자유롭게 선정하여 일과 후 그것에 몰입함으로써 인간이 생각하고 추구한 것들의 너비와 깊이를 깨닫고 인류의 삶과 심장의 소리에까지 이르는 것”이라는 헤세의 말이 내면에 자리잡은지 오래 되었으니까.   

 

공부는 재밌다. 재미는 주관적인 단어다. 어떤 이는 공부, 어떤 이는 사람과의 교류, 어떤 이는 컴퓨터 게임을 두고 재밌단다. 다른 이들의 재미가 내게는 지루할 수 있다. 공부가 참으로 재밌다는 사실이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재미가 위험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미'가 타자를 억압하거나 자신을 정체시키기도 하니까. 독서가의 책을 권하는 행위나 여자친구와 함께 프로야구를 시청하는 행위는, 새로운 재미의 세계로 초대하려는 선한 의도이더라도 일면 억압적이다. 게임의 재미에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하는 십대와 독서의 재미에 빠져 삶의 경영에 소홀해진 독서가는 무엇이 다를까.

 

3.

진지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바치는 행위가 있다면 그것의 의미를 묻는다. 학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는 학자, 역사학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묻는 역사가, 주부라는 업의 가치를 생각하는 주부들은 모두 자기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리라. 나 역시 내 삶을 사랑한다. 그러니 묻는다. '공부란 무엇인가, 나는 왜 공부하는가' 이것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보다 근원적인 질문이고 더욱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이런 물음을 처음 가진 것은 아니다. 이유를 묻고 스스로 동의하고 나서야 행동하는 성향을 가진 탓에, 무슨 일을 하든 목적과 의미 그리고 방법론을 묻고 시작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공부는 학습과 동의어다. 나에게 공부 또는 학습이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배움, 익힘, 과정이라는 세 단어가 모두 중요하다. 과정은 공부가 끝이 없음을 보여준다. 공부가 끝이 없는 재미라니, 얼마나 달콤한가! (끝없다는 말에 가슴이 막힌다면, 공부를 성취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다시 헤세의 말을 음미해야 할 순간이다.) 공부는 오락이다. 모든 것을 배워야 하고, 이데올로기에 맞춰진 학교 교육은 재미가 없지만, 자신의 관심사에 연결된 공부는 재밌다. 맞는 말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사정은 다를지도 모른다. 공부의 재미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이들의 결론인 건 아닐까? 배움이야 재밌지만, 그것을 익히는 과정은 때로 힘들고 때로는 지난하지 않은가. 

 

결론.

배움과 익힘 모두가 공부라면, 공부가 재밌을 수만은 없으리라. 공부의 재미는 실상 배우는 재미다. 물론 익히는 과정에서도 즐거움과 재미가 있지만, 그것은 지난한 익힘의 끝에 얻어지는 인고의 열매일 것이다. 자, 이제 나는 묻는다. 왜 공부하는가? 배운 것을 익혀 삶을 더 잘 살기 위함이다. 삶의 변화가 목적이지만, 시선을 삶에 두면 안 된다. 나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하리라. 나는 단편적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깨닫기 위해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삶의 도약을 위해, 깨달은 것들을 실천하고 싶다. 깨달음의 실천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 내 공부의 목적이다. 나만의 목적일 수 없다.  

 

알랭 바디우는 '후사건적 실천'이 삶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푸코도 자신의 모든 철학적 작업이 자기 변형(Transformation of the Self)을 위한 것이라 했다. 니체의 제자답게 푸코는 (정체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일탈'이 자기 학문의 목적이란다. 니체 역시 백년 전, 자신의 (옹졸하고 비겁한) 모습을 경멸하라고 말했다. 타인 경멸은 비인격이지만, 자기 경멸은 초인의 인격이다. 배우는 재미에만 빠진 학자들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재미만으로도 명성과 학위를 취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앎에 자기 삶을 던져 자기변형을 추구한 사상가들을 탐독해야겠다. 괜히 푸코, 바디우, 니체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푸코에 관한 텍스트를 읽다가 (동성애 성향과 고통스러운 말년을 제외한) 그의 삶과 사상을 상기하며 공부의 목적을 상기하고 다짐했다. '배우는 재미가 크지만, 깨달음의 실천을 통해 나의 변화를 위해 공부하는 중임을 잊지 말자.' 깨달음이라고 하니 인도의 현자들이 떠오른다. 앎과 삶이 괴리가 느껴질 때면, 꺼내드는 책들!  공부와 자기수양 모두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 켄 윌버도 머릿속을 스쳐간다.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왜 마음이 놓인 걸까? 지난 주 대구에서의 강연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게 찬탄을 보냈다. 진정이었겠지만, 내게는 과분했다. 그들이 보내준 박수에 걸맞는 삶을 살야겠다고 다짐한 오늘에서야, 체증이 내려간 듯 부담감이 떨쳐졌다. 오늘,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