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즐거운 지식경영

칸트의 식사 시간은 길다

카잔 2015. 4. 13. 09:44

칸트는 오후 1시에 그가 초대한 손님을 맞았습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식당으로 안내되었는데 식당에서는 평균 4시까지, 손님이 많은 때는 6시까지도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뒤 약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합니다. 처음에는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다가 아무데고 앉아 사색을 하고 때로는 중요한 착상을 수첩에 적기도 했습니다. 산책은 항상 혼자 했습니다. 산책한 후 나머지 시간을 독서로 보냈는데 그 시간에 또 친구가 찾아오면 그 친구랑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칸트는 정확히 10시에 취침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칸트의 제자 제자 야하만의 전언인데, 칼같이 정확하게 생활했던 칸트에게도 지적 교류를 위해서는 융통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칸트는 3시간 동안이나 식사를 했다. 통상적으로 세 시간, 때로는 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식사를 하며 교류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누군가와 지적인 담화를 나누는 것은 당시 유럽 지성사회의 특징이었다. 칸트의 규칙적인 일상도 지적 교류에서는 달라졌다. 지적 교류가 지성적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칸트만이 아니었다. 괴테의 바이마르 저택에도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괴테 제자 에커만의 저서 괴테와의 대화에는 괴테의 집을 찾은 대가들의 일화가 수없이 많다. 괴테야 워낙 정열적이고 사교적인 인물이라 지적 교류에 관한 열정이 쉬이 이해되나, 칸트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지적 교류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당연지사다. 지적 생활의 정점은 홀로 있음과 함께 있음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칸트는 홀로 사색과 독서에 집중하면서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지적 교류를 놓치지 않았다. 


독서의 즐거움을 맛본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피상적이고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독서 시간을 앗아간다고 하소연한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다. 19세기의 지성인 해머튼은 자신의 저서 지적 즐거움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젊은이에게 조언했다. 먼저 그는 젊은이의 마음에 공감했다. “사교계에 대한 당신의 부정적인 의견에 대해서는 크게 동감한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사교계 인간은 오락에 정신이 팔려 있고, 내용 있는 사항을 이해할 만큼의 집중력도 없고, 적당하게 생각을 정리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므로 곧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분명 사교계의 경박함이다. 당신은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그런 사교계에서 낭비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 만나 경박한 대화만을 나눈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세 가지 이유를 찾았다. 첫째, 혐오스러운 점을 잔뜩 지닌 인간이지만, 경탄할 만한 것들도 풍성한 것도 사실이다. 책은 그의 경탄할 점만 담아냈지만, 한 사람의 인간은 그의 모든 것이 담긴 존재다. 그의 전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인간이해를 돕는다. 둘째, 경박한 대화를 한 것은 지적 교류의 무용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적 대화를 나눌 대상자를 만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인물을 만나며 산다. 스스로를 가꾸어 혐오스러운 점보다 경탄할 점을 더 많이 가진 인물로 성장하면 시시한 교류가 점점 더 지적인 교류로 자연스레 바뀌어갈 것이다. 셋째,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 어렵다. 책은 변덕스럽지도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 관계의 평화를 지속하기가 힘들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배울 줄 알게 되는 것만큼 그리고 책에서 배운 지식을 인생사에서 체험하는 것만큼 깊어지는 게 아닐까.

 

사람들과의 교류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지적인만남을 체험하지 못한 채로 사람과의 만남이 펼쳐내는 가능성을 섣불리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사교계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으려는 젊은이를 염려하며 건넨 해머튼의 조언이 옳다고 믿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경박하게 생각하는 사교계에도 개인적으로 좀 더 잘 알게 되면 당신에게 가장 유익한 지적 조언을 지혜롭고 유쾌하게 해줄만한 인물이 있다.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면 이러한 조언을 얻지 못한다. 살아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 가장 풍부한 문학조차 대체물이 되지 못한다. () 자신의 중대한 공부시간을 별로 빼앗기지 않는 정도에서 사교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