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52분.
차창 밖으로 봄 햇살을 기대했는데 짙은 안개가 산을 뒤덮고 지면까지 내려와 있다. 마산에서 대구로 향하는 열차 안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약간의 허기를 느낀다. 간밤에 충분한 잠을 자지 못하여 눈이 조금 따끔거리기도 하고, 이로 인해 기분이 그리 상쾌하지 않다. 생수라도 하나 사 먹고 싶은데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음료카트는 소식이 없다. 봄 햇살이 비치면 안개가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상쾌하지 못한 아침 기분도 햇살 맞은 안개처럼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직은 햇살도, 상쾌함도 찾아오지 않는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놀랍게도, 참 신기하게도, 스승의 날임을 인식하고 키보드로 오.늘.은.스.승.의.날.이.다, 라고 두드리는 순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오늘은 참으로 기다렸던 날이 아니던가. 그래! 나는 이 날을 기다렸다. 5월 초였던가, 4월 말이었던가? 올해는 꼭 학창 시절의 은사님을 찾아 뵈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은 중학교 때의 수학 선생님이셨던 배수경 선생님이다. 이후, 고등학교 때의 현정국 선생님, 전광춘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도 만나 뵙고 싶었다. 하루 만에 모든 분들을 만나 뵐 수는 없을 게다. 기껏해야 한 두 분일 터이고, 더 많은 분들에게는 전화 연락을 해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게 만나 뵐 분들을 결정했다. 고등학교 단짝 친구들과 함께 협성고 전광춘 선생님을 찾아 뵙기로 했다. 친구 상욱, 수범과 함께 가면 좋을 게다. 2학년 때, 우리는 같은 반이었고 그 때의 담임이 전광춘 선생님이다. 수범이는 회사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고, 상욱이와 나는 시간을 맞추었고,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우리는 오늘 11시쯤 만날 것이다. 그 놈과 함께 13년, 14년 전의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갈테지. 학창시절, 우리는 늘 함께 했다. 함께 밤늦게까지 공부했고, 함께 간식을 사 먹었다. 주말이면 함께 학교 옆에 있던 스파(spa)에 가서 피로를 녹였다. 그런 추억과 더불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을 찾아볼 수 있다니. 아직 실감이 나지 않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협성고 방문보다 이른 시각에 나는 모교인 오성중학교에 먼저 들를 것이다. 배수경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담임 선생님도 아니셨는데 나를 이런 저런 모양으로 돌봐 주셨던 분이다. 선생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금, 갑자기 16년 전의 몇 가지 사건이 겹친 사진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참 고우신 분이셨다. 많은 남학생들이 선생님을 좋아했던 기억, 나의 고등학교 진학 결정을 앞두고 함께 걱정해 주셨던 기억, 학원 선생님이셨던 당신의 친구를 통해 학원에 다니도록 배려해 주셨던 기억 등이 떠오른다. 나에게 한 권의 시집을 선물해 주시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희석이가 인문계로 진학했으면 좋겠다”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하셨던 장면은 참 생생한 기억이다. 그 목소리는 16년 동안 나의 귓가에 머물러 있었다.
한 시간쯤 후면 배수경 선생님을 만날 것이다. 매년 스승의 날이면 선생님께 전화라도 드리려고 인터넷 이곳저곳을 뒤지곤 했다. 어디에서 본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782-XXXX라는 번호가 선생님 댁이었던 것 같아 한두 번 전화를 하기도 했다. 잘못된 번호였던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 인생에 은사님으로 남아 있는 배수경 선생님.
그 동안 어찌 지내셨을까? 나를 단번에 알아보실까? 인사드리며 내가 누군지 맞히실 때까지 웃고만 있어볼까?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계실테지. 아! 떨린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배수경 선생님을 만나는 것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십 수 년의 세월 동안 품어 온 감사함의 마음을 전할 생각을 하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휴... 한 숨을 내쉰다. 긴장 되나 보다. 에공.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저 가만히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떠나보내 드린 시기니, 그 슬픈 기억이 함께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울지도 모르는데.. ^^
배수경 선생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완전히 나아졌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 새 햇살이 가득하다. 안개가 몽땅 걷혀졌음은 물론이다. 햇살과 안개가 함께 하지 않듯, 감사한 마음, 보고 싶은 마음도 방금 전의 우중충한 기분과 함께 하지 않나 보다. 지금 나는 두근거림과 설렘, 약간의 긴장감과 떨림을 느끼고 있다. 2007년 초에 옷을 구입한 이후로 줄곧 티셔츠 한 장 구입한 적이 없었는데, 어젯밤에는 셔츠 하나와 넥타이를 샀다.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더 예쁜 모습으로 찾아가고픈 까닭이다. 구김이 전혀 없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1박 2일용으로 입고 온 쥐색 셔츠가 있었는데, 색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입한 것이다.
새로 산 넥타이와 셔츠가 예쁘게 보이실까? 아! 책이 출간되었더라면 선생님께 가장 의미 있는 선물이 될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든다. 허나, 최고의 선물은 16년 전의 제자가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가 인사를 드리며 손을 잡는 순간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그저 제자된 자의 소원일 것이다. 스승된 분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제자 모습도 참 예쁘게 보이시리라. 그렇다면, 누군가가 선생님을 찾아뵙기 위해 망설일 필요가 무어 있단 말인가! 그저 망설이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시간을 내어 찾아뵙기만 하면 될 테니까.
오늘 내가 그 걸음을 하는 날이다. 아! 이제 열차에서 내릴 시각이 되었다. 만날 시각이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지금의 내 마음처럼.
- 2008. 5月 15日 오전 8:30, 동대구행 무궁화호 안에서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비밀댓글 입니다
선생님들이라...
잘 만나지 못했습니다. 꼭 만나고픈 한 분을 뵙지 못했거든요. 그 분께 드릴 카네이션 꽃바구니는 결국 다른 분께 전해야만 했지요. 그 분께 썼던 편지는...
(엉엉 울다가 이어 씁니다. 책상 앞에 놓인 편지를 보니 눈물이 쏟아지네요.)
그 분께 썼던 편지는 지금 제 노트북 옆에 놓여 있습니다. 그 분께 예쁜 제자의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구입한 셔츠와 넥타이도 보여 드리지 못했고, 건강하게 자라는 씩씩한 모습도 보여 드리지 못했고, 그간 선생님을 많이 그리워했다는 마음 역시 전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참 쓸쓸히 학교를 나와야 했습니다. 여러 선생님을 만나긴 했지만 그것이 슬픔을 달래주지는 못했으니까요. 걸어나오며 계속 울었더랬지요. 슬펐거든요. 한스럽고 하늘이 원망스러웠거든요. 아직은 멍하니 지내며 슬픔을 달래고 있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글로 담아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 마음을 전하려구요.
그랬습니다. 이렇게 2008년 스승의 날은, 제 인생의 또 한 번의 슬픈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이네요.
따로 인사할 시간이 있을 거예요. 쉬는 시간도 있고, 끝나고 5분 정도는 얘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요. 오늘은 목사님이랑 식사를 하느라 길게 얘기하지 못함이 아쉽네요. ^^
저녁에 봐요. 오늘은 독서에 관한 특강이랍니다.
슬픈 스승의 날이었구나..
나도 네 글 읽고나서는 선생님께 문자를 넣었었다.
몇년째 찾아뵙지 못하고 넘어간것이 혼자 죄송스런 마음에 전화는 못하겠더라고...
"많이 바쁜거안다. 괜찮으니 그런맘쓰지마라. 이렇게 계속 연락이 되는것만 해도 나는 충분히 좋다"는 말씀에 울컥했다.
이달안에는 꼭 친구들과 자리를 만들어 찾아뵈야겠단 생각을 했다.
화창한 토요일이다. 잘보내라...
선생님의 말씀에 참 진한 울림이 있네. 선생님, 꼭 한 번 찾아 뵈시게. 그리고, 그 기쁜 소식 전해 주숑. ^^ 5일 후에 보자. 난 여행간다~ ^^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짜안..' 했답니다...
그러게요... 그러네요...
...
쌤~ ...
*^^*
'짜안' 하셨다길래, 저도 다시 한 번 글의 마지막 몇 문단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때의 행복한 감정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이내 서러움과 슬픔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참 행복했었는데, 결국 저는 그토록 뵙고 싶었던 배수경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아!
^^ 그래도 웃어야지요. 이미 많이 울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