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리버럴 아츠

세인트존스 대학의 공부 풍경

카잔 2016. 6. 28. 09:54


[도서소개] 조한별 지음,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바다출판사, 2016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세인트존스 대학의 커리큘럼을 저자의 공부 경험담과 함께 진솔하게 소개하는 책입니다. 당분간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 리버럴 아츠(교양교육을 위한 기초교과, Liberal Arts)를 주제로 한 도서와 공부법에 관한 포스팅을 이어가겠습니다. 이 글을 읽기 전, <하버드를 넘어선 교양수업>(클릭)을 먼저 읽으시면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좀 더 이해하실 겁니다.


1.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이하 『세인트존스』)은 한국인 졸업생(조한별 양)이 쓴 책이다. 세인트존스 대학은 교양교육(liberation education)의 이념대로 교육하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서 교양교육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와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유익이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다.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의 실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교양교육에 관한 여러 중요한 책들을 읽어 교양교육의 가치, 역사, 내용을 이해했음에도 다시 졸업생의 책을 손에 든 것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서의 교양교육은 어떻게 이뤄지고, 공부의 어려움은 무엇이고, 학생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이 책으로 갈증이 많이 해갈되었다. 제목과는 달리, 책은 고전 공부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교양교육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는 책이다.


2.

두 가지 오해부터 풀자. 책에 등장한 학교는 뉴욕에 위치한 세인트존스 대학교(St. John's University)가 아니다. 1696년에 세워져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통있는 세인트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으로 리버럴 아츠 칼리지다.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와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두 캠퍼스가 있다. 포모나 칼리지나 윌리엄스 칼리지만큼은 아니나, 한 사이트에 따르면 전체 리버럴 아츠 칼리지 중 50위권에 속한 명문이다.


또 하나, 세인트존스 대학이 4년 내내 고전 100권만 읽는 건 아니다. 이러한 오해는 대다수 블로거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 이를 테면, 한 독서전문가(링크 참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대학에서는 학과도 전공도 없다. 정해져 있는 커리큘럼은 4년간 주어진 독서 목록대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전부다. 학교에서 정해놓은 독서목록은 주로 인문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과는 다르다. 조한별은 이렇게 소개한다.

"세인트존스가 고전 100권을 읽는 학교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4년 내내 고전 100권만 읽는 학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중략) 세인트존스는 고전 100권만 읽는 학교는 아니다."(p.131) 


세인트존스 학생들이 4년에 걸쳐 고전 100권을 읽기는 한다. 이 고전 토론수업을 '세미나'라고 부른다. 세미나는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2~3시간 진행된다. "세미나 시간에 읽어가야 할 책의 분량은 매번 다르지만 보통 80쪽 안팎이다."(p.83) 주로 인문고전인 것은 맞지만, 과학과 사회과학 고전도 다수다. 게다가 세미나가 아닌 일반수업(튜토리얼)의 절반이 수학, 과학실험 수업임을 감안하면 '주로 인문고전'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낳기 쉽다. 이 대목에서 내가 민감해지는데, 많은 사람들이 "리버럴 아츠 = 인문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리버럴 아츠 = 인문학 + 자연과학이다.   


다시 저자의 이야기, "세미나는 고전 100권을 읽는다는 특성상 광범위한 내용을 배우기 때문에 넓은 시야와 속도감 있는 공부 습관을 키울 수 있게 하지만 체계적이고 신중한 공부나 정밀한 토론을 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배움의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수학, 과학 실험(lab), 언어 그리고 음악 튜토리얼이다. 세미나가 월, 목 저녁에만 있는 수업이라면 튜토리얼은 일반 대학 수업처럼 월, 화, 수, 목, 금 오전과 오후에 분배되어 있다."


'고전 100권 읽기'만이 커리큘럼의 핵심이 아니다. 세인트존스의 커리큘럼은 훨씬 다양하고 체계적이다. 책에서도 세미나 소개는 일부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독서전문가는 자신의 '공부'보다는 타인에게로의 '전달'에 치우쳐 도서 추천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편향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포스팅한 인문학 추천도서(링크 참고)는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고 추천이유도 없어, 본인께서 읽으신 책들에서 편협하게 선택된 목록으로 보였다.)


3. 책의 목차

1부는 세인트존스 대학의 개요를 소개한다. 2부는 저자의 공부 태도를 서술한다. 3부에서 6부가 세인트존스 대학의 커리큘럼 소개다. (내가 궁금했던 내용이다.) 7부는 '저자가 세인트존스에서 배운 것'들을 담았다. 3~6부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세인트존스는 어떻게 공부하는가 / 핵심 교양을 배우는 학교 / 영어로 하는 세인트존스의 독서, 토론, 작문 / 방과 후의 세인트 존스.


4. 세인트존스는 어떻게 공부하는가.

월, 목요일 저녁에는 그들이 '세미나'라 부르는 고전 토론을 한다.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읽는 과정이 이 세미나다. 세미나의 방점은 '독서'라기보다는 '토론'으로 느껴질 정도다. 방대하고 어려운 책들을 모조리 읽지도 않고, 어설픈 이해지만 토론을 통해 심화시켜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학생들이 세미나를 위해 책을 열심히 읽는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분량을 읽다보니 한계도 있다. "몇 년을 (심지어 평생을 : 저자 강조) 읽고 또 읽으며 연구해도 좋을 위대한 책들을 세인트존스에서는 빠르게 읽고, 고작 두 시간 토론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조금이라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스터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프리셉토리얼이다."(p.85) 토론마저 없이 읽기만 했다면, 저자의 아쉬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프리셉토리얼의 사전적 의미는 대학의 '개인 지도 과목'이란 뜻이다. 세인트존스에서는 소규모 세미나 정도의 뜻으로 쓰인다. 작은 규모의 그룹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중략) 세인트존스 커리큘럼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p.104)


언어, 음악, 수학, 과학을 배우는 튜토리얼(저자는 4부 50페이지를 할애하여 튜토리얼을 설명했다), 고전 100권을 읽는 세미나, 자신의 관심사에 깊이 빠져드는 토론수업 프리셉토리얼, 금요일의 강의 콘서트, 논문, 졸업의 최종 관문 공개 구술시험이 세인트존스의 커리큘럼이다. 세인트존스만의 학습 문화도 있다. '돈 래그(don rag : 교수가 꾸짖다라는 의미)'라 불리는 학생 평가 제도가 대표적이다.


"돈 래그는 말 그대로 교수가 학생을 꾸짖을 수 있도록 학교에서 마련해 준 공식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한 학기 동안 학생이 들엇던 수업(4~5개)을 담당한 튜터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학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돈 래그인 것이다. 학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돈 래그 주가 시작된다. 학생들은 이 일주일을 죽음의 주라고 부른다. 이때는 월, 목 세미나를 제외한 모든 수업이 취소된다."


돈 래그는 적당히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자리가 아니다. 학생을 향해 질타하는 것도 아니다. 튜터들끼리 한 학생에 대해 자기들끼리 이야기한다. "이 학생은 내 수업에서 맨날 아는 척을 해요." "그래요? 그 학생, 내 수업에선 늘 졸기만 하던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인공 학생이 있는 자리에서 진행된다. 내가 보기엔, 돈 래그는 투명인간이 되어 자신에 대한 적나라한 뒷담화를 듣는 특별한 경험이다. 튜터들의 진솔함이 돋보이고, 학생들의 화끈해진 얼굴이 연상되는 문화다. (피터 센게는 학습을 위해 서로의 진솔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는데, 그것이 문화로 정착된 제도가 돈 래그였다.)


5.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

1) 책날개는 지은이를 이렇게 소개했다.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관 덕분에 초등학생 때 한 번, 중학생 때 한 번 학교를 휴학하고 가족들과 세계여행을 다녔다.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가훈 아래, 어릴 적부터 키워온 영화인의 꿈을 이루고자 고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던 중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세인트존스라는 신기한 학교를 발견...." 부러웠다. 남다른 부모를 만난 저자가 부러웠고,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서 공부한 경험과 이력이 부러웠다.


2) 직업교육과 대비되는 교양교육! 나는 직업교육은 제대로 받은 적이 없지만, 교양교육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질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서, 그러한 생각은 그야말로 '나름의' 수준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사철 소양은 부단히 쌓아왔고, 여러 학문의 지성사와 얼마간의 과학철학적 지식은 그런 대로 봐 줄 만하지만, 과학 실험을 해 본 일은 전무하고 언어 소양은 바닥 수준이다. 1~2학년에는 헬라어를, 3~4학년에는 불어를 배우는 세인트존스의 언어 튜토리얼이 나를 부러움과 자격지심으로 빠뜨렸다. 올해 겨울부터는 영어 독해 공부를 해야겠다.


3) 오래전부터 품어온 소원이 하나 있다. 와우스토리 과정은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1기와 2기 때에는 자기 이해와 지성 훈련을 함께 추구했다. 3기 때부터는 지성 훈련을 제외하여 자기 이해에만 초점을 맞췄다. 4기 때부터 지금의 커리큘럼으로 완성됐다. 몇년 전부터 지성 훈련을 추구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했었다. 고전을 읽고, 모여서 토론하고, 예술을 향유하면서 함께 공부하는 지적 커뮤니티 말이다. 용기와 실행력 부족으로 몇해째 연기되어 왔다. 이 책을 읽으며 이 꿈을 실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지적 공동체(School of Liberal Arts)를 향한 열망이 일상의 표면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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