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영화 <본투비블루> 감상기)


1.

<본투비블루>는 위대한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를 담은 영화다.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다. 베이커는 쿨 재즈의 거장 마일즈 데이비스와 동시대 인물이고, 웨스트코스트 재즈를 대표하는 트럼페터다. 나에게 쳇 베이커는 이타적이고 명랑한 이미지의 디지 길레스피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우울하고, 방탕하다. 젊은 시절의 그를 두고 잘 생겼다고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눈엔 미남이기보다는 시원한 성격의 호남형으로 보였다. 누구나 멋지게 찍힌 사진 몇 장은 있기 마련인데, 아래는 내가 본 가장 멋진 사진이다. 




2.

비밥, 모던, 쿨 재즈 시기까지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쳇 베이커를 비켜갈 순 없었다. 관악기만을 따진 나의 취향도 순위를 따지자면, 존 콜트레인, 폴 데스먼드, 스탄 겟츠, 리 모건, 쳇 베이커, 마일즈 데이비스, 디지 길레스피 정도의 순서가 되겠다. 데스먼드와 베이커가 협연한 앨범의 곡들은 수없이 들었다. 말하자면 <본투비블루>는 주인공이 쳇 베이커라는 이유만으로도 관람해야 하는 영화였다.


인간적 매력까지 느끼지 않는 한 뮤지션들의 평전이나 자서전을 읽지는 않는다. 쳇 베이커에 관한 굵직한 평전을 군침만 삼킨 까닭이다. 영화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영화는 음악을 담아내기에. 영상미마저 함께라면 금상첨화다. 음악영화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3.

영화의 배경은 1966년이다. 쳇 베이커가 앞니가 부러진 해다. 절망스러운 상황이고 충분히 낙담할 만도 한데, 쳇 베이커는 의치를 끼워 트럼펫을 문다. 생각할수록 경이롭다. 쳇은 약에 기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약할 때도 많다. 게다가 이기적이고 분을 삭이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런데도 트럼펫을 물 때는 다른 사람이 된다. "악마가 연주는 천사의 선율"이라는 표현처럼, 그의 삶은 한심하나 노래에는 감동한다. 진부한 조합인데도, 그의 음악에 대한 헌신 때문에 영화를 보고나면 그의 거듭된 자기 패배에 '짜증'이 아닌 '연민'을 보내게 된다. 미운데 싫지가 않다. 나도 모르게 한 숨을 내뱉았다. 그가 안타까워서. 그런데 그러한 삶을 인정하긴 싫어서.





4.
영화는 줄곧 쳇 베이커의 음악 열정을 보여준다. 감독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쳇의 음악을 향한 열정, 의지, 인내가 매우 또렷이 드러났다. 다음의 장면들을 보라.

- 앞니를 잃은 후, 욕조에 앉아 트럼펫을 입에 물고 바람 소리를 내며 트럼펫을 부는 장면. 아마도 이때가 첫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쳇은 핏덩이를 내뱉으면서 트럼펫을 분다. 절망적이면서도 눈물겨운 장면이다.

- 쳇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잘 견딘다고 말하자, 쳇의 답변은 이랬다. "인내심 하면 저죠."

- 쳇의 음악 인생은 끝났다고 믿었던 주변인들이 모두 쳇의 피나는 노력에 혀를 내두른다. 음악 프로듀서 딕의 말. "저렇게 애쓰는 모습을 처음 본다." 쳇의 마약 중독을 관리하는 경관이 말하는 장면도 쳇의 의지를 잘 보여주었다. "약을 하는 뮤지션을 20년째 지켜보고 있는데, 쳇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 쳇이 트럼펫을 연주하는 수많은 샷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제인(약혼녀)의 차에 걸터 앉아 또는 지붕에 올라가서 트럼펫을 부는 모습이리라.

-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따로 있다. 쳇은 부모님 댁에 제인과 함께 며칠을 머문다. 황량한 시골을 배경으로 쳇과 제인이 투 샷으로 잡혔다. "외로웠겠어요." 제인의 공감 어린 말에 쳇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트럼펫이 있었으니까."






5.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에는 음악 열정이 눈에 들어왔는데, 두번째에는 쳇 베이커의 치기 어린 모습이 눈에 꽂혔다. 체티라는 애칭이 주는 뉘앙스만큼이나 일상인으로서의 쳇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다.

- 첫 장면. 쳇은 마약을 하고서 일레인(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로 말한다. "이렇게 있으면 엄마의 자궁 안에 있는 느낌이야." (왠지 뜬금없이 유아적인 답변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은 기우가 아니었다.)

- 자신을 기다리는 이에게 "2초만 줘요"라는 말을 남발하면서 시간을 끄는 장면이나 시도 때도 없이 "섹스(Fuck)"라는 비속어를 내뱉는 모습도 어딘가 신뢰 있는 어른의 모습은 아니었다.

- 제인(약혼녀)이 자신의 뉴욕 공연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팔꿈치로 장식장 유리를 깨뜨리는 모습도 그의 신경질적이고 무딘 감수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치기 어린 모습의 백미는 제인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였다. 제인의 아버지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나는 수영이나 하러 갈래"라는 말을 남기고 예비 장인, 장모가 될지도 모르는 이에게 인사도 없이 이별을 고한다.

쳇의 사진들이 모두 이렇게 명랑하고 선한 이미지는 아니다. 반대가 많다.

6.
무명 영화배우로 나오는 제인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 영화의 매력이다. 실존하지 않았지만, 실존했을 법한 인물을 등장시켜 사실만큼이나 사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영화든, 소설이든 스토리의 위대함이다. 결국 가상이지만 진짜 같은 가상으로 실제에 대한 사색을 끌어내는 것. 

제인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행여 당신이 '왜 제인이 떠났을까요? 저는 이해가 안 돼요" 라고 말하는 남자라면, 영화를 다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다.) 남자에게는 자신의 삶(공연)만이 중요했다. 여자에게 중요한 삶(오디션)을 인정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집어치우고 나를 따라 뉴욕 공연을 따라가자."
"집어치우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공연 망치면 안 되잖아요."
"왜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해?"

대화는 다툼으로 끝났다. 쳇은 팔꿈치로 장식장의 유리문을 박살내고 만다. 이기적이고 신경질적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결국 쳇은 혼자서 뉴욕으로 향한다.

7.
(반전 영화가 아니라 중요치는 않겠지만, 7번과 8번 내용에는 스포일러 포함)
일생일대의 재기 기회가 될 공연을 앞둔 쳇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결국 끊었던 약을 다시 시작하고 만다. 디지 길레스피와 마일즈 데이비스 등의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석했다는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약이 자신감을 줘요." 마지막 대목에서 공연 프로듀서 딕과 약을 두고 실갱이를 하다가 쳇이 던진 말이다. 쳇은 인위적인 자신감의 힘을 얻어 무대에 섰다. 감미로운 트럼펫 연주가 시작되었다.

오디션 일정이 연기 된 제인이 공연 시각에 맞춰 도착했다. 제인은 쳇의 연주 모습을 보고서, 그가 다시 약을 시작했음을 간파했다. 제인의 표정 클로즈업! 그녀는 잠시 갈등했다. 약혼의 증표인 목걸이를 옆에 섰던 프로듀서 딕에게 건네고 떠났다. 쳇은 마지막 곡이 소개했다. "본투비블루"라고 말하는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나는 영화와 음악에 취해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8.
쳇의 마지막 공연에 마일즈와 디지는 천천히 하지만 인정과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이미 제인이 자리를 떠난 뒤였다. 쳇의 일생을 마약, 여자, 음악이라는 세 키워드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면, 영화 <본투비블루>는 매우 훌륭하게 쳇 베이커를 제대로 묘사했다. 어떻게? 쳇은 마약에 빠져 여자의 온전한 사랑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음악을 향한 헌신과 열정으로 위대함을 연주했다고.



9.
루스 영은 이렇게 생각했다.“스탄 게츠와 제리 멀리건은 쳇 베이커 같은 가슴을 지니지 못했어요. 겉보기는 훨씬 세련됐지만 말이에요.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아주 똑똑한 남자들이었죠. 하지만 왠지 어느 한 곳이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은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연주 속에는 뭔가 순종적인 구석이 없었죠. 자, 봐라. 내가 연주하고 있다. 이게 내 삶이다, 어떤가. 뭐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결국 그들은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것을 끄집어내지 못했죠.” - 제임스 개빈 『쳇 베이커』 p.571

나는 음악을 몰라 영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하나, 헌신과 방탕이 버무려진 쳇 베이커의 삶을 들어다보았으니, 그의 <Almost Blue>를 조금은 더 깊이 음미하게 될 것 같다.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