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리버럴 아츠

대학은 무엇을 배신했을까

카잔 2016. 7. 3. 23:29

[도서소개] 마이클 로스 지음, 『대학의 배신』, 지식프라임, 2016

"산업의 톱니바퀴가 되겠다는 대학에게 기업의 갑질은 오만하다.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요즘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 놓으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보고서 작성도 모른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대학은 지금껏 '보고서 작성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하지만 대학이 우스워지니 기업은 '왜 이런 것을 준비하지 않느냐'며 요구 수위를 자꾸 높여 가고 있다." - 오찬호


1. 제목에 대한 설명


원제는 『Beyond the University』다.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연구 중심의 종합 대학을 뜻한다. 직역하자면 ’대학을 넘어서‘가 되겠다. 여기서 유니버시티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college)의 상대적 개념이다. 함의를 포함하여 의역하면 ‘연구 중심과 전문성에 치우친 종합 대학을 넘어서’ 정도가 되겠다. 부제는 책의 주제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Why Liberal Education Matters(왜 교양교육이 중요한가)'


유니버시티와 칼리지의 미국 용법은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에겐 4년제 종합대학과 2년제(또는 3년제) 전문대학의 느낌이지만, 이 책에서 쓰인 칼리지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지칭한다. 여러 분야의 교양을 폭넓게 공부하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하버드와 예일에 버금가는 대학 순위를 자랑한다. 책의 저자인 마이클 롯(Michael Roth)은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웨슬리언대학의 16대 총장이다.


2. 몇 가지 문제 제기


아직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리버럴 아츠 개념이 생소한가 보다. 리버럴 아츠 = 인문학, 으로 소비되고 있다. 일반 독자들은 이해되지만, 출판계는 자성해야 할 것 같다. 『대학의 배신』 부제가 ‘인문학은 N포 세대를 구원할 수 있는가’다. 리버럴 아츠를 옹호하는 책에 어울리지 않은 선택이다. 리버럴 아츠 또는 교양교육이라는 개념은 인문학에 한정되지 않고 자연과학까지 아우르는 개념임을 감안하면, 작게 보이는 이 오류가 실제로는 큰 오해이자 무지다.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리버럴 아츠는 오랫동안 인문학으로 소비되어 왔다. (다른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일례로, 애플은 인문학과 테크놀리지 사이에 있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그렇다. 원어는 인문학(humanities)이 아니라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였다.


책에는 ‘옮긴이의 말’이 없다. 아쉽다. 적어도 인문교양서만이라도 역자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책의 중요 개념 번역에 대한 변이 있어야 한다.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개념이라면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정통 교양교육을 다룬 책인 만큼 아쉽다. (역자의 이력을 보니, 번역된 책이 다양하다. 내용보다는 번역에 전문성을 가졌나 보다.) 나는 월터 카우프만의 번역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는 자기 번역의 특징과 다소 놓칠 수밖에 없었던 원작의 특성들 그리고 작가의 스타일과 그로 인해 야기된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독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인문학의 미래』, p.196) 모든 분야의 번역자에게까진 아니더라도, 언어의 문제가 너무나도 중요한 ‘문학과 인문교양’의 번역서에는 십분 적용해야 말이라고 생각한다.


3. 무엇에 관한 책인가


이 책은 교양교육을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미국 교육사상가들의 교육론이 정리되어 있다. 교양교육 찬성론자와 반대론자의 주장을 모두 보여 주어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유익이 있는 반면, 교양교육의 개념, 가치, 필요성, 한계 등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나 리버럴 아츠 소개는 없다. 대학교육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느낌이다. 부제(교양교육은 왜 중요한가 Why Liberal Education Matters)에 헷갈리지 말자.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싶다면 파리드 자카리아의 『하버드 학생들은 더 이상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한 권으로도 충분하다.


4. 책의 핵심 주장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대학이란 특정 전문 기술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일하는 세계 안에서 개인적, 사회적 삶을 탐색할 기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한국어판 서문) “대학을 실용적으로 개혁하겠다는 도구주의로의 흐름”(p.7)이 가속화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쓴 책이다. 교육에 관한 저자의 신념은 다음과 같다. “배우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형태의 자유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교육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회 안에서 자유를 함양하는 것이다.”(p.9) 저자는 교양교육이 이러한 이뤄준다고 믿고 있다.


5. 구성

 
목차는 간단하다. 4개의 장과 에필로그와 프롤로그 그리고 서문이 전부다. 오찬호 교수의 해제가 눈에 띈다.


1장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2장 교육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3장 배움의 주체와 소비자 사이에서
4장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육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하나, 책의 목차는 표현하는 바가 모호하고 구성이 산만하다. 각 챕터들이 저자의 핵심메시지를 향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책의 핵심을 향하는 내용도 지나치게 둘러간다. (내 표현으로는, 멍석깔기가 길다.) 각 챕터 안에서도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상이 깊은 저자가 친절하지 않은 데서 혼란함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명료하게 드러낼 줄 모르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아닌가 싶다.


6. 미국의 교육사상가들을 소개하는 책?


책의 전체 분량에서 절반 이상을 미국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교육개혁가나 사상가들을 소개하는데 할애했다. 1장과 2장(그리고 3장의 상당 부분)에 걸쳐 진행된 이러한 논의는 집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중하게 기획된 내용이긴 하나, 저자의 성향에 의해 무분별하게 길어진 건 아닌가 생각했다. '왜 교양교육이 중요한가‘라는 책의 부제에서 자주 멀어졌고, 멀어진 내용들을 매끈하게 꿰어주는 끈도 제공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강의실에서든 온라인에서든 나는 강단에 서면 상당한 시간을 인용에 할애한다. 학생들이 책 안에서 언어와 구조, 다층적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는 즐거움을 발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p224) 저자가 에필로그에 밝힌 말이다. 책의 구성에 대한 변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독자가 느긋하게 1~3장까지를 꼼꼼히 읽으며 교양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한 셈이다. (어쩌면 내게 지루햇던 것은 이미 아는 내용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부제에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는 내용은 4장이다. 앞선 내용이 저자의 지적 호기심에 치우친 느낌이라면, 4장은 책의 제목과 서문을 읽고 집어든 나 같은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장황하거나 반복적으로 느껴졌던 내용 전개도, 4장에서는 간결하고 속도감이 넘친다. 교양교육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자세히 정리할 필요가 충분한 장이다. 


7. 4부의 주요 내용


“1800년대에는 라틴, 그리스 고전을 암송하는 전통적인 교양교육을 지키려는 이들과 사회 문제를 해결할 과학적인 연구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20세기 들어 연구 중심 대학이 급성장하면서 고등교육의 발전을 주도했고, 그 여파로 일류 대학들이 학부생 교육에 소홀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p.183) 대학을 실용적으로 변모시키려는 흐름은 21세기 우리나라 대학의 현실이기도 하다. 학부의 전공수업에 비해 교양과정이 내실있게 진행되지 못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일단의 사람들은 논쟁을 엉뚱하게 봉합하려고 시도했다. 교양교육과 직업교육의 이원화를 주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06년 매사추세츠 주 산업 기술 교육위원회는 고등학교 교육을 두 가지로 분리하는 이원 교육안을 내놓았다. 일부 학생들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직업교육을, 다른 학생들은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폭넓은 교육을 받는 제도였다.”(p.185)


물론 이것은 근시안이고 일차원적인 접근이었다.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 20세기 미국 철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인 존 듀이는 이런 방식이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이원 교육제도에 반대했다. 듀이가 절대적으로 옳다. 듀이는 서로 다른 두 교육이 모두 중요하다는 점을 간파한 교육사상가다. 듀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의 모든 이가 무언가 일을 하고 직업을 갖는 세상이다. 어떤 이는 관리자가, 어떤 이는 부하 직원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일에서 크고 인간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저자인 마이클 롯 총장은 이렇게 듀이가 가진 균형 감각 가득한 교육관을 소개하고서, 의심과 탐구를 필두로 하는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동시에 비판적 사고의 위험도 지적한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비판적 사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자아를 확장해 주지도 못하고, 공감도 이해 능력도 결여된 비판적 사고는 결국 아무 것도 낳지 못한다.”(p.208) "비판적 폭로가 곧 지성의 증거가 되는 인문학 문화 속에서 학생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만 뛰어난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p.206) "교양교육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다루지 않았다면 거부하거나 무시했을 법한 분야에서도 기꺼이 뭔가를 배우는 마음가짐과 능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p.208)


다른 문화권의 관점과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로티가 ‘방관하는’ 이론적 좌파라고 비판한 태도, 다시 말해 폭로에는 앞장서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거나 문화가 변화하는 방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편협한 자세를 버릴 수 있다."(p.210)


저자는 세상을 바꾸어가는 가치를 창조하는 공부를 ‘실용적 탐구’라 불렀다. 교육자는 비판적 사고와 실용적 탐구 사이의 균형을 통해 ”혼자 힘으로는 보거나 듣지 못했을 디테일과 패턴과 관계를 보여주는 사람“(루이스 밍크)이다. 이상이 4장에서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이다.


8. 대학의 배신?


대학은 무엇을 배신했을까? 한국어판 제목에 대한 의문이다. 나는 본문보다는 해제를 쓴 오찬호의 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기업화된 대학을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를 쓴 사회학 박사다. "자본주의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대학의 공기가 대학생의 일상을 얼마나 괴기스럽게 만드는지"(p.227)에 관한 책이다. 해제에서도 대학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서술한다. 배신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다. 대학에 진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 교육을 통해 무언가 얻기를 믿고 기대한다. 학생은 무엇을 믿었고, 대학은 무엇을 저버렸을까. 오찬호의 글과 함께 생각해 보시길.


"왜 민주주의는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찬밥 신세가 되었을까? 과거와 현재의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대학의 변화'다. 과거의 대학이 정의롭고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취업사관학교'는 아니었다."


"산업의 톱니바퀴가 되겠다는 대학에게 기업의 갑질은 오만하다.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요즘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 놓으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보고서 작성도 모른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대학은 지금껏 '보고서 작성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하지만 대학이 우스워지니 기업은 '왜 이런 것을 준비하지 않느냐'며 요구 수위를 자꾸 높여 가고 있다."


9. 배우고 느낀 것들


1) 교양교육과 직업교육의 필요성을 모두 파악하여 두 교육의 조화를 주장한 사상가들을 만나서 반가웠다. 윌리엄 듀보이스와 존 듀이가 대표적이다. 교양교육을 공부하면서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을 여러 번 만나는데, 개관적 독서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존 듀이, 마사 누스바움은 교양교육의 옹호자들이다.


2) 비판적 사고의 한계를 저자의 언어로 확인한 것도 수확이다. 비판적 사고는 공감력이 곁들어져야 한다. 공감 없는 비판은 자신의 편협함에 빠져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지 못한다. (훌륭한 학자들이 설명하는 '비판적 사고'는 저자가 말한 공감력까지 포함한 개념인 경우도 많다.) '비판적 사고'는 '실용적 탐구'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다. 이론적인 영역을 벗어나 삶의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실용적 탐구'는 동양의 영성가들과 서양의 (자기)경영사상가들로부터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인도의 영성 구루들과 피터 드러커, 찰스 핸디, 스티븐 코비, 말콤 글래드웰, 다니엘 핑크, 구본형 등등.


3) 교육은 나의 중요한 관심사임을 새삼 느꼈다. 교양교육에 대한 지적 체계 정립이 끝나면, 고등교육에 관한 책들을 읽고 싶다. 우선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Not for profit』부터 살펴봐야겠다. 감정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겼다. 그런 점에서 현대철학의 주요한 철학자로 자리매김한 사상가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그녀는 고등교육, 교양교육, 인간의 성장에 대한 책들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