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따뜻한 영화는 묻는다. "지금 당신은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감독은 희망과 위로와 함께 건넸지만, 이 질문은 내게 송곳이었다. 꽁꽁 묶어놓은 감정의 보따리를 찔러버린 송곳! 작은 구멍은 점점 커져 결국 꾹꾹 눌러놓은 감정들이 쏟아져나왔다. 후회, 아쉬움, 자괴감... 그리고 눈물.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료타'는 과거에 문학상을 수상한 현직 사설탐정이다. (아쿠타가와 같은 저명한 문학상은 아니지만, 제법 팔린 소설이다.) 철들지 못한 캐릭터로 책임감이 빈약하고 자기경영에 서툴다. "결혼 생활에는 어울리지 않는" 료타는 이혼남이다. 아들을 좋아하지만, 매월 양육비를 미뤄 아내의 핀잔을 듣는다. 돈이 없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어머니의 다락방을 뒤진다. 태풍이 몰아친 날, 료타와 아들 그리고 이혼한 아내는 료타의 어머니집에 하룻밤을 묵게 된다. 태풍은 지나가고 료타는 아들과의 다음 달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2.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 주인공 료타가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쓴 메모다. 그에게 의뢰한 한 여인이 내뱉은 말이다. 그녀는 내연남과 사귀는 중이고 그녀의 남편에게도 내연녀가 있다. 그녀가 불쑥, 덤덤하게, 던진 이 말을 료타는 주워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포스트잍에 옮겨 적었다. 언젠가 소설의 대화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이 말이 나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내게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묵직한 메시지다.


삶을 살다가, 이런 씁쓸한 독백을 내뱉지 않은 어른들이 있을까. 소수라도 있겠지. 나는 그 행복한 소수에 들지 못했다. 서른 후반부가 되면서, 저 말이 내 입술 밖으로 세어나오진 않았지만, 여러 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할머니(료타의 어머니 역, 키키 키린)의 대사에 열광하는 동안, 내 영혼은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에 젖어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부침이 존재할 터! 나의 경우에는 2013년 이후 특히 2014년 하반기부터 줄곧 내리막길의 삶이다. 마음의 부담감은 크고, 출간은 멀어졌고, 삶의 순간마다 누리던 풍요로운 기쁨은 사라졌다. 어디에서부터 꼬였을까, 라는 질문이 내게 절절하게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지금 잘 나가는 인생을 구가하는 이들과 자기 삶의 파동을 섬세하게 관찰하길 싫어하는 이들에겐 울림이 적을지도.)


3.

"지금 당신은 당신이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영화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어른들을 위로한다. 꿈꾸던 대로의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자주 정의되는 행복의 모습이다. 그 일반적인 행복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료타 어머니의 입을 통해. 일흔 줄에 접어든 그녀의 묵직한 세 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날마다 즐겁게!“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왜 남자들은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지."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 "꿈꾸던 미래란 게 어떤 거였더라. 안녕, 어제의 나여!"


4. 

료타는 철부지다. 책임감 없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다. 몸은 어른이나, 정신 세계가 유아적이다. 성실하게 돈을 모으기보다는 경매와 복권으로 한건 올리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아들 싱고의 물음 "아빠는 되고 싶은 어른이 되었어?"라는 질문에 던진 료타의 답변이, 참 좋은 말인데, 그의 입에서 나오니 듣기 싫었다. "되었느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되고 싶은 꿈을 계속 품고 사느냐야." 나는 이 대목에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명제에 누가 되는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 료타를 어루만진다면, 싱고의 엄마 쿄코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밉지 않게 보여준다. 그녀가 밉지 않음은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한때 노력했기 때문이고, 료타의 일상을 보면 그녀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사랑만으로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함께 가족이었을 때 잘 하지." "당신은 왜 맨날 약속 시간에 늦어?" "다음 달에는 15만엔치를 줘야 해. 3개월치 양육비." 쿄코가 던지는 말은 곧 료타의 지질함이다.


5.

주인공은 지질한 아빠 '료타'다. 영화의 일차 관객은 료타처럼 삶의 한 영역이 꼬여버린 성인이리라. 영화는 그런 이들을 싱고의 할머니를 통해 위로한다. 동시에 엄마의 말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어떤 이들에게 현실 직시는 따끔한 정신적 고통을 동반한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현실 인식을 위로로 포장하여 전한다. 분명 좋은 어른이 되어 잘 살기가 어려움을 인식했는데,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참 좋은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내 인생의 10대 영화 정도에 포함될 것 같다.


영화의 원제는 "바다보다도 더 깊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대사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어"에서 따왔단다. 원제보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제목이 마음에 든다. 태풍이 오는 날 저녁과 밤에 료타네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는 태풍이 지나가 다음 날 아침에 끝난다. 몇 년 동안 내 인생에도 태풍이 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았다, 고 2016년 가을을 회상하고 싶다.


"아침 늦게까지 푹 잤다. 새로운 날이 축제일처럼 밝아왔다." - 『데미안』 중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