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내가 꿈꾸는 죽음

카잔 2016. 11. 18. 14:44


60세까지는 살고 싶다. (물론 더 오래 살면 좋지만, 일차적 바람이 60세까지는 사는 것이다. 희망 최고령은 87세다. 삶의 후반부를 함께 살아온 여인과 함께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과 87이라는 숫자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이렇게 괄호 안에다 묶어둔다.)


화장을 하여 가루가 된 유골은 병산서원 앞 낙동강에 뿌려졌으면 좋겠다. 그 날, 낙동강변에는 비발디의 곡을 재해석한 막스 리히터의 <봄>이 흘렀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이들이 열 명은 되었으면 좋겠다. 죽은 후 영혼의 눈으로 강을 따라 안동, 김천, 대구를 둘러보고 싶다. 바다에 이르면 영혼의 눈도 감았으면 좋겠다.


단 하루도 아프지 않고 죽으면 좋으련만, 그런 축복이 나를 찾아줄지는 미지수다. 외할머니는 딸의 묘에 갈 때마다 이리 말씀하신다. "내가 너무 오래 사네. 영화야, 나는 자는 잠에 데려가래이." 할머니도 나도 낮잠을 자다가 스르륵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잠드는 그 순간에 마음에 걸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이야 남겨둘 순 있겠지만, 돈빚 없이 말빚 없이 홀연히 떠나고 싶다. 살면서 저지른 부끄러운 일이야 넘쳐나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원한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에게 용서받고 떠나는 죽음을 꿈꾼다. 


강물과 함께 떠났으니 나의 묘비는 없으리라. 다만 누군가가 남길 말을 부탁할지도 모르니 마음 속의 묘비명을 지어두긴 해야겠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내게 적격일 텐데, 묘비명만큼은 나답게 짓고 싶다. 세 개의 후보 중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20년 후에나 결정할 수 있을지도.)


"나는 필연의 터 위에서 자유의 집을 지었다."

"삶은 황홀이었다(또는 좋았다). 죽음은 어떨까?"

"생이여 고맙다. 나를 찾아와 주어서! 죽음이여, 너는 왜 벌써 왔니?"



*


죽음에 대한 사유야말로 덧없다. (죽음 이후의 날들은 내 알 바가 아니고, 죽음 이전에는 누구나 삶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죽음 사유를 글로 남긴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는 의미 있지 아닐까? 하나는 갑작스레 삶이 끝났을 때 유가족에게 고인의 뜻이 전해지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죽음 사유를 통해 살아갈 이유와 열정을 발견하는 경우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 사유가 항상 존재의 의미와 생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리라. 줄곧 죽음을 시에 등장시킨 최OO 시인은 삶의 허무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내가 꿈꾸는 죽음' 따위의 글을 왜 썼냐고 궁금해하지 마시라는 뜻이다. 어쩌다 생각해 보게 됐고, 마음에 끌려서 글자로 옮겼을 뿐이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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