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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국의 반지성주의

카잔 2017. 5. 5. 10:33

<읽고 싶은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호프스태터/ 유강은 역, 교유서가, 2017)

  


1.

반지성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정치권, 리더십, 일상사 곳곳에 반지성주의가 있다. 조금만 깊어지면 “아, 어려워” 하고 사유를 기피하는 태도 역시 반지성주의의 모습 중 하나다. 일상에서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머리 쓰기를 싫어함, 편안함이나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모습 등이 반지성주의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다 건너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멀게 느껴지더라도 일상에서의 반지성주의는 고민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2.

누구나 지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두가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결국에는 지성의 힘과 한계를 모두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겠다. 지성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3.

지성을 어떻게 구분할까. 사실 지성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구분이 쉽지 않다.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들에겐 어떤 선택이 더 공동체를 위한 길인지를 헷갈리는 법이다. 패션의식(감각)이 없는 이들이 더 나은 패션이 무엇인지 혼동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주 지성적 사유보다 독단적이고 편협한 반지성적 주장에 열광한다.

 

지성 구분의 원칙을 수립하긴 어려워도 지성을 구분하는 세 가지 팁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1) 인과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처사는 지성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단선적이지 않다.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지성은 인과관계의 실타래를 풀어가지만, 반지성은 아예 복잡하다는 이유로 실을 잘라버린다. 어떠한 명쾌함은 지성이 아니라 무사유다. (이 점에서 지성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앞서 지성에 대한 의식을 운운한 이유다.)

 

2) 난해함이 모두 지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때때로 단순함이다. 최근에는 심상정 후보가 지성이 펼쳐내는 희열, 다시 말해 단순함이 주는 통쾌함을 보여주었다.

 

3) 지성은 종종 깊이와 복합적 사유로 나타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에서 ‘주의 깊은 독해’를 옹호하고, 인문학적 사유는 종종 긴 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긴 글은 두 가지로 나눠지겠다. 지성이거나 장황함이거나.

 

4.

어떤 이는 박식을, 다른 이는 통찰을, 또 다른 이는 지혜를 지성이라 한다. 박식을 지성이라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사유 없는 정보 폭식은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성주의를 넓게, 다소 이상적으로 정의한다면) 호기심과 이성의 한계를 이해하여 호기심의 전횡과 이성의 독단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을 지성에 포함해야 한다.

 

5.

(저자의 견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지성은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힘이다. 통찰에 가깝고 지혜까지는 아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온갖 미덕이 총동원되어 발현되는 종합적 판단이니까. 나는 지혜를 지성, 감성, 의지의 결합으로 본다. 그래서 지혜는 가끔씩 출몰할 뿐이고, 간헐적인 출몰이지만 영향력이 짙고 크다. 지성, 감수성, 이타심, 이기심, 법과 도덕(현실세계에 대한 이해) 등 많은 것을 알수록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6.

지성주의가 왜 필요한가? 인생과 세상사에는 통합적이고 깊이 있는 지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종종 야만과 타락을 막기 때문이다. 지성(주의)는 개인의 삶에도 필요하다. 지성이 불안을 걷어가기도 하고, 삶의 문제도 해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깊이 소통할 줄 아는 공감이 필요한 만큼이나 합리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지성도 필요하다.

 

7.

서언이 길었다. 나는 왜 이 책이 읽고 싶은가. 최소한 네 가지의 이유가 떠올랐다.

 

1) 주지주의와 주정주의의 변증법적 통합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반지성주의를 다룬 고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에 대한 오해와 불합리한 거부이기도 하고, ‘지성인들의 (야만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든 극복해야 할 태도다. 모든 지성인들이 야만적이지 않고, 감수성도 지성만큼이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 역자가 주는 신뢰도 크다. 유강은이 누구던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담은 책 『The Left』,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 등 명저들을 번역한 뚝심, 실력, 관점을 지닌 번역가다. 올해 초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다시 출간해 반가웠다.

 

3) 내가 좋아하는 학자들도 반지성주의에 말을 보탠 바 있다.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를 써 왔던 우치다 타츠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가 떠오른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1972년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Your Mind Matters)』로 반지성주의를 비판했다. (스무 살 때, 존 스토트의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은 나를 깊이 위로했다.)

 

4) 책은 1964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50년 만에 번역된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읽고 싶어진다. 그나저나 680쪽의 분량은 전혀 저항감이 없는데, 35,000원이라는 책값은 적잖이 부담된다. 이것도 반지성주의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개념과 범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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