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책을 이야기하는 졸바

우아한 선동이 더 강렬하다

카잔 2018. 1. 2. 21:52


[서평] 우아한 선동이 더 강렬하다

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 Antoine Compagnon, Un Ete Avec Montaigue

 

1.

이리도 품격 있는 선동이라니! 몽테뉴의 삶과 사상을 40개의 에세이로 풀어낸 책 『인생의 맛』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목표’가 독자들을 몽테뉴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썼다. 1592년에 사망한 몽테뉴는 에세이의 원형인 『수상록』을 남겼다. (인문주의와 개인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수상록』을 펼치고 싶었던 순간이 도대체 몇 번일까! 마흔 번에 가까웠으리라. 모든 글을 읽을 때마다 몽테뉴가 궁금해진 셈이다. (수년 전 ‘몽테뉴 스터디’도 했기에 전혀 모르진 않지만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에 『인생의 맛』을 지인에게 추천했는데, 그는『수상록』의 추천 번역본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몽테뉴를 읽고 싶다는 것이다. 『인생의 맛』을 읽은 두 명의 마음이 움직인 셈이다. 이발이중이다. (모수는 적지만) 앙투안 콩파뇽은 독자를 단박에 몽테뉴로 이끈 탁월한 선동가였다. 과장된 동작이나 호기로운 목소리는 없었다. 논리와 통찰 그리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몽테뉴 이야기를 풀어갔을 뿐이었다. ‘선동이 이리도 우아할 수 있구나!’

 

2.

책은 가볍고 작다. 200쪽도 안 된다. 5분이면 읽을 분량의 짧은 글을 40편 묶었다. 편안하게 읽고 몽테뉴가 던지는 화두를 생각하기에 좋다. 1300쪽에 달하는 『수상록』(완역본) 읽기에 비하면 부담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몽테뉴의 저력을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다. 몽테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저자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저자에게 반했는데, 그의 사려 깊음이 단 한 페이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몇 줄짜리 문단을 40여 군데 골라내어 간략하게 해설함으로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페이지나 손에 걸리는 대로 선택할 것인가? 우연에 운명을 맡기면서? 아니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을 빠르게 훑어야 하나? 이 작품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혹은 일관성이나 완성도를 포기한 채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다루는 데 만족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했다.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가 책을 쓴 방식은 바로 몽테뉴가 글을 썼던 방식이었다. 저자는 『수상록』에 정통했기에 자유롭게 쓰면서도 몽테뉴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몽테뉴를 작은 그릇에 우겨 넣지 않았고 해석과 통찰이 편협하지 않았다. 때때로 라틴어 지식을 동원하여 몽테뉴의 생각을 풀어냈고(‘저울’, ‘성실성’ 등의 글) 몽테뉴 사상의 의의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신세계를 전염시켜 쇠퇴와 몰락을 앞당기는 것은 아닌지” 라고 염려하는 몽테뉴의 글을 두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신세계’라는 글이다).

 

“신세계를 사로잡은 것은 구시대의 정신적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을 무릎꿇린 야만적인 완력이었다. 당시 몽테뉴는 멕시코의 찬란한 문명을 야만적으로 파괴한 스페인의 초기 식민지 개척사를 읽고 난 직후였다. 그는 식민주의를 처음으로 비판한 이들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하워드 진이 떠오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깃든 야만성을 폭로한 그였다. 20대 중반에 그의 『미국 민중사』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웠던 날들! 2016년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개정판이 출간되고 2017년에는 하워드 진 입문서(『만만한 하워드 진』)가 출간될 정도니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함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그는 2010년에 타계했다.)

 

3.

책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먼저 몽테뉴의 말을, 곧이어 저자의 말까지.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시대나 해 단위가 아니라, 매일 매분을 그린다. 내 이야기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금방이라도 내 처지뿐 아니라 생각까지 변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건들과 갈팡질팡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반된 생각들의 기록이다. 나는 또 다른 나 자신일수도 있고, 그때그때 상황과 판단에 따라 주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 『수상록』 제3권 2장

 

“요컨대 인간 조건에 따라 해석하고 그 고난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시계(視界)는 변화에 있지 존재에 있지 않다. 바로 다음 순간, 세상도 나도 변할 것이다. 자신이 한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한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다만 세상 만물이 얼마나 쉼 없이 변하는지를 기술했을 뿐이다. 그는 상대주의자다. 나아가 그의 이 같은 ‘일면’(필자 강조)을 원근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몽테뉴는 말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나의 정체성은 불안정하다. 그는 ‘귀착점’(저자 강조)을 찾지 못했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 앙투안 콩파뇽

 

책은 이런 식의 구성이다. 몽테뉴와 후대의 학자가 생각을 주고받는 형식 말이다. 이런 책의 가치는 편집 가공하는 쪽(저자)의 깊이에 달렸을 수밖에 없다. 몽테뉴는 후배의 편집에 반대나 찬성할 수가 없기에 그렇다. 나는 이 책에 만족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편집 해석한 『조르바의 인생 수업』에 큰 불만을 느꼈던 점에 비하면 정말이지 만족이다.)

 

혹시 위 구절에 감동하지 못했다면 나의 개인적 취향으로 고른 구절이기 때문이리라. 상대주의자 몽테뉴는 그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글에서는 몽테뉴의 또 다른 일면들이 소개된다. 회의주의자 몽테뉴, 성실한 몽테뉴, 르네상스인 몽테뉴, 서재인 몽테뉴 등. 니체도 극찬한 이 르네상스의 거장은 매우 진솔하게 자신을 관찰하여 기록했고, 우리 모두는 그의 일면을 통해 자신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 몽테뉴 읽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는 말이다. (‘거의’라는 말의 무책임성은 참 편리하다.)

 

위 본문과 관련되긴 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얘기를 해야겠다. 최근 『역사의 천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벤야민의 생애 마지막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페이지의 여백에 ‘갈팡질팡’이라고 적어야 했다. 벤야민은 종종 우왕좌왕했다. 미국 망명을 두고 고민할 때에도 오늘의 행선지를 결정할 때에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갈팡질팡’이란 워딩으로 기록한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이 반가웠던 이유다. (갈팡질팡이라 해석한 프랑스어 원문이 궁금해진다.)

 

갈팡질팡의 근원은 우유부단함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 지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눈앞에 마주한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 마을에서는 진리가 저 마을에서는 오류가 되고, 당시의 진리가 지금에선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푸코는 “나는 달력과 지도가 없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하는 지혜란, 이렇게 장소, 상황, 사람을 고려한 종합적이고 시의적인 판단을 뜻한다. 그렇기에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은 상대주의자가 된다. ‘지혜’라는 지적이고 감수성 짙은 고지에 이르기 위해 감지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상대주의자!

 

누군가에겐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지혜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서 우유부단할 확률도 높지만 그들은 점점 용기와 행동력까지 겸비하면서 우유부단함으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우유부단과 지혜는 어떻게 구분할까? (사례 없이 명제로만 언급하자면) ‘순간’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그들의 차이를 드러낼 것이다.

  

4.

『인생의 맛』에서 가장 감동했던 글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p.179~182). 나는 자주 내 삶을 성찰한다. 생각과 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종종 이런 고민이 든다. ‘성찰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삶을 위해 성찰을 줄여야 할까?’ 몽테뉴의 글은 이런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추동했다. 성찰을 깊이, 제대로 하라고! 내 삶의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찰의 과다함이 아니라 성찰의 질적 수준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삶을 추동하는 두 바퀴인 성찰과 실천의 균형을 이루지 못함이 문제이지 깊은 성찰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아래는 깨달음을 선사해 준 몽테뉴의 두 구절이다.

 

“내 책을 아무도 읽지 않게 된다면, 내가 그토록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그 많은 시간을 한가로이 보낸 것이 과연 낭비가 되는 것일까? 나라는 거푸집에 이 형상을 찍어내는 동안 나는 자신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시로 다듬고 땜질해야 했으며, 그러는 사이 주인(몽테뉴 자신)도 단단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졌다. 타인을 위해 그리다가 내 본연의 보다 선명한 색으로 내면을 칠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작가와 한 몸인 책. 고유의 일과. 내 삶의 일부. 이 책은 다른 책들처럼 외부적인 목적과 여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제2권 18장

 

“내가 그토록 지속적으로 호기심에 이끌려 나에 대한 보고서를 써 온 것이 시간 낭비였을까? 고작 몇 시간 동안 생각만으로 혹은 몇 마디 말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들은, 긴 세월 동안 성심과 전력을 다해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고 직업으로 삼은 자처럼 깊이 있게 자신을 탐구하지도, 자기 안으로 스며들지도 못한다.” - 몽테뉴

 

5.

책의 원제는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 Un Ete Avec Montaigue’이다. 2012년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 저자가 출연하여 몽테뉴와 그의 『수상록』에 대해 5분 남짓 동안 나눈 이야기가 책이 되었다. 이 방송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덕분에 2013년엔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이후 보들레르, 위고, 마키아벨리, 호메로스까지 진행되었으니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한다. 저자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수업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끝으로 저자를 잠깐 소개해야겠다. 앙투안 콩파뇽!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몽테뉴와 마르셀 프루스트 전문가다. 2013년도 진행된 ‘프로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저명한 프루스트 전문가 여덟 명이 참여했는데 앙투안 콩파뇽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국내 번역된 책은 『인생의 맛』,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공저)과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이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서평을 맺는다. 나에게 앙투안 콩파뇽이란 학자는 ‘우아한 선동’도 강렬하고 달콤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저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