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교감하는 작가가 생겼다

카잔 2018. 10. 10. 03:54


“인생이 진정으로 꽃피는 시기는 마시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는 기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그의 진지한 인생론은 아니다. 젊은 날 회상을 기록한 짧은 글에서 지나가듯이 던진 문장이니까. '젊은 날의 정열과 체력'을 향한 그리움이랄까 애틋함이 느껴진 글이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자신의 첫 번째 좌우명은 “건강”이라고 썼다.)


진지한 발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짚어 두고 싶다. “어느 연령대를 살든 인생이 꽃필 수 있다!”고. 내가 이 말을 실제로 믿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제 막 반평생을 살았을 뿐이니 정말 모르겠기도 하고, 한편으로 하루키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도 있어서다. 오십 대에도, 칠십 대에도 인생이 꽃필 수는 있겠지만 노년의 활기와 정열은 젊은 날의 그것과는 미세하게(또는 눈에 띄게) 다르니까. 


하루키는 나이 듦을 받아들이며 살았다(그렇게 보인다). 받아들이지 못했더라면 소설은커녕 별다른 삶의 결실 없이 상실감과 외로움에 온 몸이 산화되었으리라. 이런 추측은 그가 젊은 날에 쓴 산문집을 읽으며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별에 몹시 아파했고 죽음을 인식하고 살았으며 상실에 자주 고통스러워했다. 본인의 경험 얘긴 없었지만 자살에 대한 언급도 잦았다. 쓸쓸한 내용이 많았지만 그 글들을 읽으면서 하루키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다.

 

하루키가 나이 듦을 인정해 가면서도 젊음을 그리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서른 살 청춘이 “내가 너무 나이 든 것 같아”라는 말하더라도 하루키는 “나는 마흔이야”라고 핀잔을 주며 상대방의 감성에 찬물을 끼얹진 않을 것 같다. 하루키는 스물한 살에도 자신의 나이 듦을 애석해했다. “스물한 살의 나이는 충분히 젊지만 이전만큼 젊지는 않다. 스무 살이 젊음의 기점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젊음의 상실을 무서워했다. “우리는 해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는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기분조차 든다. 걱정스럽게도 그것은 진실이다. 무섭다.” 나이 먹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인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하루키 같은 사람은 ‘지나치게’ 예민하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지나침’은 종종 ‘깊이’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지나침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타고 난 성향을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이해’다.

 

대답이 뻔한 질문 하나. ‘나이 듦을 무서우리만치 생생하게 인식하는 감성 덕분에 영혼을 울리는 문장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하루키를 향한 동경과 주관적인 감탄 하나. ‘그토록 무서워하면서도 살아내었구나, 그는 결국 살아남았구나!’ 나이 듦에 심드렁한 사람보다는 예민한 사람의 생존이 어렵고 드물다. 그래서 반갑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인생길을 걷다 쓰러진 자리에서 교훈과 통찰을 주워 일어났을 테니까. 아프면서 깊어졌을 테니까.


사족도 하나. 오랫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루키가 아닌) ‘무라카미’라 불렀다. 언급하는 자리에 따라 ‘무라카미 씨’라고 말하기도 했다.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일본 문화를 들은 이후로 그의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하루키’라 부르기가 민망하고 어색했던 것이다. 오늘 부로 내 마음 속에서 ‘무라카미 씨’는 그냥 ‘하루키’가 되었다. 때때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한 사람은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읽음으로써 교감이 일어난다. 한 번의 만남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