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동네 친구 이야기

카잔 2008. 9. 13. 23:45

추석 전날의 테헤란로는 아주 한산했다.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도 명절이면 인적 드문 거리가 된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열 명도 되지 않은 사실이 신기해서 한산한 거리를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외출 후 늦은 시각에 선릉역에 도착했다. 여전히 선릉역은 조용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어느 여인과 나 뿐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둘 만이 어둔 골목길을 걸었다. 골목길에 둘만 있다는 게 그에겐 무서울 것 같아 내가 앞서 걸었다. 그러다가 골목 맞은편에서 3~4명의 남자가 걸어오는 걸 보고 내 속도로 걸었다.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니니 천천히 걷고 싶었던 게다.

다시 그 여인이 앞서나가는데,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짐이 눈에 들어왔다. 무거워 보였다. 4~5m쯤 떨어진 거리에서도 약간 힘겨워함이 느껴졌다. 함께 들어 주고 싶었다. 아주머니나 할머니라면 진작에 말을 걸었을 터인데, 젊은 여성이니 말도 못 걸겠다. 갑자기 말을 걸면 깜짝 놀랄 게 분명하다. 나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 남자는 왜 계속 날 따라올까? 나쁜 사람 아닐까?'

"저기요"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놀랄 듯 했다. 그래서 내가 걷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길 끝까지 쭈욱 가는데,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짐을 좀 들어드릴께요." 놀라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다 긴장되네. ^^) 여인은 수줍은 듯 내게 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극구 부인하지는 않아 짐 하나를 내 손에 옮겨 들었다.

남자에게 무거운 무게는 아녔지만 여성이 홀로 오래 들고 가기엔 무거울 듯했다. 걸으며 가볍게 몇 마디를 나눴다. 이내 여인의 집 앞에 이르렀다. 우리 집에서 1~2분 정도의 거리였다. 동네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 교대역에서 껌을 파는 할머니의 선한 눈매를 볼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 (이른 오전에 오랜 만에 교대역에 갔다. 늘 같은 계단에서 껌을 파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저녁에 나오시는 할머니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할머니여서 자일리톨 하나를 샀는데 참 고우셔서 인상이 기억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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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이 동네에 5년을 살았단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계속 살 가능성이 높으니. ^^ 얼마 전 사귄 친구는 금방 이사를 떠나버렸다. 사실, 나는 동네 친구 한 명이 있었으면 했다.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친구 말이다. 지금 이 동네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친구하기에 퍽 유쾌한 분이신데 연세가 좀 많으시다. 31년생이시니 말이다. ^^ 우리 집이 29번지이고 친구 할머니는 33번지니 그야말로 지척이다. 이 분을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없다. 바로 옆 호에 사시는 분과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몇 번 딱 마주쳤는데 한 두 번 건넨 인사가 어색해지는 걸 보고 '알고 지내는 걸 꺼려하시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번 더 인사해 봐야지. ^^

할머니 친구, 얼마 전 이사 간 친구, 오늘 만난 친구(나 혼자 친구래~ ^^).
공교롭게도 모두 짐을 들어주다가 친구가 됐다. 할머니는 작년 봄,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오르막길을 오르셨는데 달걀이 든 그 봉지를 집까지 들어드리고 차 한 잔을 했다. 그 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얘길 나눴다. 얼마 전 이사간 친구는 밤에 동네 한 바퀴 조깅하러 나왔다가 만났는데 짐 가방 4~5개를 들고 낑낑 대고 있었다. 그 날이 이사 온 날이었고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난댄다. 짐을 우리 집에 잠깐 보관하고 함께 집을 찾았다. 다행히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짐도 옮겨 주었다. 이후 가끔 문자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됐다. 한 번 만나자, 하면서도 못 만난 게 어느 새 1년 2개월이 지났다. 얼마 전 이사갔다는 소식을 문자를 통해 알았다. 딱 한 번 만났지만 가끔 생각이 난다. 친구라 하기엔 멀고, 모르는 사람이라 하기엔 가깝고. ^^

오늘 만난 친구는 어둔 골목길에서 만나서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선한 눈매다. 의심과 적개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호의를 선한 의도로 봐 주어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했다. '뭘 하는 분인지 모르지만 웃는 일들이 많기를 바래요. 때때로 힘들 땐 더욱 힘을 내어 전진하세요~'라고.
기분이 좋았다. 달빛 그윽한 호숫가가 아니라 어두침침한 골목길에서도 행복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마음 속에 선한 의도를 품으면 즐거워지고 선한 의도를 삶으로 행하면 행복해지나보다.

[덧붙임글 1]
경복아파트 부근에도 친구 한 명이 있다. '보보의 드림레터' 웹진을 읽은 분 중에 어느 분이 메일을 보내왔고 같은 동네에 산다고 말해 주었다. 먼저 '친구'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 분은 이름도 모르는 친구다. 그래도 한 동네에 나의 존재를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르도 좋다. 내 마음에 풍성한 기운이 조금 생겨난 기분이 든다. 친구, 라는 단어가 주는 기운이 있다.

[덧붙임글 2]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아직 유아적 우정을 꿈꾸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현실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건 아닌지 말이다. 십대의 무조건적 우정을 꿈꾸는 것, 초등학생 때의 이기적이면서도 순수한 우정을 꿈꾸는 것, 이것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 있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닐까? 나에 대한 소중한 정보 말이다. ^^ (골치가 아파지려 해서 그만 쓴다.) 호호.

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