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Just Like Jesus

특별한, 아니 아쉬운 새벽기도회

카잔 2008. 12. 18. 21:47

어젯 밤, 교회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 다른 부서여서 교회에서 만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낸다. 편한 사이라는 말이다.
"내가 왜 전화했냐면, 내일 새벽 기도회 나오라고."
이번 주가 특별새벽기도회 주간이니 참석해 보라는 것이다.
"오케이" 내가 생각해도 즉각적이고 시원스런 답변이었다.
누나도 한치의 주저함 없는 답변을 들은 것에 기뻐했으리라.

내 속마음은 이랬다.
기도회,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동했다.
그렇잖아도 기도하고 싶은 요즘이었고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더해지는 날들이었다.
누나 역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권했을 것이고
누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긍휼히 여긴 누나의 기도에 하나님이 기뻐 응답하셨는지도.

사실, 오늘은 바쁜 날이다.
정오까지 원고를 업로드해야 하는 날이다.
나의 두 번째 책은 청소년 시간관리를 다룬 책인데, 몇 명과 함께 쓰고 있다.
오늘이 완성된 원고를 공저자들끼리 공유하기로 한 마감일이다.
오전 내내 매달려야 하지만 기도회에 대한 마음의 주저함은 없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후 시간을 더욱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기도하는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되심을 고백하고 지혜를 의뢰하는 순간이니까.

새벽 3시 30분에 눈을 떴다.
차를 마시고, 곧바로 원고 마무리 작업에 임했다.
2시간 가까운 시간을 몰입하여 책을 쓴 후에 기도회 나갈 준비를 했다.
씻고 밥을 먹는 일 말이다. 이른 시간이라 샐러드와 사과를 먹었다.
기도회는 집에서 가까운 커피숍에서 진행된다. 다행이다. ^^
정시에 도착했고, 처음 참석한 곳이라 조금 외진(^^) 곳의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어떤 여인이 잠든 아이를 안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갓난 아이와 함께 참석할 만큼 기도에 간절한 그녀를 바라보며
나의 마음도 더욱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찬양을 했다. 기도하고 싶을 땐 잠시 찬양을 멈추고 기도했다.
깊은 임재는 아니었지만, 평안함과 간절함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찬양 인도자의 자연스러운 진행이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찬양이 끝나고 어떤 형제님이 나오셨다. 목사님인지는 모르겠다.
이 글의 어조가 담담하고 건조한 까닭은 이 분과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에게 몇 가지 아쉬움을 느꼈던 것이다.

형제님(?)께서는 대표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가 뜨겁지 않았다.
영으로 기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기도 내용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관념적이었다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테헤란로를 깨우자고, 비전을 깨우자고 하셨는데
추상적인 기도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없고, 인도자로서의 준비도 부족했다고 느꼈다.
테헤란로의 영성 상태에 대한 조사(유흥업소 수가 지난 해에 비해 10% 늘었다는 등의)를
할 수도 있고,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들려 주실 수도 있는데....
매일의 기도회가 특별하고 소중한데, 특별한 준비없이 나오셨다면 그건 정말 나태함이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형제님의 인간 이해에 대하여 아쉬움이 컸다.

가장 큰 문제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나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인도함이 없는) 교회 자체에게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한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를 기대한다. 그분의 능력이 심히 크시기 때문이다.
회의 반, 호기심 반 혹은 
애정 반, 아쉬움 반으로 다가서는 나같은 교인에게도 한껏 친절함을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 

형제님은 이런 말을 하셨고, 그와 동시에 나의 마음은 걍팍해졌다.
"주님을 향한 삶은 넉넉해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삶은 풍성하지 않고 부족해집니다."
정확한 표현으로 묘사하진 않았지만, 이런 뜻의 말씀이었다.
몇몇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넉넉함과 부족함이 물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날의 주제가 <물질을 나누고 사랑을 되받다>였기에 물질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세상을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한 건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비기독인들도 사랑하신다.
때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청빈(淸貧)으로 이끌기도 하시고,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부를 주시기도 하신다.
부자들이 자신이 가진 부에 묻혀 더 큰 가치를 못 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부자들은 빈자보다 훨씬 아름다운 일을 하며 살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가능성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방식으로 기독인과 비기독인들을 사용하신다.
나는 형제님의 인간 이해가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들었다.
오! 교만한 보보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지어다.
이렇게 나처럼 맹랑한 청년도 보다듬어 주려면 인도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어진 목사님의 설교도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아쉽다.
첫째, 설교가 너무 길었다. 길었다는 점이 아쉬운 게 아니라,
그 자리가 새벽 기도회라는 점에서 아쉽다.
나같이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도 소망하는 자리가 새벽 기도회다.
얼마나 기도하고 싶었으면 새벽을 깨워 그 자리에 나갔겠는가.
충분히 동기 부여된 상태로 참석하는 예배자들이다.
한 소절의 찬양에 마음을 활짝 열고, 한 마디의 말씀에 꿇어 엎드린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이 길어져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내 기억으로는 30~35분 정도 말씀을 전하셨던 것 같다.
참석한 이들의 소원을 헤아리셨다면 조금 줄이셔도 좋았다.
말씀을 듣는 훈련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억울하다.
나는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좋아 일부러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를 찾는다.
1시간 50분 예배 중에 90분 이상의 시간 동안 말씀을 전하신다.

둘째, 설교 말씀에 성경이나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설교가 좋다.
사실 목사님의 설교는 재밌었고 감동이 있었다. 
말씀 중에 등장한 목사님의 친구, 삶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했다.
이 점이 아쉽다는 점이다.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의 삶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오늘 하루 중 서너 번 이상 목사님에 대한 생각이 났다. 
나는 새벽 기도 후에 쭈욱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싶었는데... 아이러니다.

나의 직업은 강사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지만,
종종 교회에서 특강을 하거나 간헐적으로 예배 시간에 강연도 한다.
목사님의 설교 방식이 꼭 내가 강연을 하는 것과 흡사했다.
강연은 나 자신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책 속 이야기보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승리한 이야기들이 더욱 강렬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어야 한다. 
하용조 목사님은 늘 하나님을 중심의 설교를 하신다. 
이점은 많은 목회자 분들이 숙고해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나는 감동이 아닌 은혜를, 목사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게다.

오후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지 일년 남짓 되는 청년을 만났다.
같은 교회를 다니니 우연히 교회 얘기가 나왔고, 오늘 목사님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목사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분명, 어떠냐고 물었다. 야, 좋디, 라는 식으로 비꼬듯 묻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입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성향이 아니에요, 너무 흥미 위주세요.
라는 동문서답 식의 답변이 흘러 나왔다.
이것을 뒷담화라 생각해도 좋지만,
일면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채워지지 못한 거룩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신앙 1년차가 흥미 위주의 설교여서 아쉽다고 느낀다면
분명 그 설교에는 보다 경건한 메시지와 영적 도전이 포함되어야 할지 모른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목사님이 읽으셔도 좋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고
기독 청년이 읽어도 좋겠지만 유익할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저 이곳을 들러 주시는 분들이 읽으시리라.
이왕 태어난 글이니 한 가지만의 메시지만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보보는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점.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머리로 판단하여 이것이 진리라고 하나님을 믿어 왔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 
얼마 전, 누군가가 내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으며 불편했지, 라며 물었다.
강한 기독교 비판이 많이 실려 있는 책이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을 읽은 기독 청년 한 명은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사실을 그도, 나도 안다. 
나에게 어떠했냐고 묻는 그 분에게 많은 얘기를 못했다. "아니오"라고 말 밖에.
엉뚱하게도 이 블로그를 빌어 그 때 못한 나머지 말을 해야겠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작년에 내가 읽는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불편하기는커녕,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아주 반가웠다.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한 공격에 열려 있지 않으면 배타적이 된다.
공격에 배타적으로 반응하면 생각이 멈춘다. 심하면 썩는다.
나는 어떤 진리가 정말로 진리라면, 공격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온갖 공격과 비판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공격이 오면 온 몸으로 맞아 더욱 강해지는 것이 참 진리이리라.
공격을 받고 무너진다고 무서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무너진다면 그 때, 다른 것으로 빨리 갈아타면 그만이다. 

『다빈치 코드』로 공격당했을 때에도 반가웠다.
오히려 기독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만으로 세상을 향해 변호할 때 아쉬웠다.
세상에 대하여 제대로 변호하려면 그들의 언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인들의 종교적인 언어에 아쉬움을 느꼈던 게다.
니체의 탁월한 비판에 반가웠다는 내 심정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왜 이해받으려고 하나?
기독교가 옹졸하고 배타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오직 구원에 대한 문제에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지만,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

기독교인들은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다.
기독교도 신자들에게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다, 싶으면 배교할지도 모른다.
그 배교는 나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거나, 금지령이 너무 많아서, 라는
식의 개인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거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거나
내가 믿는 믿음이 다른 진리에 의해 와해되면 나는 곧장 옮길 것이다.

이것이 불신앙인가?
내 신앙의 연약함이거나 부족함일지는 몰라도 불신앙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나의 가슴으로 믿고 싶을 뿐이다.
나를 옹호할 수 있는 시 한 수가 문득 떠올라서 반갑다.
이 시로 관념적인 신앙에 대한 나의 불편한 감정을 대신한다.

신을 믿는 것
                          - 미구엘 드 우나무노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신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덧] 글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다.
다만, 이 글만은 나의 진심이기에 숨기지 않고 살려 내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이라 생각하면 두렵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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