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낭만 유럽여행

[여유당 기행] 아! 다산 선생님...

카잔 2007. 6. 2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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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전경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 주섬주섬 여장을 꾸려 다산 생가 ‘여유당(與猶堂)’행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여행가는 날에 웬 비람, 하고 투정 섞인 생각이 들었다. 다산 선생님이 쓰신 책과 누군가가 다산 선생님에 관하여 쓴 책을 가방 속에 집어넣고 우산도 챙겨들었다. 마음먹은 일을 행하는 길이니 발걸음이 가볍고 기분이 좋다.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들고 읽었다.

집에는 다산 선생이 쓰신, 혹은 다산 선생에 관한 7~8권의 책이 있었다. 그 중에 어떤 책을 넣어갈까, 하는 짧은 고민 후에 선택된 책은 『뜬 세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가벼운 다산 산문집이었다. 책을 펼쳐 들었는데, 첫 장의 첫 구절이 그대로 마음에 와 닿았다.
“벼르고 벼른 끝의 다산 생가 행이었다.”
하하. 저자는 여유당으로 가는 길이다. 나 역시 지금 여유당행 길을 나섰으니 시간의 차이만을 두고 저자와 나는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선택하길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 김영하는 책 속의 배경이나 책과 잘 어울리는 장소에서 책을 읽는 것을 ‘현장 독서법’이라고 이름 붙이며 이것은 가장 사치스러운 독서법이라고 했다. 현장 독서법은 사치스러울지는 몰라도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사색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단돈 2천원으로 도착하여 저자의 향기에 취해볼 수 있다면 사치는커녕 퍽 수지맞는 일이다.

나는 강변역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저자는 벌써 여유당에 도착했다. 여유당에 도착한 저자의 느낌은 이렇다.
“주차장 팻말이 붙은 곳에 차를 멈춘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생가 주변은 먹고 자고 노는 집들로 한 바탕 난전이 벌어져 있었다. 복원된 생가 건물 안에선 서너 쌍이나 되는 신혼부부들이 결혼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여유당(與猶堂)’-정조의 급서와 함께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칩거한 다산이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사방 이웃들의 시선을 꺼리듯 겁을 내며“, 그야말로 ‘삼가고 또 삼가면서’ 살겠다는 다짐을 담아 지은 이름이었다. 그 여유당이 온통 촬영장 세트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쫓기듯 묘소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코끝을 간질이는 찔레 향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시달려 먼지가 뿌옇게 풀썩이기는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후손들의 천박한 문화(?)는 이 거인이 그토록 소망했던 고향 뒷산에서의 영면조차 난장을 만들어 버렸구나. 꿈조차 소란하겠다 싶었다.
사실 신혼부부들은 복원된 생가 뜰을 천박한 세트장으로 만들 일이 아니라, 옷깃을 여미고 묘소에 올라와 조촐한 맹세를 하는 것이 더 맞을 일이다.”

저자의 말에 공감이 들어 책의 여백에다 “옳거니!”하고 적어두었다. 다산 선생님은 부인 홍씨와 함께 만 60년을 보내는 동안 한결같이 성실하고 따뜻한 남편이었다고 한다. 다산은 결혼 60주년 회혼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님이 남기신 마지막 시는 회혼일 이틀 전에 지은 <회혼시>였다.

六十風輪轉眼翩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으니
穠桃春色似新婚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生離死別催人老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戚短歡長感主恩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두 분은 죽어서도 합장묘로 나란히 누워 계시니, 사랑의 맹세에 이보다 좋은 곳, 더한 증인이 없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 부부들이 여유당에서 사진만 찍고 황급히 떠나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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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역 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어느 새 다산선생 유적지 앞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렸다. 잠시 비가 그쳤다. 버스 정류장은 한적했고 ‘다산유적지’라는 이정표가 크게 붙어 있었다. 1km 남짓 되는 거리이니, 걸으면서 선생님을 뵙기 전에 다소곳이 마음을 정리하면 될 듯 하였다. 걷는 동안에 풀내음과 비내음이 코 끝에 닿았다. 기분이 좋았다. 생가 주변이 왁자지껄한 식당으로 가득할 줄 알고 지레 겁먹었는데, 생각보다는 조용한 분위기에 안심이 되었다. 아마도 비가 와서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정오가 넘은 시간이라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찾았다.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다산 선생 기념관에 들어섰다. 우측으로 기와 한 채가 보였는데, 여유당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진으로 봐 두었던 덕이다. 기념관 내에도 사람이 드물었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날씨여서 그런가? 만일 그렇다면 뒷날에도 비오는 날에 와야지, 하고 생각했다.

여유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19년의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이 손자를 어르기 위해 앵두를 따서 숨겨두기도 하고, 북한강 일대의 석학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늙어가던 곳”이다. 긴 유배생활 동안 다산 선생님은 치열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학문을 하였고, 책을 집필하였다. 이에 대한 하늘의 보답으로 비교적 편안한 말년을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유당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가는 흙계단에 자리를 자고 앉았다.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기에 독서하기에 딱이었다. 다산 선생님의 생애를 다룬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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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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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에서의 독서



쉰 일곱 살의 다산 선생이 유배를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1818년부터 돌아가신 1836년까지의 노년의 생애를 다룬 부분을 읽었다. 장(章)의 제목이 “노년의 여유,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였다. 실제로 19세기 초반이라는 시대는 다산 선생을 밀쳐 내었다. 하지만, 선생이 가신 후,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은 다산 선생을 받아들였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 학문적 업적은 길이 회자되고, 후손들은 선생의 사상을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여행을 다녀와서 『다산문선』을 읽으며 더욱 확고해졌고, 결국에는 이렇듯 책 한 두 권을 읽고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다산 선생의 사상을 좀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시계를 갖고 있지 않아 길손에게 물었더니 2시 30분이라 한다. 30분 정도를 더 여유당에 머물렀다. 나는 마당에서 물러나와 건물 채 뒤편으로 가서 계속 책을 읽었다.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조용해지고 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니 200여 년 전 이곳에서 글을 읽고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시던 다산 선생님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햇빛으로 화창한 날보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 이러한 감상에 젖기에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여유당 뒤편의 다산 선생님 묘소에 올랐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두 분이 누워 계신 곳에는 묘 봉우리가 하나뿐이었다. 합장묘에 나란히 누워 계시기 때문이다. 잠시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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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님께 올린 첫인사


“다산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향기에 취하고 싶어 책을 읽다가 문득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예를 갖추어 허리를 굽혀 절을 드렸다. 마른 땅이라면 이 곁에서 탁 트인 묘소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하루 종일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바가 생기면 바로 곁의 선생님께 질문을 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손을 흔들며 하직 인사를 올려 드렸다. “선생님, 저에게 많이 가르쳐 주세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몰라서 공부 좀 하고 다시 올께요.” 라고 인사말을 드렸던 것 같다. 큰 감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내려와서 다산기념관과 문화관에 들러 정약용 선생에 대한 DVD를 감상하고, 전시물들을 둘러보았다. 기념관을 나오니 빗줄기가 좀 더 세졌다. 문화로를 걸으며 게시된 안내물과 선생님 저서의 인용문을 읽기도 하며, 여유당 기행을 마무리하였다. 기념 촬영을 몇 장 찍고 나서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다산유적지를 나오는 길에 주차장 주변에 세워진 다산 선생님의 어록을 읽었다. 그 중에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말씀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말씀의 제목은 <힘써야 할 세 가지 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세상에서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이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몸을 움직이는 태도, 말씨,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 가지는(動容貌, 出辭氣, 正顔色) 학문을 하는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곳인데, 이 세 가지를 바로 익히지 못하고 다른 일에 힘을 쓴다면 비록 하늘을 꿰뚫는 재주가 있고 과인(過人)의 식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발뒤꿈치 하나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게 되나니, 결과적으로 어긋난 말씨, 잘못된 행동, 도적질, 대악(大惡), 이단(異端)이나 잡술(雜術) 등으로 빠지기 십상이니 세상에서 못할 짓이 없게 된다. 나는 이 세 가지를 힘쓰겠다는 뜻으로 삼사제(三斯齊)라는 당호를 짓고 싶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는 난폭하고 방탕하고 천한 것을 멀리 하며 믿음을 가까이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느냐?”

요즘 ‘마음이 중요하지, 행동이야 뭐 좀 흐트러질 수도 있지.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겠어?’ 라는 생각을 했던 터인데, 흐트러진 행동이 마음의 경건함에 득이 되지 않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나의 태도와 말씨, 그리고 얼굴빛을 돌아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산유적지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인적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씨에도 후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 좋은 날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돌아가신 지 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산 선생을 찾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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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님 상 앞에서

회혼시를 암송하며 돌아 나오는 길은 무척 평온하였다. 다산유적지를 돌아보며 추억을 만드는 것보다 나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다산 선생의 사상과 생애를 들여다보고 공부하며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보다 이롭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다산의 향기에 취하고 싶은 ‘감상적인 바람’을 가지고 이곳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다산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성적인 다짐’을 하게 되었다. 다산의 제자 중에 ‘황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학문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근심하는 황상을 바라보며 자상스레 말씀하셨던 다산 선생님.

“배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는데,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구나! 첫째 기억력이 좋은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문제를 낳고, 둘째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글이 가벼이 들떠 허황한 데로 흐르며, 셋째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것이 문제다. (희석이 너처럼) 머리가 둔하지만 공부를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앞뒤가 막혔지만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지며,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꾸준히 연마하면 빛이 난다. 그러면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부지런히 해야 한다. 또 뚫는 방법이 무엇이냐,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이 역시 부지런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하는 마음은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을 확고히 하는 데 있다.”
제자 황상을 향하여 들려주신 이 말씀을, 마치 지금의 나에게 하시는 것만 같아 다산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곧, 2차 다산 기행을 계획하여야겠다.
아! 다산 선생님...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 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