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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탄>에게 부족한 2%

카잔 2010. 4. 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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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개봉일 : 2010. 4. 1
감독 : 루이스 리터리어
출연 : 샘 워싱턴 (페르세우스), 리암 니슨 (제우스),
          랠프 파인즈 (하데스)

관람 : 2010년 4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평점 : ★★★

간단평 :  올림푸스 신전, 신화 속의 괴물, 신과 인간의 싸움, 장엄한 스케일 등 볼거리가 많음. 신과 인간의 경계 등 생각꺼리도 있음. 그러나, <아바타>의 공감각적인 메시지 확장은 없음.



※ 스포일러 있음. 그러나 <타이탄>은 미스테리도 아니고,
    시나리오가 치밀하거나 마지막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영화 보시는 데에는 무방함.


오전 8시 30분이라는 이른 시각에 본 영화 <타이탄>. 관객보다는 출근하는 시민이 많은 시각에 영화관으로 향하는 기분이 묘했다. 일해야 하는 시간인데, 라는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내야 했던 점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다. 더 큰 감정은 즐거움이다. 3~4시간 동안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짓는 일도 아닌데 괜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해야 할 일을 완료해 두어야 더 즐거울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을 보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처리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했다. 줄거리 역시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여 제우스의 거대한 동상까지도 무너뜨린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여러 신들과 함께 인간의 도전을 어찌 다뤄야 할지 고민한다. 제우스의 전지전능함을 질투하는 지옥의 신 하데스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제우스의 허락을 얻은 하데스는 인간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제우스에게서 신적 능력을, 인간인 어머니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물려 받은 영웅 페르세우스다. 그가 하데스의 파괴를 막아낸다는 이야기가 줄거리다. 승리는 페르세우스의 것이고, 그는 신들의 세계인 올림푸스 신전이 아닌 인간 세계에서 살기로 선택한다.

바다속으로 빠지는 제우스 동상


신과 인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싸움. 각 진영의 장군은 지옥의 신 하데스와 반신반인 페르세우스다. 사실, 기독교인인 필자로서는 신과 인간의 '싸움'은 상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계시가 있고, 그것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니까. 분별과 순종을 추구했고, 회의와 반항은 멀리했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필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어서인지, 아니면 영화의 스펙타클이 주는 몰입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환영한다. 회의에서 건너 온 확신이 더욱 굳건한 믿음이 되곤 하니까. 
 

<타이탄>은 <아바타>의 명성에는 못 미쳤다.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는 아니었다. 함께 보았던 친구는 "<반지의 제왕>보다 논리적 연결이 엉성하다"고 했다. <타이탄>은 블록버스터 영화로서는 부족하지 않다. 스케일이 크고, 영화의 장면이 되는 공간들은 '저긴 어디지?'라는 질문과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주요 볼거리들이 모두 섬세하게 만들어져 엉성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아바타>와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바타>의 주인공(샘 워싱턴)이 다시 한 번 페르세우스 역으로 주연을 맡았다는 점 만이 비교할 만하다. <아바타>의 감동과 메시지가 훨씬 깊고 울림이 크다. 나에게 <아바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기반을 돌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소한 성찰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받은 메시지다. 다른 이들이 받은 메시지는 나와 달랐다. 이것은 곧 <아바타>가 메시지 확장이 열려 있는 영화란 의미다. 볼거리는 물론이고, 공감까지 자극하는 영화였다.
 

올림푸스 신전의 신들


그에 비해 <타이탄>은 매력은 볼거리 속에 숨겨져 있다. <아바타>를 압도하는 수준의 영상은 아니다. 메두사, 올림푸스 신전, 거대한 전갈 등은 볼만 하지만, 경탄이나 아름다움까지는 아니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타이탄>의 중요한 메시지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다. 이 점에서 생각을 자극하기는 했다. 신화에서의 신은 개신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개신교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인격적으로 온전한 분이시다. 반면, 신화 속의 신들은 하나씩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의 '싸움'이 일어날 만한 신이고,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중에서 어느 곳이 더 살만한 곳인지 고민해 볼 만한 신이다.

영화 속의 기이한 괴물들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지 정답이 아니다.


필자는 <타이탄>의 장엄한 스케일, 신화 속의 신들을 표현한 방식 등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신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얻은 약간의 철학적 단상들이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님은 신화는 정답이 아니라 '질문'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신화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신화에서는 회의를 얻어 오면 된다. 질문에 대한 답은 삶의 현장 속에서, 인류의 지혜 속에서, 약육강식의 자연사 속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어제까지의 역사와 오늘의 현장 속에서 말이다. 때로는 정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라고 회의한 그의 질문 때문이지, '물'이라는 대답한 정답 때문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는 무엇인가?
신에게는 인간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 내가 얻은 질문들이다.

"서로 싸우게 하여 우리로 돌아오게 하라."
- 제우스가 동생 하데스의 인간 공격 명령에 찬성하며

"인간을 창조하셨으면서도 인간을 모르시는군요."
- 페르시우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한 말.


필자의 마음에 남아 있는 몇 마디의 대사를 인용해 하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영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형 제우스에게 인간을 공격하겠다는 허락을 얻을 때, 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싸우게 하여 우리로 돌아오게 하라." 제우스의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의 화해였다. 제우스는 인간을 자신에게 돌이키기 위해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의문이 생긴다. 선한 목적을 이뤄가는 수단이 부당할 때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지혜로운 선택을 알지는 못한다. 분명한 것은, 목적만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합의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페르세우스는 신이 인간을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상대를 이끄는 선의가 폭력적일 때가 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한 채 이끌 때다. "인간을 창조하셨으면서도 인간을 모르시는군요."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을 모를 수 있음, 지적한 것은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아이를 잘 모르는 부모님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자녀 교육의 지혜도 어려운 문제다.

"제게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어요."
- 페르시우스가 올림푸스 신전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며.

아들에게 동전을 건네는 제우스


영화에서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 페르세우스에게 2번 초대한다. 신들의 세계 올림푸스 신전으로. 아들은 2번 모두 거절한다. 두 번째 거절을 하면서 "제게 필요한 것은 여기 다 있어요"라고 말한다. 신화에서의 신과 종교에서의 신은 능력과 인격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페르세우스의 신념을 현대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중세, 이성과 과학기술에 있다고 믿었던 근대, 그리고 다원성을 중요시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구원과 행복, 신과의 적합한 관계는 중요한 문제였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졌는가? 신만이 채울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인간 세계에 필요가 모두 있는데, 사람에 따라 발견하거나 못하거나의 차이인가? 고민해 볼 일이다.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되렴."
- 제우스가 아들 페르시우스를 인간의 땅에 남겨둔 채 승천하기 직전에 한 말.


제우스는 2번에 걸친 아들의 거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올림푸스 신전으로 돌아가기 전, 아들 페르세우스에게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돼"라고 말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다운 성품과 권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신의 세계를 버리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남겠다는 아들에게 신보다 나은 존재가 되라고 하는 말은 내게 울림이었다. 오만하지 않은 겸손의 말이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아들에게 보내는 사랑과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타이탄>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고민하는 이에게는 고민꺼리를 줄 수 있다. 그러니 신에게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볼거리 이상의 메시지는 없다. 이것이 <아바타>와의 차이점이다. <아바타>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울림 있는 메지시를 준다. 사랑, 자연, 더불어 살기, 소통 등에 대하여. <타이탄>은 잘 만든 영화지만, 아바타가 가진 메시지의 확장 면에서 2%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영화의 메시지들이 좋았다. 기독교 세계관과는 맞지 않아 필자의 견해와 달랐지만 말이다. 다르다고 하여 영화를 두고 괜히 흥분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생각을 하고 싶다. 신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인생과 나에 대하여.


※ <아바타>를 통해 3D 영상에 매료되셨더라도, <타이탄>의 3D를 추천하지는 않는다.
    3D 대중화를 일궈 낸 <아바타>와는 다르다. 혹자는 말했다. "어찌 대사만 3D로 나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