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클릭했다. 인터넷은 또 하나의 세계다. 지구촌에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있듯이, 인터넷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국가의 경계는 희미하고 민족의 경계만 남았다. 민족의 경계가 남은 것은 언어 때문이다. 언어만 다를 뿐, 인터넷에서 하는 일들은 나라마다 비슷하리라. 포털 사이트를 열고 '눈에 띄는' 기사를 클릭하거나 메일을 확인하는 일들 말이다. '눈에 띄는' 기사란,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거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들이다. 그런 기사는 잠깐의 시간이 흐르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것들도 많다.
삶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인터넷 세계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메일이나 SNS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과 친밀함을 나누고, 업무과 공부에 필요한 자료들과 벗하며 노니는 것이다. 삶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인터넷 세계에도 있다. 어쩌면 인터넷에서의 민족은 나라별이 아니라, 인터넷을 활용하는 형태별로 나뉘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을 삶의 유용한 도구로 이용하는 효과만점활용족, 음란채팅사이트를 돌며 여자를 건지려는 건들건들헌터족,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인터넷에서 떠도는 하릴없는방랑족 등은 나라를 초월한 인터넷 동족들이라 할 수 있겠다.
글의 서두에서 날짜를 밝힌 것은, 그날(1월 12일_ 포털 사이트의 첫 화면에 비슷한 기사가 여러 개 떴기 때문이다. '지구 멸망'에 관한 기사였다. 눈이 가긴 했지만 손이 가지는 않았다. 기사를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오해는 마시라.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사람이 되고자 세상 일에 관심 가지려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삶의 질과 사회적 이슈를 다룬 기사는 클릭해 보는 편이다. 지구 멸망은 여러 가지 더듬이로 건드려 보아도 걸려 들 만한 유용한 정보도, 필요한 지식도 아니라 생각했다. 다만 출근하면서 이런 생각은 했다. 며칠 동안 이슈가 되면, 글이나 하나 써야지. 지구멸망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다.
어쨌든, 하루가 지났다. 오늘 나는 '지구멸망'을 다룬 하나의 기사를 읽었다. 주요 내용은 "최근들어 세계 곳곳에서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연이은 기이한 현상에 네티즌들은 이를 '지구종말의 징조'라고 여기고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8일 중국 장춘시에서 3개의 태양이 목격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최근 동물들의 떼죽음 이야기 등을 근거로 들었다. 기사는 "또한 미국 북미방위사령부 장교 출신인 풀럼(사망 당시 87세)도 2010년 9월 UFO연구서적 ‘변화의 도전’에서 “2011년 1월 첫째주와 둘째주 사이에 거대한 UFO가 나타나며 이 UFO가 1주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문 뒤 런던을 방문할 것”이라고 전했다."
[관련기사] 한경닷컴 bnt뉴스 <지구멸망 징조? 어디까지 믿어야 되나?>
관련 정보를 성실하게 수집한 기자의 노력과 균형잡힌 제목이 훌륭했다. 실제로 사진까지 첨부한 노력에는 살짝 감동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고 싶긴 했다. "그래서 어찌하오리까?"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제공한 정보였다거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제공한 정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인터넷 세상엔 정보가 넘쳐나는 곳이고 내가 클릭하여 읽은 것이니까. 그러니, 뭔가 바꾸려면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혜안이다. 제대로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정보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에 대한 지각있음'이다.
다른 기사 하나를 더 읽었다. 이 기사에는 노력에 대한 감동 같은 것도 없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뚜렷한 지구멸망 징조에 사회 각 분야 전문가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자는 사실보다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신가? 나는 궁금하다. 과연, 우려하고 있는 사회 각 분야 전문가가 누구신지? 어떤 전문가가 지구 멸망 때문에 자신의 본업을 잠시 내려놓고 우려의 말을 하느라 시간을 보내시는지 궁금하다. 만약, 전문가들이 우려한다면 지구가 멸망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구멸망설 그 자체를 향한 것이거나, 지구의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우려할 것이다. 나 역시, 동물들의 떼죽음에 대해서는 떨리고 두렵다. 종말이 아니라, 환경 오염에 심각성을 더해만 가는 사람들의 행태가.
[관련기사] 데일리안 이충민 객원기자님 <지구멸망징조, 음모론 아닌 역사적 진실?>
전문가의 이름이 거론된 게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라 했으니 실체가 없는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상투적인 이 한 문장에 관심을 잃었지만, 끝까지 기사를 읽었다. 첫 문장이 전체의 수준을 보여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는 말은 속담일 뿐, 세상사나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번 기사는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니, 기사의 마지막 한 줄은 첫 문장을 뛰어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 심한 날씨와 상상을 초월하는 폭설, 이전과 규모가 다른 자연재해, 실체가 뚜렷한 거대 UFO 목격담, 예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2012년 지구멸망 예고한 일 등을 종합해 볼 때, 지구멸망징조는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엔 매우 찜찜한 게 사실이다." 나 역시 감정에 기운 서술에 매우 찜찜하다. '종합'이란 말은, 여러 가지 견해를 한데 모아 합하는 것을 말하지,한 가지 견해만을 합할 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기자는 "러시아 일간지 <프라우다>가 지난달 5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보리스카는 2011년 한 대륙에서만 세 차례의 엄청난 재난이 발생할 것이며 2013년에는 더 큰 재난으로 전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말도 전하며, "특히 보리스카의 예언은 적중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불안감을 더한다"고 덧붙였다. 감정적으로 불안감을 더하려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본인께서 정말 '찜찜'하고 '불안'하시어 그러셨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왕 종합하신 터에, 지구멸망설의 부침에 대한 이야기도 종합해 주시면 좋았을 것이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호기심 어린 제목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내가 직접 조사하려다가 관둔다. 만약, 오늘자 포털사이트의 첫화면에도 지구멸망이란 단어가 보이면, 1992년 휴거설부터 시작하여 글 하나 쓰려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강력했던 지구멸망설이 떠돌았던 1992년의 휴거설을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이다. 아닌가? 사실, 나만 지구멸망에 당혹스러워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다행히도, 오늘자 포털 첫화면엔 '지구멸망' 얘기가 어디에도 없었다. 숫자로 된 포털 첫화면 전환을 모두 검색해 보아도 없다. 그럼 그렇지, 라는 한 숨과 함께, 약간의 화가 난다. 겨우 '일일천하'로 끝날 기사였단 말인가. 내 예상보다 파워가 약하여, 괜히 이 글을 썼구나 싶기도 하다.
약이 올라, 포털 검색란에다가 '지구멸망'이라고 썼다. 어제 올라왔던 기사 사이에 오늘 올라 온 기사가 있다. <새떼 죽음, 지구 멸망 징조 아닌 알콜 중독>이라는 제목부터 반갑다. 여느 때 같으면, 제목만 읽었을 테지만, 포스팅하는 중이라 클릭하여 읽었다. 내용은 기대한 대로였다. 새떼 죽음은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의 짓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읽어 보시라. "20세기 말 이후 잠잠하던 지구종말론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가운데 지구 멸망징조로 관심을 모았던 동물들의 떼죽음에 대한 원인 규명이 일부 이뤄졌다. 지난 8일(현지시간) 루마니아 콘스탄차의 한 공원 근처에서 찌르레기 5000여마리가 바닥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당국은 조류인플루엔자(AI)를 의심했으나 조사결과는 달랐다. 찌르레기들은 양조장에서 와인을 만들고 버린 포도찌끼를 먹고 알코올 중독으로 떼죽음에 이른 것." 어느 기자인지 반가워서 이름이나 보자 했더니, 아쉽게도 매일경제 뉴스속보부란 말만 있었다.
이 글은 3가지의 하고 싶은 말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이왕이면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나의 블로그 애독자 분들이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나, 날마다 인터넷 포털에 올라오는 호기심 만점 기사의 유용성을 묻고 싶었다. '일일천하'만을 누리는 유효기간 하루짜리 기사라면, 우리가 그런 기사를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유쾌하고 즐섭게 한다면, 좋은 일이다. 나는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생산주의적 관점만을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호기심을 유발하는 기사가 여러분들에게 유희적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 이 역시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우리는 인터넷의 자극적인 기사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네들의 명예와 부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절망할 일이 아니다. 나 역시도, 그리고 이 글을 읽어 준 (고마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러니 한탄할 일이 아니고, 우리의 시간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일이다. (대처 방법에 대해서는 언젠가 기회 되면 쓰거나, 책으로 낼 생각이다. 언젠가! ^^)
두울, 기사 중에는 감정과 사실이 뒤범벅된 기사도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기사로부터 사실을 얻어내려는 노력이다. 저널리즘의 기본은 사실을 따지는 것이다. 의견을 전할 순 있지만, 사실과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 김 훈 선생이 그토록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강조한 것은 그가 기자 출신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 참조) 저널리즘 글쓰기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이고, 독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오늘 내가 인용한 기자님의 모든 기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구멸망징조, 음모론 아닌 역사적 진실?>
라는 기사는 감정적인 데다 독자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쓰인 글이다.
세엣, 지구 멸망의 소식이 들려와도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자.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철학자처럼 말이다. 세상을 잃으면 어떠랴? 그것이 정말 종말이라면, 속 시원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나만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의 종말'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비교와 경쟁에 물든 사람들 아닌가! 지방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던 부인이라도 강남에 사는 친구와 전화 통화 한번 하면 불행해진다고 한다. 비교함에서 불행이 왔으니, 비교함에서 행복도 오지 않을까? 혹시 아는가? 종말의 순간에 옆집 사람보다 1초 후에 죽을지! 그 찰나의 행복을 만끽하자.
베베 꼬아 말했지만, 심사가 뒤틀린 것은 아니니, 말을 끝낼 때가 되었나 보다. 하고픈 말은 이것이다.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움직여야 한다. 세상을 잃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지만, 한 철학자는 위험은 또 있다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세번째 하고픈 말을 대신한다. "스스로를 잃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큰 위험이건만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소리도 없이 벌어진다." 우리의 시간이 인터넷 기사를 읽느라 소리없이 사라지듯이.
제목의 거창함과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너무 일상적이고 소박하다고? 보보도 낚시했네, 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의도한 것이니까. 일상은 중요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24살 봄이었던가?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일주일 프로젝트>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7일 후에 죽는다는 가정으로 일주일을 살아 본 것이다. 그 때 놀랐던 것은 내가 매우 소소한 일상을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고 싶어했고, 소중한 이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상이 중요하다! ^^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
'™ My Story/세상만사 톡톡Talk'에 해당되는 글 4건
- 2011/01/14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들 (2)
- 2011/01/12 이대호가 멋있는 3가지 이유 (8)
- 2010/03/24 NO.1 이 아니어도 좋다 (2)
- 2009/08/21 구루가 알려주는 평생 학습 노하우 (4)
"정말 힘들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2010년 프로야구의 MVP에 빛나는 이대호가 연봉조정 신청을 하고 나서 한 말이다. 이대호가 누구던가? 지난 해, 세계 최초로 9경기 연속 홈런을 쳤던 사나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경이로운 기록이긴 하나 팀 성적과는 무관할 수 있다. 프로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팀 공헌도다. 이대호가 대단한 것은 이 점에서 더욱 빛난다는 것!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타격 7관왕을 했다. 당연히 타점도 1위니까 팀 공헌도 역시 최고다. 그야말로 슈퍼스타다.
이에 화답(?)하여, 구단(롯데 자이언츠)은 "이승엽과 같은 대우를 해주기로 했다"며 이대호의 2011년 연봉으로 6억 3천만원을 제시했다. (이승엽은 2003년 삼성과 연봉 6억 3천만원에 재계약하여 프로 9년차 역대 최고연봉을 기록한 바 있다.) 여기에 이대호는 "7억원 밑으로는 사인하지 않겠다"는 소신을 밝히며 연봉조정 신청을 한 것이다. 자부심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연봉조정 신청이란 게, 과일 가게에서 웃으면서 "에이 아주머니 사과 하나만 더 얹어 주세요"라고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는 차원이 아니다. 구단과 선수에게 매우 조심스럽고,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연봉협상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도 있다. 회사에 다닐 적 일이다. 어느 해, 회사는 그해 최대 연봉인상률 폭을 15%라고 못 박았다. 직원들은 '넘지 말아야만 할 것 같은 그 선'을 감안하여 자신의 연봉협상에 들어갔다. 나는 어땠냐고? 공기업도 아닌 사기업에서, 그것도 실적으로 평가받는 영업부서에서 그게 말이 되냐고 분노했다. 두 가지 마음이 갈등했다. 지난 해 나의 성과를 제출하며 30% 인상을 요구하려는 마음 vs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나는 용기를 냈을까? 안전 지향적으로 대열에 합류했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이후 회사 생활을 1년 더 했다는 것! 하하.)
요컨대, 이대호의 연봉조정 신청이 쉽지 않은 결정이란 말이다. 이런 일이 어디 이대호 뿐이겠는가. 우리 가슴 속에는 연봉협상 시즌 때마다 조직에게 못다한 말이 있지 않은가. 원래부터 세상은 과소평가가 만연한 곳인지도 모른다. 2,500년 전 공자도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제후들을 만나 자신의 인(仁)과 예(禮)에 기반한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제후들은 공자를 등용하지는 않는다. 결국 13년 간의 여행을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과 저술에 전념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논어』 학이편의 이 구절은 공자의 삶, 다시 말해 자신의 학문을 현실 정치 속에서 펼치지 못했던 그 여행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대호에게 공자 말씀을 전하며 참으라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저 말씀은 개인의 수양 차원에서 필요한 말이다. 사회 구조적인 부조리에는 오히려 의롭게 분노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자기 목소리를 내야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받는 사회에서는 마냥 참아서는 안 될 때도 있다.
공자의 저 말씀이 필요한 이들은 자기성찰에 게으른 사람들이다. 왜 나를 몰라주지?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아 줄 만한 능력도, 성실함도 없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에게 공자의 원투 펀치를 전하고 싶다. One punch는 이미 말했고, Two punch는 학이편의 마지막 구절이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구구절절 공자 말씀을 인용한 것은 이대호의 용기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을까봐 염려해서다. 부디, 이대호의 치열한 연습량과 프로 정신부터 벤치마킹하시기를!
이대호가 멋있는 3가지 이유
자, 이제 이대호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나는 3가지 이유로 이대호를 높이 평가한다.
1)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연봉조정 신청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연봉조정 신청을 고민하던 후배 강민호에게는 "아직 연차도 어리고 금액차도 크지 않은 데다 개인 이미지에도 해가 될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을 막연히 이상적으로만 본 게 아니라, 힘들고 조심스러운 사안임을 알면서도 용기를 낸 것이다. 이대호는 한 인터뷰에서 "나도 더 어리거나 했다면 구단 입장을 고려해 조정신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난 이제 해도 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동료들도 나를 응원해 줄 것"이라고 했다.
2) 그는 자신의 본업을 기억하며 무엇에 충실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대호는 연봉조정 신청을 한 1월 11일에도 팀 훈련을 정상적으로 소화했다. 연봉 조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해야 할 훈련에 임한 것이다. 그의 머릿 속에는 연봉협상 타결이라는 당장의 사안도 들어 있겠지만, 2012년 시즌에 대한 비전도 들어 있을 것이다. 자신이 프로 야구 선수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훈련에 임하는 성실을 잃지 않았다. 다음 기사를 보라. "그는 당초 연봉 협상을 조기 마무리한 뒤 15일 사이판으로 건너가는 투수·포수조와 함께 출발해 다른 야수들보다 5일이라도 빨리 따뜻한 곳에서 몸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3) 이대호 선수 아내 역시 남편을 훌륭히 도운 듯하다. (이건 그의 아내 이야기지만, 부부는 하나라는 관점으로 이대호의 멋진 이유에 넣었다.) 아내는 연봉조정 신청을 말렸다고 한다. 이대호 선수의 말을 들어 보자. "아내도 처음부터 말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신청했다고 하니까 되레 힘을 주더라." 과대해석일 수도 있지만, 그의 아내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자신의 생각을 남편에게 조심스레 전했으리라. 남편의 합리적인 판단을 도우려는 의도였으리라. 이것은 남편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의 노력이었고, 남편의 결정 후에는 이대호의 결정을 존중하고 오히려 힘을 실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어떤 말을 했을까?
협상의 결말이 궁금하다
협상이 어떻게 종결될지 궁금하다. 배재후 단장은 "추가 협상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선수 요구액(7억원)을 받아들이긴 힘들다"고 단정했단다. 구단 측의 주장은 억측이다. 이승엽과 같은 조건의 협상이란 말은, 그간의 시대 흐름을 고려하지 못한 '그저 듣기 좋은 말'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발빠른 기자는 이승엽 당시와 지금의 물가 상승률을 비교한 기사를 썼다. 기사에 따르면,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를 환산기준으로 잡을 때 2003년의 화폐가치는 2009년의 1.201배다. 따라서 2003년에 이승엽이 받았던 6억3천만원은 2009년에는 7억5천663만원의 가치를 지니고 작년의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조금 더 많은 금액이다. 거꾸로 환산할 때 2009년 6억3천만원은 2003년 돈으로는 0.833배가 되면서 5억2천479만원으로 쪼그라든다."
"롯데는 연봉액을 제시하면서 개인과 구단의 성적, 프로야구 연봉시장의 규모, 동료가 이대호의 연봉인상에서 느낄 상대적 박탈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혔"지만, 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 이대호 선수의 연봉조정 신청을 보며, (그의 용기있음에) 환영하고 (나도 용기를 발휘하고 싶어) 흥분하고 (용기를 낸 도전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용기를 내기에 앞서 '최고의 선수'가 된 이대호 선수의 프로다움이 멋지기도 하다. 롯데 팬들은 10억이라도 주고 싶을 것이다. 최고 연봉액을 받는 최고 실력의 선수가 우리 팀(내가 응원하는 팀)이라는 사실은 팬의 자부심이기도 하니까! 문득, 스타 플레이어가 드물다고 농구계를 걱정하는 허재 감독의 표정이 떠오른다. 스타는 선수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탄생하는 것이지만, 구단의 지원이 그 스타를 더욱 빛내 줄 수 있음을 롯데 자이언츠는 모르는 것인가!
[관련기사]
스포츠 동아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아내는 말렸지만... 때가 됐다>
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jangje@yna.co.kr <이대호 연봉, 물가에 비춰보니>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
NO.1 이 아니어도 좋다!
어제의 자신을 뛰어넘었다면.
-보보의 벤쿠버 올림픽 간헐적 관람기
그야말로 전국민의 관심이었던
김연아 선수의 경기 장면을 제외하곤
이번 벤쿠버 동계올림픽을 자주 보지는 못했다.
언론에서 '중요한 경기'라고 소개하는 경기들은
금이냐, 은이냐를 가르는 결선 경기였다.
간혹 예선 경기중에 중요한 경기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유력한 금 후보가 또 다른 유력 금 후보를 만난 것이었다.
'중요함'의 기준은 다분히 '금'과의 접근성이었다.
사실, 그들의 금은동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더 엄밀히 따지자면 올림픽도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다.
나는 나대로 살 것이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와 무관해,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의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작가를 꿈꾼다. "작가는 세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수잔 손택의 견해에도 동의한다.
나 또한 세상 일에 무관심한 편은 아니니까.
사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내 삶의 중요성' 여부가 아니라,
벤쿠버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을 포함한 '개인들의 삶의 중요성'이다.
지난 2월 2일, 벤쿠버로 떠나기 전, 결단식을 가졌던 83명의 태극 전사들의 삶 말이다.
당시, 금메달 6개, 종합 10위를 목표했던 대한민국은 무난히 목표를 달성했다.
캐나다, 독일, 미국, 노르웨이에 이은 종합 5위!
일본은 끝내 No Gold 로 대회를 마감했다.
한일전 경기마다 나 역시 민족주의로 다져지긴 하지만,
그들의 이번 대회 성적에는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번 대회의 몇 장면을 지켜보며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행복감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빈약한 결과와 비교한 상대적인 만족이 아니다.
자기 신화를 이뤄낸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행복이다.
금메달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나는 볼슬레이 팀의 선전에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영화 <국가대표>를 떠올리게 했다.
올림픽 첫 출전으로 60년 썰매 역사를 지닌 일본을 제치고
결선에 진출하여 최종 성적 19위로 마감했다. (일본은 21위)
이것 역시 일본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열정과 저력 때문이다.
[볼슬레이팀 관련기사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3145523&isYeonhapFlash=Y]
나는 곽민정의 선전에도 무한히 기뻤다.
어린 소녀는 올림픽 첫 도전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을 넘어섰다.
대단한 선배 김연아처럼, 곽민정도 어제의 곽민정을 넘어선 영웅이었다.
점수를 받고 기뻐하는 곽민정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은 내게도 행복이었다.
한국 선수만 지켜 본 것은 아니다.
TV를 자주 보지 못해 올림픽 경기 자체를 많이 보지 못했지만,
틈이 나면 누구의 경기든 관심으로 지켜 보았다.
지켜 본 사람 중에는 크세니아 마카로바라는 피겨 선수가 있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55.38 의 시즌 베스트를 갖고 있던 크세니아 마카로바가
59.22 라는 높은 점수를 받으며, 1위를 차지했다. 그녀도 자신을 뛰어 넘은 사람이 되었다.
(아쉽게도(?) 그녀의 성적은 이후에 경기한 아사다 마오, 김연아 등에게 밀려났다.)
크세니아 마카로바는 좋은 체격 조건에다 화려한 기술의 조화로 참 아름다웠다.
우리의 김연아 선수가 이보다 더 잘한 단 말인가! 라는 생각에 감동적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김연아 선수의 뛰어남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모든 선수들을 응원했다.
혼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에는 그들과 함께 아쉬워했다.
혹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더라도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그것이 욕심일지라도) 시도하다
최악의 상황을 연출해 버린 이호석에게도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호석을 탓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어떤 논리 때문에 이호석 비방론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러던 차에 만난 동아대학교 정희준 교수의 글을 읽었는데
참으로 통쾌하고 명쾌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길.)
"올림픽 경기 중이라도 이호석 선수와 그의 담당 코치를 징계해야 한다"고도 했단다.
한국에 이렇게 정신 나간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솔직히 이런 분이 둘만 되도 참 문제다.
이런 분에겐 이호석을 대신 해 한 마디 해드리고 싶다. "네가 타라. 스케이트."
내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까닭은
스포츠 선수들이 모두 자신을 넘어서려는 치열함을 지닌 행동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올림픽 선수단에 포함된 83명을 모두 존경한다.
언론은 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올림픽 소식을 보도해 주었으면 했다.
2월 27일 모 방송의 저녁 뉴스에서 벤쿠버 소식을 전했는데, 김연아에 대한 보도가 주였다.
그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나는 주류에는 무조건 마음이 꼬이는 벤댕이가 아니다.
게다가 김연아에 대한 관심을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날이었으니.
다만, 다음 날에도 최고 이외의 소식을 전하는 데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쉽다.
어제 저녁 뉴스에 불편했던 뉴스 중 하나는 김연아 선수의 부상 소식이었다.
올림픽 출전 전에 부상이 있었고,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은 부상 투혼으로 얻은 값진 메달이라는 것.
뉴스는 긍정적인 사고의 힘이 메달의 공신이라는 표현으로 끝났다.
나는 생각했다. '부상을 안고 출전하는 것은 분명 부담이고
더 큰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허나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
성공은 실패를 앞세우고 온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부상 투혼은 위대한 승리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승리는 실패와 도전를 넘어선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김연아 선수의 부상 투혼 뉴스는
봅슬레이의 선전 소식 등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또 하나의 불편한 방송은 SBS의 <연아의 트리플러브>라는 특집 방송이었다.
토요일 종일 강연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청했지만, 방송을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였다.
(두 분의 아나운서 탓이겠냐만은) 아나운서 두 분은 김연아에 대해서도,
피켜 스케이팅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준 낮은 질문이 반복된 그 방송을 보신 분이 많을 것이기에 일일이 언급하진 않겠다.
(근거 없는 주장이 명예훼손이라도 될까 봐 관련기사 링크를 걸어둔다.)
[<연아의 트리플러브> 관련기사 : http://media.daum.net/entertain/view.html?cateid=100030&newsid=20100228103306934&p=starnews]
혹시라도 김연아라면 무조건 시청률이 높을 것이고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면 그야말로 저널리즘 정신을 상실한 태도다.
이번 벤쿠버 경기 중에 생방송으로 관람한 경기는 많지 않다.
이호석, 선수와 성시백 선수가 넘어졌던 바로 그 경기와
김연아 선수의 7분 경기가 전부다. 찾아서 본 경기는 김연아 선수 뿐이다.
쇼트와 프리, 두 개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맞춰 집에 들러 홀로 즐겼다.
뉴욕타임즈도 "이번 올림픽은 김연아의 것이었다"고 흥분했다.
나는 그것이 호들갑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 그녀는 여왕다웠다.
"힘들었던 기억은 많고 기뻤던 순간은 잠시 뿐이었다.
올림픽 챔피언, 해치워 버려서 기분이 좋다"고 말한 김연아 선수의 말 속에서
그간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녀의 메달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갑자기 김연아 선수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김연아 선수 안티가 아님을 전하고 싶은 게다.
나 역시 짜릿한 감동으로 김연아 선수를 지켜 보았고, 뜨겁게 환호했다.
다만, 나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는 1등에게만 박수를 몰아 주기보다는
위대한 승리자들 모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
나 역시 'No. 1'보다는 'Only 1'을 꿈꾸는 사람이기에.
이제 벤쿠버 올림픽은 끝났다.
김연아에게 보냈던 정성스런 응원과 눈물 섞인 간절함보다
더한 정성과 간절함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순간이다.
어제의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김연아처럼.
그리고
김연아에게 보냈던 응원만큼의 정성을 담아
82명의 태극전사들에게 전해 드린다. 잘 싸웠다고.
간절히 기원 드린다. 내일은 더 큰 선수가 되시라고.
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저술 활동과 강의 등 일 외에 나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여 3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2004년에는 명나라 시대의 중국 미술에 몰두했다. 일본에 관해서는 수묵화를 소장할 정도로 잘 알면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3년마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천천히 주의깊게 다시 읽는 것' 같은 일이다. 이는 몇 년 전에 끝마친 일인데, 나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발자크의 대표작인 <인간희극> 시리즈에 몰두했다.
-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 p.13
강연을 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직업에 천함과 귀함은 없습니다. 강사와 작가는 십여 년 전부터 꿈꾸던 직업이었음을 말씀드리는 게지요.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행운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허나, 저는 스스로를 '작가'라고 소개한 적은 없답니다. 아직은 작가라고 소개할 만큼의 글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외여행을 다녀 온 후에 귀국할 때 작성하는 세관신고서에는 직업란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곳에다 '작가'라고 쓸 날이 오리라 믿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비법은 없습니다, 성실한 노력이 아름다운 성과를 안겨다 줍니다. 어쩌면 나는 아주 단순한 비결을 전하기 위해 공부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럴 듯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지금의 내가 "성공으로 가는 길은 단순합니다. 자신이 걸어야 할 방향을 알고 그 길을 성실히 걸으면 됩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그건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 성공으로 가는 길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나는 그 비법을 찾아내고 말거야."
제가 지금까지 읽고 생각한 바에 의하면, 대가들이 전하는 비결은 단순하고 명쾌한 것이었습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비범한 것들은 우리네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비범한 사람들은 비범한 시각과 생각의 힘을 지닌 것이지, 우리와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회의적인 사람들은 진짜 성공의 요인을 감추어 둔 채,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는 까닭은 숨어 있는 진리를 찾아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진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지,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비결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데에 논리보다 화자의 명성이 중요한 경우가 많음은 아쉬운 일입니다.
산업교육 강사나 문필가로서 제가 명성을 얻게 된다 해도, 저는 지금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말을 할 것입니다. 아마 그 때도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할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다, 몰입하지 않으면 자기 재능을 발견할 기회조자 얻지 못한다. 몰입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자기를 발견하려는 이들의 핵심 활동이다 등. 지금보다 좀 더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제 말을 귀담아 듣겠지요.
드러커는 최고 지성의 단계에 오른 거장입니다. 그는 3년마다 공부의 목표를 세우고 집중적으로 독서를 합니다. 또한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여 3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생 자신의 지성을 연마한 방법입니다. 중요한 단어는 목표와 집중입니다. 목표를 세워라, 그리고 집중해야 한다는 말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들어왔던 말입니다. 늘 함께 하는 것들은 그것의 소중함을 종종 잊게 됩니다. 부모님, 친한 친구, 그리고 (식상한 표현이지만) 공기 등이 그렇습니다.
망각의 리스트에는 단순한, 그러나 훌륭한 교훈도 포함됩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 시간을 아끼라, 성실은 훌륭한 미덕이다 등. 그리고 드러커의 조언, 목표를 세워 집중적으로 공부하라까지. 평생 학습을 꿈꾸는 이들이 드러커의 평범한 조언을 금과옥조로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동기 부여는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삶의 변화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이론이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곳은 오스트리아 빈 외곽에 있는 드러커의 생가 앞입니다. 감회가 새로운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삶의 변화는 새로운 감회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드러커의 공부 방식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것입니다. 저는 변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으니까요.
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