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보는 2009년 2월 4일부터 3월 3일까지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왔답니다.
일정 중 2/3는 브라질(상파울로, 리오데자네이루, 이과수 폭포)에서 5기 와우팀원들과,
1/3은 캐나다 벤쿠버에서 홀로 여유롭게 보내었지요.
브라질 여행은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개인사가 되었고,
팀원들과의 소중한 이야기를 공유하게 된 아름다운 추억이었고,
여행의 순간 순간마다 삶의 지혜를 얻은 인생수업이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와우팀원들과 함께 진행된 3차례의 수업과 강연이었습니다.
수업을 진행하며 저는 팀원들의 삶에 감동하며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배웠습니다.
보보의 해피레터 11편은 브라질 여행 중에 느꼈던 몇 가지 단상입니다.
팀원들에게서 배우고, 여행을 통해 배웠던 것에 대한 소박한 나눔입니다.
#1. 지금 만나고, 지금 말하고, 지금 행동하라
눈물 흘리며 들었던 이야기 하나.
브라질로 이민을 온 엘라는 타국에 계신 어머니께 때마다 용돈을 보내 드렸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하니 마음이라도 정성스레 전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엘라는 어머니의 옷장을 정리하다 엉엉 울음을 터트린다.
어머니의 서랍에서 나온 양말 뭉치 때문에.
양말 하나 하나에는 그녀가 보내 드린 달러 뭉치가 들어 있었던 게다.
하나도 쓰지 않고 고이 모아 두셨나 보다. 꽤 많은 돈이었다.
그 때가 생생히 기억나는 듯, 엘라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엄마에겐 함께 해 주는 딸이 필요했던 거였어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 『인생수업』 中에서
#2. 존재하는 법 VS 일하는 법
브라질로 떠나기 며칠 전에 접했던 다소 울적한 기사 하나.
한국이 OECD 국가 중에서 연간 노동시간이 최고로 많다는 기사였다.
2위를 현격한 차이로 따돌린 압도적인 1위였다.
브라질 여행을 하며 느낀 점 하나.브라질 사람들은 시간을 느긋하게 보낸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서는 매 시간마다 어떤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여유로웠고, 미래를 향한 생각은 낙관적이었다.
근거 없이 미래를 낙관하며 태평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리석다고 한다면,
목적 없이 분주히 살며 오늘의 미소와 행복을 잃어버린 것 역시 어리석다고 응수하겠다.
나는 균형을 말하고 싶은 게다.
생산성 있는 삶과 의미 있는 삶의 균형,
일하는 법과 존재하는 법의 균형.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항상 생산적이고 성공적이어야 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립니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일하는 법은 알지만, 존재하는 법은 잘 모릅니다."
- 『인생수업』 中에서
#3. 좀 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단상들
나는 결혼 생활을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생각한다.
- 점점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
- 서로의 상처를 깨닫고 이해하며 치유해 나가는 과정
-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수용해 나가는 과정
(과정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완성의 단계가 없음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에게 위로와 지속적인 용기를 주기를.)
독립적이지 못하면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의존함이 지속되면 상대를 구속하게 된다.
자유와 존엄성에 압박을 주게 된다.
홀로 잘 살아가는 동시에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호의존성을 발휘해야 한다.
두 개인이 모두 독립성을 가져야만 상호의존성에 이를 수 있다.
좋아함은 기쁨이지만 사랑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상대를 구속하려는 태도, 배우자에게 배우기보다는 상대를 교정하려는 시도,
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바라보는 시각, 이 모든 것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배우자를 보며 ‘당신과 나는 참 다른 존재군요’라고 느껴지는 순간은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다양성과 조화를 배우는 축복의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알고 다름이 아름다운 조화의 핵심임을 배워 간다면,
틀어졌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한다.
머지 않아, 내가 받은 상처만큼이나 나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깨닫는다.
결국 서로가 상처를 주고 받았음을 깨닫게 되면 이해가 시작되고 치유가 진행된다.
결혼한 상대를 배우자라고 부른다.
서로 서로 배우자는 의미로 이렇게 부르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결혼 생활이야말로 인생 수업의 장(場)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면 아껴줄 수 있고,
아껴줄 수 있다면 사랑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툴 때면
당신은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당신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사랑을 거두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당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인생수업』 中에서
#4. 자신의 자랑스러운 개인사를 칭찬하기
45년 전의 어느 날, 한국 최초의 브라질 이민자들이 배를 탔다.
새로운 땅에서의 삶을 꿈꾸며 한 달이 넘는 뱃길을 달려 브라질에 이르렀다.
긴 시간 배를 타면서, ‘한국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렵겠구나’라는 절박함을 느꼈으리라.
절박함으로 도착하였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어로 된 포르투갈어 사전도 없던 시절,
날마다 온 몸으로 부딪쳐가며 언어를 익혔다.
낯선 땅에서 맨손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시작한 것이다.
45년 동안, 한국인들은 브라질 의류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일궈 냈다.
의류 소매업계의 40%를 한국인이 장악했고,
경제적인 성공을 일궈 낸 이들도 많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성공은
지난 시절 그들의 치열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주 감동에 젖었다. 아니, 전율했다.
가장의 사업 실패로 인한 가족 전체의 이민 결정을 따라
브라질로 온 소녀는 이제 중년이 됐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 이민을 떠난 어느 부부의 아들, 딸들은 이제 서른 살 어른이 됐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한국의 브라질 이민사도 튼튼해졌다.
젊은 날들을 오롯이 이민 생활의 정착과 성공을 위해 바친 그들의 삶은 감동이었다.
자신의 열정과 꿈보다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홀로서기에 바쳐진 젊은 날들의 희생은 고귀했다.
중년 즈음에 느껴지는 자기 상실감을 느끼기에는
지난 날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들이 자기 삶의 훌륭한 대목을 진정 스스로 흐뭇하게 바라보기를 원했다.
아름다운 자기 생의 모습을 바라 보며 스스로 칭찬하고 사랑해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얻은 힘으로 앞으로의 날들을 더욱 찬란하게 빚어가기를 바랬다.
그들 모두는 자기 삶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한 챔피언이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신의 좋은 점을 깎아 내리거나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헌신적이고, 베풀고,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자신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자선 단체 대표에서 성직자들까지,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까지,
자신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인생수업』 中에서
[PS] 들은 바에 의하면, 브라질로 이민을 간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성공 뒤에는
사람을 피부 색깔로 차별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브라질 국민들이 있었다.
또한, 101년 전에 먼저 브라질 땅을 밟아 동양인의 인식을 가꾸어 준 일본인들이 있었다.
먼저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다음으로는 일본인들에게 고마움이 든다.
역시, 우리는 서로 얽혀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사는가 보다.
#5. 삶의 배움을 얻다
덩치가 큰 그는 비행기 좌석을 두 개에 걸쳐 앉았다.
몸이 아주 불편하여 거동하기도 쉽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데에만 10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선반에서 짐을 끄집어 냈다. 작지 않은 가방이었다.
나는 그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와 드릴까요?"
그는 단호함과 다정함을 섞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나를 쳐다보며) 고마워요."
그는 어느 친절한 청년의 호의를 거절했다.
자신이 들어야 할 삶의 무게는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그 무게를 포기하면 자신이 점점 연약해진다고 믿는 것처럼.
그는 자기 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매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으며 비행기에서 내려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걸었다.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지만, 아내도 그도 각자 자신의 짐을 들고 있었다.
나는 호의를 베푸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진정으로 그를 돕는 데에는 실패했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인생수업』 中에서
#6. 넓은 가슴으로 다른 이들을 이해하기
욕조에 몸을 담그거나 샤워를 하고 난 후,
전신타월로 몸을 감싸는 기분은.. 참으로 좋다.
전신타월은 몸에 묻은 물기를 순식간에 닦아 내어 한기를 느끼지 않게 한다.
뽀송뽀송한 큰 타월이 내 온 몸을 감쌀 때의 포근함이 좋다.
몸을 감싸고 나와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울 때의 기분은 상쾌함 그 자체다.
좀 유치한 표현이긴 하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전신타월과 같은 사람이고 싶다.
친구와 아내의 눈물을 닦아 주고,
편하게 나에게 기댈 수 있는 넓은 가슴의 사람이 되고 싶다.
항상 뽀송뽀송한 기운을 전해 주어 그에게 살아갈 힘을 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살아가다 다툴 때에라도 나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태도를 따지기보다는
그저 넓은 사랑으로 그의 눈물을 이해하고 싶다.
“우리가 마음을 닫고 편협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전화를 걸지 않는지,
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오해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 『인생수업』 中에서
#7. 삶의 목적을 기억하기
브라질에서 보낸 일정은 마치 짧은 인생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보름이 넘는 일정이니 꽤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여행의 목적보다는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에 온통 관심을 빼앗겼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구경할 것도 많았고, 새롭게 듣게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내게는 열흘도 더 남아 있었다. 안심할 만했다.
그 짧은 브라질 일정에서도 친해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내가 해야 할 책임도 새롭게 생겨났다.
두 번의 강연 계획이었는데 하나가 추가된 것이다.
즐겁고 영광스런 일이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었다.
이렇게 새로 떠 맡은 일을 하는 사이,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사이에시나브로 여행의 일정이 2~3일만 남게 되었다.
인생은 왕의 명령을 받고 외국으로 파견된 사신의 역할과 같다.
모든 것을 둘러보더라도 왕의 명령을 받들지 못했다면,
고국으로 돌아가서 왕에게 전해 올릴 이야기를 갖지 못한 것이다.
구경도 하지 말고, 사람들과 관계도 맺지 말자는 게 아니다.
왕의 명령을 완수해야 하는 것처럼, 자기 인생의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삶은 목적을 어지럽히는, 그럴듯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이번 여행의 목적은 와우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브라질 와우팀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A님과
커피 한 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강연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먼 길 오신 김에 강연을 해 주면 어떠한지요?’라는 제안에 화답하여 진행된 것이니.
새롭게 맺은 관계는 뜻밖의 아름다운 선물이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니었다.
일정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에야 A님과 차 한 잔의 여유를 갖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목적 하나를 놓친 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너무 늦지 않은 즈음에 깨달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즐거운 대화 시간을 가졌다. ^^
나는 이 글을 벤쿠버의 한 호텔에서 신나게 작성하고 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떠오른 단상들이 술술 쏟아져 나와 반가움으로 글을 썼다.
3월 2일 새벽 4:49분을 지나고 있다. 새벽 미명이 밝아오기 전이다.
내 인생에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기억될 여행이.. 이렇게 저물고 있다.
부디 나의 하루 하루가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길.
날마다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까지도 특별하게 처리하여 빛나는 순간들로 창조해 나가길.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를 잡아 빛나는 일상으로 빚어 내길.
여행의 마지막 순간이 되니,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얼마나 열심히 여행했는지, 얼마나 웃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용기를 내어 나 자신으로 시간을 보내었는지.
여행은 꼭 삶을 닮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여행은 인생 수업이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더 진실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진정한 자신이 됩니다."
- 『인생수업』 中에서
- 2009년 3월
글: 리더십/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컨설트 ceo@younicon.co.kr
'♣ 여행이야기/낭만 유럽여행'에 해당되는 글 69건
- 2011/08/27 여행은 인생 수업입니다 (32)
- 2010/08/22 그리스 터키 여행의 4가지 의미
- 2010/08/21 발을 씻고 자미에 들어가다
- 2010/08/19 니케아 종교회의 성지를 찾아서 (2)
- 2010/08/19 볽은 태양을 바라보며 (2)
- 2010/08/18 술탄아흐메트에서 저녁 식사를!
- 2010/08/16 홀로 시작하는 여행 (17)
- 2010/05/04 『파우스트』의 무대였던 술집에 가다
- 2010/04/12 행복한 인생살이의 비결 (3)
- 2009/09/30 End는 또 하나의 And (4)
그리스와 터키로, 또 하나의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까지의 해외여행 경험을 헤아려 보니 약 220여일 동안 18개국을 다녀왔다.
다녀온 나라는 정확히 기억하나, 여행 일수는 대충 가늠한 수치다.
지금까지의 해외 여행을 제대로 정리해 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행히도 여행 때마다 최소한의 기록을 남겨 두었으니
그간의 기록을 살피며 해외여행 체험들을 정리해야겠다.
그저 '다녀왔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기에.
이번 여행은 그간 체험하지 못한 경험들이 많았다.
32명이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도 있었고,
여행 막바지에 홀로 며칠을 지냈기에 가능한 것도 있었다.
서로 다른 방식과 모순된 가치를 조화시키는 것이 자기경영의 묘미다.
정신과 물질의 조화, 준비와 즉흥의 조화, 고독과 어울림의 조화.
1) 이번 여행의 백미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을 방문한 것이다.
델포이 신전과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두 눈으로 보았던 그 순간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
여행은 앞으로 그리스 신화와 문화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까마득히 먼 나라, 나의 인식 저 너머에 있던 델포이와 파르테논을
이제는 눈 앞에 선명히 그녀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2) 크루즈 여행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4박 5일간의 꿈같은 크루즈 여행은 말로만 듣던 꿈의 여행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크루즈 여행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여행하는 방식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또한 가장 여유롭고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크루즈에서 머물던 순간들을 더욱 즐기지 못했던 점이다.
다양한 프로그램 중 하나 정도는 참여해 볼 수도 있었고,
더 좋은 크루즈를 보며 부러워하는 대신에 나의 현재에 흠뻑 젖었어야 했다.
3) 이스탄불에서 보낸 시간은
이슬람을 이해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13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무슬림들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내 마음은 훨씬 열려 있었다.
무함마드의 훌륭한 인격과 삶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는 그에 대한 동경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들이 몰린 중동 지역은 석유 생산지이기에 많은 국가의 이권과 관심이 몰린 곳이다.
이곳에 얽힌 권력 구조를 모르고서 국제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나에게는 이런 국제적 정세에 대한 중요성보다 '이스탄불'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이스탄불은 로마 - 동로마 제국 -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가로지르는 대제국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역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역사 이해를 도와주는 장소에 가면, 나는 즐거워진다.
4) 더위 때문에 고생한 여행이기도 하다.
매우 무더웠던 여행이었다. 40도를 넘어가는 날이 여러 번이었다.
여행에서 날씨가 무척이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계절별로 여행하기 좋은 나라들이 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최악의 날씨를 경험하며 여행했던 적도 있었다.
지난 해 4월 태국 여행이 그랬다. 태국을 여행하기에 가장 안 좋은 달이 4월이란다.
앞으로는 더욱 환상적인 여행을 위해 날씨와 여행지의 문화까지 파악하여 떠나야겠다.
자미(이슬람 사원) 이야기를 쓰려는데,
문득 '낭만 유럽여행'이란 폴더와 자미가 어울리지 않음을 느낀다.
유럽에는 자미가 없다. 성당이 있을 뿐이다.
지난 해 두 달 가까이 유럽을 돌아다니며
도시마다, 마을마다 줄곧 방문한 곳이 성당이었다.
여행 중 만난 길동무 중 몇몇은
"이제 성당은 지겹다"고 할 만큼 유럽엔 성당이 많다.
이 말에 동의하지만, 유럽을 이해하고 유럽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성당을 지겨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성당마다 역사가 깃들어 있고, 기독교 없이 유럽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터키에 오니, 성당 자리를 자미가 대신하고 있다.
터키에는 성당과 자미가 결합된 형태도 있었고, (이즈니크의 아야소피아 성당처럼)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성당과 자미도 있었다. (이스탄불의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가 함께 존재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터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즐거움이긴 하나, 블로깅 하려니 폴더 분류가 애매한 것이다.
이것은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가 만든 고민이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위치하는 나라다. (아시아에 속하는 영토가 훨씬 많긴 하다.)
만약 이스탄불을 여행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터키는 아시아 여행에 넣었으리라.
허나, 나의 터키 여행은 이스탄불에서 시작되었고,
이스탄불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대륙에 걸쳐 위치한 도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서쪽은 유럽이고, 동쪽은 아시아다. (아래 그림 참조)
편의상, 이번 터키 여행은 유럽 여행에 편입하기로 했다.
특히, 터키에서 20km 떨어진 도시 이즈니크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그리스와 이스탄불 여행 말미에 붙은 짧은 여행임을 감안하여 유럽 여행에 포함하였다.
이즈니크에는 아야소피아 성당과 예쉴 자미, 그리고 이즈니크 호수가 볼 만하다.
성당과 호수에 대해서는 앞선 블로그에서 소개했고, 오늘은 예쉴 자미 차례다.
이즈니크는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안에 볼만한 것들이 몰려 있고,
서쭉 성벽에서 동쪽 성벽까지 1.2km 이니 20분이면 동서를 가로지를 수 있는 마을이다.
예쉴 자미는 시내의 중심은 아야소피아 교회에서 동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예쉴 자미는 1378년에 착공하여 1392년 오스만 제국의 3대 술탄인
무라드 1세 때 완공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것이 1392년이다.
'예쉴'은 녹색이라는 뜻이다. 예쉴 자미는 미나레의 색깔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지칭하는 터키어다.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나레는 첨탑을 의미하는데, 예쉴 자미의 미나레는 그림과 같이 녹색을 띈다.
자미의 미나레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외부인에게 자미의 위치를 쉽게 알려 주는 기능이다.
이즈니크에서 실제로 이 미나레 덕분에 자미를 찾기가 쉬웠다.
또 하나는 예배 시간을 알려 주는 기능이다.
높은 곳에서 소리치면 더욱 잘 퍼져 나가기 때문이란다.
예쉴 자미는 이즈니크의 대표 자미답게 주변을 작은 공원처럼 꾸며 놓았고,
발을 씻는 수도꼭지도 많았다. 터키의 모든 자미에는 이 수도꼭지가 있다.
나도 발을 씻고 있는 터키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씻기 전에 눈여겨 보아 어찌해야 하는지를 익혀 둔 터였다.
나는 발을 씻고, 수돗가 한쪽에 비치된 높은 굽의 나막신을 신었다.
굽이 높고 바닥이 딱딱한 신발인데, 가죽끈만 있어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신발은 놓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데,
덕분에 자미로 향하는 20~30m 의 짧은 거리를 경건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신발을 벗고 자미 내부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여자와 아이들만 있었고,
신발장 양 옆으로 카펫이 깔려 있는 곳에 남자 5명이서 함께 코란을 외고 있었다.
거기에 합류하려는데 진행자인 듯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들어가도 되나요?
나는 눈짓과 몸짓으로 물었고, 그는 편안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뒤에 자리를 잡았다. 네 명이 나란히 앉았고 앞쪽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를 마주보고 앉은 그 남자의 눈에 띄지 않게 사진을 찍고 나도 무릎을 꿇고 앉았다.
5명의 이슬람 교도와 1명의 개신교 신자가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생각보다 이들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함께 일어나야 했다.
혼자 남아 있기도 매우 어색한 상황이었다.
뒤따라 나오면서 슬쩍 자미 내부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경건한 분위기라 내부를 찍을 순 없었다.
입구에 노인네들이 앉아 있었기에 방해가 될 듯 했다.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관광 명소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지만, 예쉴 자미는 달랐다.
경내 벤치에 앉아 남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장면과
젊은 여인들이 코란을 들고 자미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터키가 이슬람 국가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원전 301년,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중에 '리시마코스'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는 호반의 도시를 점령했다.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아내인 니카에아 (Nikaea)의 이름을 따서 니케아로 명했다.
니케아는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 이후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중심 도시가 되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리우스파를 정죄하는 종교회의가 니케아에서 열렸던 게다.
이것이 역사상 첫번째 종교회의로 불리는 니케아 공의회였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수많은 이단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 아리우스파다.
아리우스파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여 기독교의 이단이 되었지만,
그 세력이 날로 더해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되어 또 하나의 종교를 이루었다.
오늘 나는 니케아로 왔다. 니케아의 오늘날 이름은 '이즈니크'다.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인 오르한이 니케아를 점령하여 이름을 이즈니크로 바꾸었다.
1331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질 좋은 점토가 생산되어 타일 도시라는 닉네임이 붙은 이즈니크.
이스탄불의 예니 카프 페리 선착장에서 얄로바까지는 페리를 타고,
얄로바에서 이즈니크까지는 '돌무쉬'라 불리는 벤을 타고 이동했다.
'돌무쉬'는 승객이 차면 떠나는 승합차인데, 장거리 마을버스인 셈이다.
이즈니크의 3대 볼거리는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던 아야소피아 교회,
그린 모스크라 불리는 예쉴 자미, 그리고 이즈니크 호수다.
아야소피아 교회는 787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던 그 건물이다.
아야소피아는 원래는 교회였지만,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 '자미'로 바뀌었다.
건물은 3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부분이 높이 솟아 오른 부분이 원래의 교회 부분이고
양쪽의 영역은 자미로 개조하면서 증축한 것이라 한다. (아래 이스탄불의 역사 참조)
왕조가 바뀌면서 도시의 이름도 바뀌어져 온 도시,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로마,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122명의 통치자가 지배했던 도시다. B.C. 7세기 비자스라는 그리스인이 톱카프 궁전 자리에 도시를 건설하여 비잔티움이라 명했다.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비잔티움은 196년에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395년 로마는 둘로 나뉜다. 5세기에 서로마는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천년간 번성한다.
1453년 오스만 왕조의 술탄아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도시 이름을 이슬람교가 번성하라는 뜻의 '이스탄불'로 개명하였다. 이후 성당은 자미(이슬람 사원)로 바뀌었고, 코란 경전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스탄불 개명의 역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비잔티움 (로마 이전) → 콘스탄티노플 (동로마 제국) → 이스탄불 (오스만 제국)
이즈니크에는 큰 호수가 있다. 터키에서 다섯 번째로 큰 호수다.
호수를 처음 봤을 때에는 '이게 호수야? 바다지' 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였다. 중국 항저우의 서호가 떠올랐다.
서호의 둘레는 15km다. 얼핏 보면, 바다 같지만 둘레가 가늠된다.
서호10경이라 불리는 명소가 있고, 관광 호텔과 사람들이 많은 서호에 비해
이즈니크 호수는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내가 이 곳에 온 까닭은 갖춘 셈이다.
숙소를 시내가 아닌 호숫가에 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노란색의 호텔은 호수와 가까웠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이즈니크 호수다.
투숙객이 적어 호숫가로 낸 발코니가 있는 방에 묵을 수 있었다.
저녁 7시가 넘어갈 무렵, 태양을 집어삼키려는 호수의 모습이 호텔 창밖으로 보였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하루 일을 마치고 휴식하러 가는 이 즈음, 태양도 나도 관대해진다.
이 무렵의 붉은 태양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에게서 눈부심을 걷어간다.
덕분에 나는 선글라스 없이도 한참 동안 태양을 쳐다 볼 수 있다.
머나먼 낯선 도시에서 여유롭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쁨.
소박하지만 깊은 기쁨이었다. 나는 삶을 생각했고, 꿈을 상기했다.
태양 한 번,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한 채 지내온 서울에서의 날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앉았던 저 벤치와 같은 여유로운 순간들을 날마다 만들어야겠다.
5시 3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숙소에 돌아왔다.
여행 일정을 일찍 마무리한 것은 저녁 식사를 느긋하게 즐기고
내일 '이즈니크'로의 1박 2일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스탄불의 한국 식당에 가방을 맡겨 둘 참이다.
일행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했던 곳, <서울정>이다.
사실, 부탁을 드리지 못하는 성정이라 맡기기로 결정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즈니크로 들고 갈 소지품과 맡겨 둘 짐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를 하고 나니 6시가 되었다.
유럽의 6시는 식사하기에 이른 시각이다. 밖은 환하고, 레스토랑은 한산하다.
어슬렁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입구에 비치된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다.
참 분위기 좋았던 세븐힐레스토랑에 비하여 그리 저렴하지도 않다.
하지만!
한 번 쯤은 술탄아흐메트 거리에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느 새, 나는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카리쉬크 이즈가라(믹스 케밥)라는 터키 전통식을 주문했다.
14 유로짜리, 터키의 레스토랑에서는 비싼 축에 속하는 메인 메뉴다.
양꼬치, 그릴드 치킨, 미트볼 등이 약간의 샐러드와 함께 나왔다.
식사를 하며, 술탄아흐메트의 거리를 쳐다 본다.
내가 자리한 식당 바로 건너편에는 베스트웨스턴 호텔이 있다.
베스트웨스턴 호텔과 연관된 추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지난 해, 비스바덴에서 <베스트웨스턴> 호텔에 묵었고,
2010년 월드컵 그리스 전은 <베스트웨스턴 강남>에서 을 보았다.
같은 호텔은 아니지만, 스무 살 무렵 <웨스턴조선비치>에서 비싼 햄버거를 사 먹었던 기억까지.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7시가 넘은 시각이다.
노트북을 꺼내어 메일 회신을 하고, 와우카페를 둘러 보니 8시가 넘었다.
8시가 되니 술탄아흐메트 거리의 레스토랑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왠지 밤이 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날이 있다.
그 날이 오늘일지는, 해가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느낄 수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은 아니다. 오늘은 기분이 들뜨지는 않지만 차분하게 좋은 날이다.
식사값을 계산하니 19유로였다.
맛난 식사와 2시간 30분 동안의 여유 시간을 생각하면 비싸지 않다.
한국에서도 한 달에 두 번은 홀로 이렇게 식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일행은 떠나고 나는 남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대한민국 서울이고,
내가 남은 곳은 터키의 심장 이스탄불이다.
우리는 열흘을 함께 여행했다.
크루즈를 타고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다.
산토리니는 쪽빛 바다, 푸른 하늘, 새하얀 집들이 참 예뻤다. 명성 그대로였다.
크레타 섬에서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들렀다.
그의 영혼 앞에서, 그가 쓴 책을 읽었다. 나도 자유로웠다.
로도스 섬에서는 함께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햇살은 매우 강렬하여 맨발로 백사장을 밟기 힘들 정도였지만,
우리들의 즐거움도 아주 진하여 바닷물에서 나와야 하는 시간이 야속할 정도였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는
사부님(구본형 선생님)과 파르테논 신전을 함께 돌며 사진을 찍었다.
짧은 15분의 자유시간이 사부님으로 인해 의미가 되었고, 추억이 되었다.
메테오라의 수도원도 잊을 수 없다.
절벽 위에 지어진 수도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7월에 이어, 8월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다녀 왔구나! (7월엔 하회마을)
이런 일정을 함께 했던 일행들이 어젯밤 떠났다.
홀로 하룻밤을 잤고, 홀로 아침을 맞았다.
이야기하며 먹느라 30~50분은 걸렸던 아침 시간이 15분으로 단축되었다.
일행 중의 한 분이 말했다. 함께하다가 홀로 남은 여행은 '고약한 방식'이라고.
일전에 남편과 함께 여행하다가, 남편은 일 때문에 먼저 귀국하고 홀로 남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때, 눈물이 나더란다. 그리고 결심했단다. 다시는 이런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고.
나도 예전에 일행과 함께 다니다가 홀로 남아 여행한 적이 있다. (2002년, 2009년)
지난 해, 소중한 분들(바로 어제 떠난 그 분들)과 함께 크로아티아에 갔었다.
열흘을 함께 한 뒤, 홀로 남아 44일을 여행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년에도 이렇게 여행하자고.
일년이 지났고, 오늘은 지난 해의 생각이 실현된 첫 날이다.
좋아하는 음식, 선호하는 음악이 서로 다르듯이 여행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나는 나만의 여행 스타일을 찾고자 여러 번 여행을 다니며 스스로의 즐거움을 비교해 보았다.
나는 홀로 여행하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추억과 즐거움은 함께 여행할 때 더욱 많이 가지게 되는 나다.
하지만 홀로 여행하는 것도 매우 즐겁고 의미가 있다.
내가 이스탄불에 남은 것은 '홀로 여행하려는 것'이다.
홀로 여행할 때, 나는 머무르고 싶은 곳에 마음껏 머물 수 있다.
하명없이 걸을 수도 있고, 카페에서 두어 시간 글을 쓸 수도 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내게 사색, 자유, 학습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렵고 부담스럽고 조금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삶을 포기한다.
그 대가는 우울, 권태, 무기력, 재미없음, (꿈을 향한) 절절함 등이다.)
in Leipzig
9월 03일 오후 7시 10분 도착
9월 06일 오전 11시 15분 떠남
드레스덴을 떠나 라이프치히 행 ICH 열차에 몸을 실었다.
쾌적한 열차로 1시간 15분을 달려 라이프치히에 도착했다.
라이프치히 역사는 엄청 컸다.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사란다.
역사 내에 큰 쇼핑센터가 있어 아주 편리했다.
높은 천장에 지하 2층까지 이어진 쇼핑몰의 사진 몇 장을 서둘러 찍었다.
서두른 까닭은 오늘 밤 저녁 식사를 여유롭게 즐기기 위해서다.
서두른다고 해도 조금 걸음을 빨리 하는 것이지
성미 급한 사람들의 ‘천천히’ 만큼도 안 될 것이다.
여행자인 나의 걸음은 ‘느릿느릿‘고,
거리를 둘러보는 시선은 늘 ‘두리번두리번’이어서
남들이 보면 내가 서두르고 있는 중임을 전혀 모를 것이다.
라이프치히에 들어선 오늘부터의 여행 테마는 ‘괴테‘다.
독일에는 괴테 가도가 있다. 여행 상품으로서의 ‘괴테’는 강력하고
독일 국민들의 괴테에 대한 자부심 역시 대단하다.
앞으로 독일인의 괴테 사랑과
여행지 곳곳의 괴테 테마를 소개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라이프치히는 괴테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이다.
괴테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녔고,
중심가에는 괴테가 자주 다녔다는 술집이 있다.
오늘은 바로 그 술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다.
역사에서 나와 미리 장소를 확인해 둔 AO 호스텔을 찾아갔다.
외양도 깨끗했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시실이 좋아 마음에 쏙 들었다.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침대인데,
내가 묵는 내내 옆자리에 아무도 오지 않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격 또한 하룻밤에 12유로라니. 와우. 대단히 저렴한 가격이다.
(베를린에서 13유로 묵었던 곳이 제일 저렴했는데, 시설도 저렴했다.)
좋은 숙소 덕분에 아주 좋은 기분으로 아우어바흐 켈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메일을 보내 준 와우팀원에게 메시지 하나를 녹음했다.
이럴 때에는 디지털 기기의 편리함이 좋다.
멀고 먼 그 곳에서 보낸 메시지는 몇 분만에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전달된다. 새삼 신기하고 놀랍다.
나는 거리를 걸으며 몇 마디를 녹음한다.
이것은 오늘 밤 인터넷을 통해 다시 그 곳으로 보내질 것이다.
이 편리한 기계적인 소통 방식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점점 외로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통의 핵심은 접근의 용이함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솔함과 열린 태도여서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도시의 중심가, 니콜라이 거리를 지나고 있다.
고풍스런 건물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여느 때 같으면 잠시 멈춰 서서 건물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을 터인데, 멈추지도 않고, 오히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릴 정도로 흥분하고 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술집에 가고 있기 때문이다.
술꾼이 아닌 내가 술집에 간다고 이리 기쁠까!
그건 여느 평범한 술집이 아니라,
괴테가 쓴 명작 『파우스트』의 무대가 되었던 명물 술집이기에 그렇다.
1525년 창업한 '아우어바흐 켈러 Auerbachs Keller(이하 켈러)‘.
나는 지금 켈러로 가는 길이다.
아우어바흐 켈러 Auerbachs Keller
켈러는 놀랍게도 최신식 쇼핑 아케이트 내에 있었다.
라이프치히에는 파사주(아케이트)가 많은데
켈러는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메들러 파사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메들러 파사주 맞은 편에는 고풍스러운 구 시청사가 있었지만
나는 그야말로 슬쩍 훑어보기만 하고 서둘러 켈러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조각상 두 개가 있다.
켈러는 지하에 위치했는데, 입구가 두 개다.
각각의 입구에 있는 조각상은 『파우스트』의 등장인물들이다.
아쉽고 조금 부끄러운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게다.
그래서 저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내가 괴테의 통찰에 처음으로 감탄한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라는 책을 통해서다.
1774년 발표한 작품이니, 괴테의 나이 26세 때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 완성한 평생의 대작이다.
켈러에 온 것은 『파우스트』의 이런 명성 때문이다.
켈러에서의 체험이 책을 더욱 생생하게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게 된 것은
글을 쓰는 지금 드는 생각이고,
켈러에 있을 때에는 약간의 후회를 느끼기도 했다.
입구에 걸린 사진과 조각상의 사진을 찍느라
켈러에 들어가기 위한 개인적인 기념식에도 시간이 걸렸다.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나는 켈러에 들어섰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홀을 가진,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의 레스토랑 분위기였다.
나는 작고 조금은 허름한 느낌의 술집을 예상했었는데,
현대식의 레스토랑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아무렴 어떤가. 내 예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은 세계 문학사의 걸작품에 등장하는 무대란 말이다.
나는 흥분과 설렘으로 주문했다.
사실, 오늘 저녁 식사용 비용은
드레스덴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이미 써 버렸다.
말하자면, 하루에 두 번이나 비싼 식사를 할 순 없다는 게다.
(나의 하루 식사비는 석식에 20유로 내외,
조식과 중식을 합쳐 10유로 이내로 떼우는 식이었다.)
오늘은 예외다. 나는 켈러에 와 있으니까.
12유로에 해당하는 요리와 맥주를 시켰다.
식사가 나오는 동안, 나는 술집 내에 있는 기프트샵으로 갔다.
『파우스트』와 괴테를 기념하는 선물용품과 책들이 있었다.
책을 뒤적이다가 결국 켈러의 역사를 담은 책을 샀다.
한국어 제목은 『아우어바흐 켈러 연대기』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산 까닭은 유일하게 영어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
다른 책은 모두 독일어인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파우스트』를 사고 싶었는데 말이다.
여행 때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도록.
책을 샀으니 마음 놓고(^^) 기념품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사진을 대놓고 찍지 못하는 소심함 때문에 돈이 든다. 헉.)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문서도 찍고,
괴테 인형도 찍고, 책들도 찍고.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자리로 돌아가려는 길에, 나를 발견한 직원이 무슨 말을 전한다.
아마도 식사를 하라는 얘기 같았다.
자리로 돌아갔더니 직원이 바로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없어 기다렸던 게다. 고마운 그.
맥주 맛은 잘 모르겠지만, 식사는 매우 맛있었다.
아쉬운 것은 『괴테와의 대화』를 숙소에 두고 온 것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책을 읽어야지, 라는 계획이었는데...
그런 호사를 포기할 순 없다. 내일 또 오면 되지. 뭐. ^^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고함을 지른다.
빨간 망토에 빨간 장갑, 빨간 뿔을 단 사람이 등장했다.
『파우스트』의 등장인물이었다. 켈러 내에서 펼쳐지는 공연이었다.
독일어로 한참 진행되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당연히 모른다.
이튿날, 니콜라이 교회와 라이프치히 대학을 돌아 본 후
점심을 소시지로 해결하고 나는 다시 켈러로 향했다.
『괴테와의 대화』를 들고 오는 건 잊지 않았다.
작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책을 꺼냈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는데 썼다. 필스임에 분명하다.
(필스 : 필스너(Pilsner)를 흔히 부르는 말. 내가 별로 안 좋아했지만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맥주라기에 조금씩 정을 붙이고 있는 맥주임.)
낮 시간에는 의외로 손님들이 별로 없었다.
맥주 한 잔을 시켜도 덜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내게는 다행이다.
나는 편안히 『괴테와의 대화』를 읽었다.
딱 20페이지를 읽었는데, 지금 다시 펼쳐보니 메모가 많다.
집중이 잘 되었는지, 의미 있는 장소여서 그랬는지
아무튼 아주 유쾌한 독서 경험이었다.
'예견'에 대하여 에커만과 괴테가 나눈 대화는
다음 와우 수업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체크해 두었다.
짤렌 비테!
점원에게 웃으며 한 마디를 건넸다.
여행 떠나기 전에 독일에서 살았던 와우팀원에게 배운 독일어다.
정말 몇 마디 할 줄 모르는데, 활용할 때는 자신 있게 말한다. ^^
뜻은 간단하다. Check, please. 계산해 달라는 게다.
2.50 유로였고, 3유로를 주었다. 50센트면 20%를 팁으로 준 게다.
그러면서 컵받침 하나를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어제도 팁을 조금 많이 주었던 그 점원이어서 희망이 있었다.
한 개면 되냐는 점원의 말에, 물론이라고 대답해 놓고선 금방 후회한다.
두 개 달랄 걸. 그런데 점원이 두 개를 챙겨 주었다. 고마운 그.
조금 많은 팁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
(원래도 아깝진 않았다. 서로 기분 좋게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켈러에서 나오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30분이었다.
아우어바흐 켈러 방문 기념이 될 컵받침과
『괴테와의 대화』를 가방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오후 일정이 괜히 기대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음 여행지를 향했다.
<아우어바흐 켈러에서 쓴 단상들>
1)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영업을 한다는 게 참 신기하다.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 문화와 기술력 좋은 건축술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들은 도로를 닦고 건물을 세울 때 도대체 몇 년 후를 내다보는 것인지?
2) 괴테가 이곳에서 술을 한 잔 했다는 말인가.
내가 바로 그 술집에 내가 들렀단 말인가.
기념품으로 책 한 권을 샀고, 책자(요리와 키친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보았지만
『파우스트』를 모르니 감동이 적다. 알아야 느낀다.
유럽 여행에는 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괴테가도는 괴테의 작품을 읽고 난 이후라면 좀 더 흥미로울 것이다.
3) 공부하기 about
in Frankfurt
9월 12일 오후 18시 41분 도착
9월 14일 오후 16시 15분 떠남
저녁 7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빠져나왔다.
나의 성능 좋은 방향 감각은 여행에 큰 도움이 된다.
카이저 거리로 향하는 나의 직감은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행복한 인생살이의 비결은 정체성과 방향성을 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중 어느 한 단어도 파악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정체성 : 나는 누구인가?
방향성 :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누가 이 질문에 대하여 쉽게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행인 것은 대답을 빨리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젊은 날에는 질문에 답을 해야만 회사에 입사하는 줄 알았고
답을 가져야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이란 걸.
삼십 대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는 것도 빠른 것이란 걸.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학적 성과다.”
『동기와 성격』이라는 훌륭한 저술을 펴낸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말이다.
정체성과 방향성은 평생에 걸쳐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은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낯선 곳에서는 자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여행도 이 두 가지의 단어를 알고픈 소원에 맞닿아 있다.
중앙역 정면의 길을 건너면 바로 카이저 거리다.
중앙역 맞은편으로 보이는 금호타이어 영어 간판이 반갑다.
카이저 거리, 우리말로는 황제의 거리이니
대도시로 들어가는 메인 도로의 이름으로는 제격이다.
카이저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두 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바이마르와는 다른 곳임을 느낀다.
바이마르에서 6박 7일을 머무르면서
트램이나 버스를 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고 보니, 그 작은 도시에는 지하철도 없었다.
관광 명소들도 대부분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들이었다.
프랑크푸르트는 큰 도시다.
카이저 거리에 들어서며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동양인들도 많고 흑인들이나 중동 지역의 사람들도 많다.
책에서 읽지 않았더라도 프랑크푸르트가 교통의 허브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카이저 거리는 나의 상상과는 달리
고급스럽고 깨끗한 거리가 아니었다.
술 취한 행인들이 보이고, 걸인들이 많았다.
여럿이 모여 다소 무서운 분위기가 형성된 불량스러운 패거리도 보였다.
반갑게도 길을 건너자마자 <프랑크푸르트 호스텔>이 나타났지만,
미리 검색해 둔 <Easybed24>를 향하여 걸어갔다.
조금 더 저렴하고 인터넷도 무료인 호스텔이다.
카이저 거리와 직각으로 만나는 Morsel 거리에 있으니 멀지 않다.
Morsel은 첫 번째 사거리에서 만나는 거리다.
Morsel 거리의 번지수를 따라 좌회전하는 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화려한 네온사인은 모두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사실, 별로 자극되지는 않았다. 살짝 긴장했기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인들과
남자 호객꾼들을 지나치며 걸어갔다.
워낙 평화롭고 조용한 곳에 있다 왔기에
약간 긴장은 했지만, 무섭거나 염려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함부르크의 유명한 환락가를
대담하게 걸어 다녔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들 가게들은 어떤 곳인가 하는 호기심이 자극되기는 했다.
선하게 보이는 흑인 호객꾼이 나의 호기심을 간파했나 보다.
저들의 독심술은 배울 만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하며 가게로 들어가고 싶었다.
가게 안에는 혹시 거리에 나온 여인들보다
더 과감히 노출한 여인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맙게도(?) 나를 붙잡은 남자와 여인이 나를 가게 안으로 끌어들였다.
안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높은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는 것 밖에는.
술자리인지, 남성 접대룸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바가지를 쓸 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기심도 있었고, 일탈에 대한 욕망도 일었지만,
무서움과 바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웃으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내 팔에 힘을 주고 있는 남자를 뿌리치고 나왔다.
영어를 잘도 하는 흑인에게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오겠다고 했다.
남자도 직감했으리라. 내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란 걸.
빠져 나왔다. 다시 숙소로 걸어간다.
나는 여행자다.
내 안에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모험심도 있었다.
그리고 일탈에 대한 욕망도 있었다.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두뇌도 가졌기에 이성적 존재지만,
여인을 안고픈 아랫도리도 가졌기에 욕망적 존재이기도 했다.
무섭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바가지를 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더라면
나는 여인들의 젖가슴을 쳐다보며 술을 마셨을까.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 덕분에 도덕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리는 덜 도덕적인 사람이 되곤 하니까.
여행지에서의 일탈이 보다 쉬워지는 까닭이다.
어쨌든 54일 간의 유럽 여행에서, 나는 나를 지켰다.
여행자는 욕망을 지닌 존재다.
모든 여행지는 여행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과
여행자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을 함께 지녔다.
여행자는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지녀야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거리를 걷는 것이지
욕망을 자극하는 곳을 드나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생 여행자다.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 주어진 일에 몰입하여 업무를 하나씩 해내며
자신이 무엇을 잘 하는지 발견해 가는 여행자다.
무얼 하며 살아야할지 모르겠다며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면서도
인터넷 앞에서는 연예기사나 음란 사이트를 드나드는 것은
유익한 여행을 방해한다. 그런 일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다.
가게에서 빠져 나와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조금 있으니 흑인 청년이 들어왔다.
(방금 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 룸메이트다.)
호스텔에서 흑인과 함께 방을 쓰는 건 처음이다.
유혹을 이겨내니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난생 처음, 흑인과 길게 몇 마디를 나눌 수 있는 기회.
그는 따뜻하고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낭만 유럽여행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2009년 9월 29일.
나는 밤을 날아 한국에 도착했다.
홀가분하게 떠나 54일 동안 자유로이 여행했다가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귀국했다.
세상에 한국어가 난무하는 곳이 있다니.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있는 곳이 있다니.
두 귀로 한국어를 듣고, 두 눈으로 한국인들을 바라보니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여행을 시작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곳'을 여행한 목적은 '이 곳'에서의 삶을 위함이었을 느낀다.
사람들은 긴 여행이라고들 하지만 내게는 짧은 여행이었다.
퍽이나 즐거웠고 깊은 깨달음의 순간들이 많았다.
예상했던 외로움은 나를 찾아들지 않았고
여유와 배움이 가득한 날들을 보내며 기뻐했다.
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혼자만의 여행을 더욱 잘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떤 배낭여행자들은 이제 풍광도 지겹다면서 집이 그립다 했다.
사람에 따라 지겨움의 풍광은 성당, 거리들, 고성 등으로 목록이 바뀌었다.
나는 두 달을 더 여행하라고 해도 떠난 모습 그대로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의
호기심과 체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히려 여행의 매력에 더욱 빠져 있었다.
여행의 말미에 발생한 불미의 사건으로 흠뻑 울어 감성까지 맑은 상태였다.
허나, 돌아와야 했다. 10월부터 약속이 있었고, 기다리는 가족도 있었기에.
아쉽지 않았다. 나는 또 훌쩍 떠날 궁리를 할 테니까.
마음 속에 독일이라는 나라가 깊이 새겨진 여행이었다.
나는 독일의 14개 도시를 방문했다. 길게는 한 도시에서 여섯 번의 밤을 보내었다.
지도와 안내 책자를 팽개치고 그저 나의 마음을 따라 하루를 걷기도 하고
볕 좋은 날이면 공원에 드러누워 한 동안 책을 읽으며 깨달음을 책의 여백에 적기도 했다.
도서관을 찾아 들어가 파란 눈으로 책을 읽는 그들을 따라 내 눈에 불을 켜기도 했다.
머무르고 싶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쉽지 않을 만큼은 머무르며 독일을 여행했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궤적이 남는 것은 그가 온 몸으로 지났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독일에 대한 애정이 깃든 것은 나 역시 온 몸으로 독일을 여행했음이리라.
내가 여행을 퍽 좋아함을, 여행을 통해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행을 일처럼 하는 사람도 아닉, 휴가처럼 마냥 누워 쉴 수 있는 사람도 아님을 알게 됐다.
배낭에 짓눌린 나의 어깨에 힘을 넣는 방법이 휴식 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들어가거나 위인들의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제, 어디에서 무얼 해야 달콤한 낮잠에 빠져 들 수 있는지,
이 만큼의 음식을 먹으면 얼마만큼의 거리를 걸어갈 수 있는지,
어느 때 마신 맥주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지 알게 됐다.
나는 보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돌아가니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이 생겼다.
나는 좀 더 잘 뒹굴거리면서 보다 잘 배우는 여행의 묘수를 알고 싶다.
'삶은 여행'이라는 비유를 더욱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내 나라를 잘 알아야 여행지에서의 배움을 더욱 깊이 할 수 있고
이 곳에서의 적용과 도약을 더욱 잘 이뤄낼 수 있음을 절감했다.
나는 대한민국과 한국인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만들어내고픈 나만의 개인 세계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유럽의 '그 것'을 보며 한국에 있는 같은 '그 것'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곤 했다.
한국의 '그 것'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잘 몰라 비교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만약 여행자 앞에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면
좋은 여행자는 분명 자기 나라를 제대로 둘러 본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신이 난다.
오늘부터 한국 여행이 시작되었기에.
오늘은 꽤 오랜 동안 머물 서울 여행의 첫 날이다.
첫날 밤이란 설레고 떨리는 법이다.
안을 그대가 없어도 품은 꿈이 있다면 흥분하고 설렐 수 있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아직 시차적응이 덜 되어 말똥거리는 두 눈이 반갑다.
음악이 깃든 밤, 나만의 공간, 이 모든 시공이 고맙다.
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