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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개봉일 : 2010. 4. 1
감독 : 루이스 리터리어
출연 : 샘 워싱턴 (페르세우스), 리암 니슨 (제우스),
          랠프 파인즈 (하데스)

관람 : 2010년 4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평점 : ★★★

간단평 :  올림푸스 신전, 신화 속의 괴물, 신과 인간의 싸움, 장엄한 스케일 등 볼거리가 많음. 신과 인간의 경계 등 생각꺼리도 있음. 그러나, <아바타>의 공감각적인 메시지 확장은 없음.



※ 스포일러 있음. 그러나 <타이탄>은 미스테리도 아니고,
    시나리오가 치밀하거나 마지막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영화 보시는 데에는 무방함.


오전 8시 30분이라는 이른 시각에 본 영화 <타이탄>. 관객보다는 출근하는 시민이 많은 시각에 영화관으로 향하는 기분이 묘했다. 일해야 하는 시간인데, 라는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내야 했던 점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다. 더 큰 감정은 즐거움이다. 3~4시간 동안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짓는 일도 아닌데 괜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해야 할 일을 완료해 두어야 더 즐거울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을 보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처리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했다. 줄거리 역시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여 제우스의 거대한 동상까지도 무너뜨린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여러 신들과 함께 인간의 도전을 어찌 다뤄야 할지 고민한다. 제우스의 전지전능함을 질투하는 지옥의 신 하데스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제우스의 허락을 얻은 하데스는 인간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제우스에게서 신적 능력을, 인간인 어머니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물려 받은 영웅 페르세우스다. 그가 하데스의 파괴를 막아낸다는 이야기가 줄거리다. 승리는 페르세우스의 것이고, 그는 신들의 세계인 올림푸스 신전이 아닌 인간 세계에서 살기로 선택한다.

바다속으로 빠지는 제우스 동상


신과 인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싸움. 각 진영의 장군은 지옥의 신 하데스와 반신반인 페르세우스다. 사실, 기독교인인 필자로서는 신과 인간의 '싸움'은 상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계시가 있고, 그것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니까. 분별과 순종을 추구했고, 회의와 반항은 멀리했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필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어서인지, 아니면 영화의 스펙타클이 주는 몰입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환영한다. 회의에서 건너 온 확신이 더욱 굳건한 믿음이 되곤 하니까. 
 

<타이탄>은 <아바타>의 명성에는 못 미쳤다.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는 아니었다. 함께 보았던 친구는 "<반지의 제왕>보다 논리적 연결이 엉성하다"고 했다. <타이탄>은 블록버스터 영화로서는 부족하지 않다. 스케일이 크고, 영화의 장면이 되는 공간들은 '저긴 어디지?'라는 질문과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주요 볼거리들이 모두 섬세하게 만들어져 엉성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아바타>와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바타>의 주인공(샘 워싱턴)이 다시 한 번 페르세우스 역으로 주연을 맡았다는 점 만이 비교할 만하다. <아바타>의 감동과 메시지가 훨씬 깊고 울림이 크다. 나에게 <아바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기반을 돌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소한 성찰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받은 메시지다. 다른 이들이 받은 메시지는 나와 달랐다. 이것은 곧 <아바타>가 메시지 확장이 열려 있는 영화란 의미다. 볼거리는 물론이고, 공감까지 자극하는 영화였다.
 

올림푸스 신전의 신들


그에 비해 <타이탄>은 매력은 볼거리 속에 숨겨져 있다. <아바타>를 압도하는 수준의 영상은 아니다. 메두사, 올림푸스 신전, 거대한 전갈 등은 볼만 하지만, 경탄이나 아름다움까지는 아니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타이탄>의 중요한 메시지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다. 이 점에서 생각을 자극하기는 했다. 신화에서의 신은 개신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개신교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인격적으로 온전한 분이시다. 반면, 신화 속의 신들은 하나씩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의 '싸움'이 일어날 만한 신이고,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중에서 어느 곳이 더 살만한 곳인지 고민해 볼 만한 신이다.

영화 속의 기이한 괴물들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지 정답이 아니다.


필자는 <타이탄>의 장엄한 스케일, 신화 속의 신들을 표현한 방식 등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신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얻은 약간의 철학적 단상들이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님은 신화는 정답이 아니라 '질문'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신화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신화에서는 회의를 얻어 오면 된다. 질문에 대한 답은 삶의 현장 속에서, 인류의 지혜 속에서, 약육강식의 자연사 속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어제까지의 역사와 오늘의 현장 속에서 말이다. 때로는 정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라고 회의한 그의 질문 때문이지, '물'이라는 대답한 정답 때문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는 무엇인가?
신에게는 인간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 내가 얻은 질문들이다.

"서로 싸우게 하여 우리로 돌아오게 하라."
- 제우스가 동생 하데스의 인간 공격 명령에 찬성하며

"인간을 창조하셨으면서도 인간을 모르시는군요."
- 페르시우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한 말.


필자의 마음에 남아 있는 몇 마디의 대사를 인용해 하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영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형 제우스에게 인간을 공격하겠다는 허락을 얻을 때, 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싸우게 하여 우리로 돌아오게 하라." 제우스의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의 화해였다. 제우스는 인간을 자신에게 돌이키기 위해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의문이 생긴다. 선한 목적을 이뤄가는 수단이 부당할 때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지혜로운 선택을 알지는 못한다. 분명한 것은, 목적만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합의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페르세우스는 신이 인간을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상대를 이끄는 선의가 폭력적일 때가 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한 채 이끌 때다. "인간을 창조하셨으면서도 인간을 모르시는군요."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을 모를 수 있음, 지적한 것은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아이를 잘 모르는 부모님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자녀 교육의 지혜도 어려운 문제다.

"제게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어요."
- 페르시우스가 올림푸스 신전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며.

아들에게 동전을 건네는 제우스


영화에서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 페르세우스에게 2번 초대한다. 신들의 세계 올림푸스 신전으로. 아들은 2번 모두 거절한다. 두 번째 거절을 하면서 "제게 필요한 것은 여기 다 있어요"라고 말한다. 신화에서의 신과 종교에서의 신은 능력과 인격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페르세우스의 신념을 현대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중세, 이성과 과학기술에 있다고 믿었던 근대, 그리고 다원성을 중요시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구원과 행복, 신과의 적합한 관계는 중요한 문제였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졌는가? 신만이 채울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인간 세계에 필요가 모두 있는데, 사람에 따라 발견하거나 못하거나의 차이인가? 고민해 볼 일이다.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되렴."
- 제우스가 아들 페르시우스를 인간의 땅에 남겨둔 채 승천하기 직전에 한 말.


제우스는 2번에 걸친 아들의 거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올림푸스 신전으로 돌아가기 전, 아들 페르세우스에게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돼"라고 말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다운 성품과 권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신의 세계를 버리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남겠다는 아들에게 신보다 나은 존재가 되라고 하는 말은 내게 울림이었다. 오만하지 않은 겸손의 말이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아들에게 보내는 사랑과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타이탄>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고민하는 이에게는 고민꺼리를 줄 수 있다. 그러니 신에게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볼거리 이상의 메시지는 없다. 이것이 <아바타>와의 차이점이다. <아바타>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울림 있는 메지시를 준다. 사랑, 자연, 더불어 살기, 소통 등에 대하여. <타이탄>은 잘 만든 영화지만, 아바타가 가진 메시지의 확장 면에서 2%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영화의 메시지들이 좋았다. 기독교 세계관과는 맞지 않아 필자의 견해와 달랐지만 말이다. 다르다고 하여 영화를 두고 괜히 흥분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생각을 하고 싶다. 신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인생과 나에 대하여.


※ <아바타>를 통해 3D 영상에 매료되셨더라도, <타이탄>의 3D를 추천하지는 않는다.
    3D 대중화를 일궈 낸 <아바타>와는 다르다. 혹자는 말했다. "어찌 대사만 3D로 나온다니?"


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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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개봉일 : 2008. 2. 28
감독 : 김정권
출연 : 차태현, 하지원

관람 : 2008년 3월 7일, 최창연

평점 : ★★★★

간단평 : 바보 승룡이는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순수했다. 승룡이는 동생 지인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친구 지호, 이 두 사람을 좋아했다. 동생 지인이를 바.보.처.럼. 사랑했다. 동생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지만 늘 지켜주었다. 그리고 지호를 순수하게 사랑했다. 승룡이는 행복했다.


줄거리 : 승룡이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혼자 토스트 가게를 하며 동생 지인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동생의 학교 앞 작은 토스트 가게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토스트를 만들어 파는 승룡이는 동생이 학교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늘 행복하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승룡이는 매일 저녁이 되면, 동네가 한 눈에 보이는 토성에 올라 ‘작은 별’ 노래를 부르며 10년 전 유학간 짝사랑 지호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지호가 10년 만에 귀국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승룡이는 지호를 첫 눈에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처음엔 기억을 못하던 지호도 살며시 살아나는 추억과 함께 자신의 곁을 맴도는 승룡이의 따뜻함에 점점 다가가게 된다. 늘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동생 지인이와 10년을 기다린 첫사랑 지호를 매일 보게 된 승룡이는 생애 최고의 행복함을 느끼며 더욱더 즐겁게 지낸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상하게 대하다가도 자신의 자녀에게는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하는 부모님들. 친구들에게는 친절하다가도 자신의 애인에게는 툴툴거리고 매정하게 대하는 젊은 청춘들. 대부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사랑의 능력을 표현하고 전하는 것에 서툴다. 마치 사랑애 어떤 장애를 느끼는 것처럼.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번 사랑의 실체를 눈으로 보았다. 그 중 하나는 군에 입대하던 날에 외할머니가 보여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외할머니의 손자에서 막내아들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딸을 먼저 하늘에 보낸 깊은 슬픔과 손자를 향한 가련함을 수없이 느끼셨이리라. 나를 향한 외할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만 25의 나이에 입대하던 날, 나는 밤새 친구들과 보내다가 아침해와 함께 집에 들어갔다. 외할머니는 밤을 지새우며 나를 기다리셨다. 군대에 입대하는 전날 밤, 손자와 함께 이야기라도 하시려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할머니는 "야 이 무정한 놈아.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냐"고 소리를 지르실 만도 했다.  화가 나실 만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왔냐고, 잘 왔냐고 맞아주셨다. 부드러운 걱정으로 화를 표현하셨고 할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밤새 나를 기다리셨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손자의 늦은 입대를 염려하셨을 것이다. 할머니의 사랑은 지극했지만 극성의 선을 넘지 않았다. 십대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한 세심한 사랑이어야 한다. 부모님의 십대 자녀를 향한 사랑은 쉽지 않다. 안내라고 해 주면 거절당하고, 도와 주려고 하면 간섭이라고 오해받는다. 민감한 십대를 향한 사랑은 정서적으로 지원해 주고 말없이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외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주셨다. 외할머니는 "너를 믿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나는 외할머니께서 나를 신뢰한다는 것을 안다. 신뢰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태도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나를 신뢰해 주셨다.) 영화 <바보>를 보며 말없이 신뢰해 주고, 정서적 지원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항상 나를 지켜봐 주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승룡이가 그렇게 자신의 동생을 사랑하였고,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승룡이와 할머니가 오버랩될 때마다 나는 울었다. 사랑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멋지게 차려 입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아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고 신뢰해 주는 것이고, 늘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다. 신뢰와 애정어린 관심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지금쯤 할머니도 내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할머니의 행복이리라. 오늘이 소중해지고, 내 존재가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창조자다. 사랑 받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들은 모두 바보같은 사람들이다.

나 역시 바보가 되었다

옷을 사지 않은지 일 년이 넘었다. 싸구려 티셔츠 한 장, 양말 하나도 사지 않았다. 얼마 전, 운동화를 보니 군데 군데 떨어졌는데 구입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옷은 늘 그녀와 함께 구입했었다. 잠실 롯데마트에서 우리는 자주 쇼핑을 했다. 그런데, 늘 나와 함께 옷을 골라주던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나는 옷을 구입하는 법을 잊어버린 마냥 그냥 가진 옷을 입고 산다.

인천으로 강연을 갔더니, 언젠가 그녀와 근처의 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와 보았던 곳이었다. 그녀가 생각났다. 참여 정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잠깐 2006년 월드컵 얘기가 나왔다. 2006년 월드컵 경기는 올림픽 경기장에서 그녀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보았다. 그녀가 생각났다. 사당에서 4호선을 타고 안산 방면으로 갈 때마다 관문체육공원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산책했던 날이 떠올랐다. 역시 그녀가 생각났다.

어디 과천 뿐이랴, 코엑스몰가 그렇고, 잠실역이 그렇고, 성남이 그렇고, 교회가 그렇다.
어디 월드컵 뿐이랴. 무한도전이 그렇고, X맨이 그렇다. ... 아!

그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사랑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었으며, 화난 감정대로 그녀를 힘들게 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헤어지고 난 후부터 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불필요하다면 참는 법을 배웠고, 그녀의 마음이 어떠한지 깨닫기 시작했으며, 나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그러나, 이 배움은 너무 늦은 것이리라.

헤어진 후, 참 많이 보고 싶었지만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열 번은 생각했지만 메일도 보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나를 보며 '집착'인가 싶기도 해서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진단해 보기도 했다. 집착하는 이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고 했다. 연락을 참을 줄 모른다고 했다. 옛 연인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못 견뎌 한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참고 기다리는 나를 보며 '집착은 아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친구들은 내게 애정 공세를 퍼부으라고 조언했다. 나의 마음을 전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내 마음을 전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소식도 알지 못하여 꼭 한 번만이라도 얼굴 한 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았다. 그녀로부터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나의 애정공세는 그녀에게는 힘겨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다가 눈이 오면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그녀를 보러 갔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다. 첫눈이 오는 날, 그녀의 집 앞에서 밤 늦게까지 기다렸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홀로 그 날의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은 퍽 쓸쓸했다. 올해 초에는 새해 선물을 준비하여 가까스로 전해 주기는 했지만, 역시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나는 사랑할 때 사랑을 몰랐던 바보였다. 승룡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챙길 줄 모르는 순수한 바보였고, 나는 뒤늦게 깨달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어리석은 바보가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며 바보 같은 승룡이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엉엉 울었다. 나의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울기도 했나 보다. 언젠가 다시 사랑이 오면, 그 때에는 바보 같지 않기를...

- 2008. 3. 7


2년 전, 썼던 영화 리뷰를 공개글로 바꾸며 드는 생각은
내가 인생을 참... 둘러 가고 있구나, 하는 회한이다.
대중가요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인생길을 둘러가는 것 같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아 헤맨다.
연인을 떠나 보내고 나서야 사랑을 배우고
젊음이 속절없이 지나간 뒤에야 젊음의 소중함을 발견하다니.
80세의 지혜로 18살까지 서서히 젊어지는 인생이라면 좋으련만. 허허.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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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개봉일 : 2008. 1. 10
감독 : 임순례
출연 : 문소리, 김정은, 엄태웅, 김지영, 조은지, 민지

관람 : 2008년 1월 27일, 피카디리극장

평점 : ★★★

간단평 : 감동적인 소재로 영화의 씨를 뿌렸으나 활짝 꽃피지는 못했다. 스토리가 전개가 엉성하고 감독의 설정이 조금은 비약적인 듯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소재와 제목이 주는 감동이 있었다. 에너지를 얻은 영화다.


이 글은 영화리뷰라기보다는 리더십/ 자기경영 컨설턴트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화두가 던져진 후에 느낀 생각을 적은 글이다. 영화에 대한 얘기는 끝에 살짝 다뤘다.

'내생순'이 아니라 '우생순'이어서 좋았다.

리더십에 관심이 있고 함께 더불어 행복으로 가는 것을 꿈꾸는 내게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팀워크가 만들어지고, '한국 핸드볼 국가대표팀'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의 성과를 만들어낸 것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 아니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기에 내게는 좀 더 진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이겠는가. 다함께 피어야 봄이 오겠지.
물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에 대한 생각도 하였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하려 한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되기 위한 조건

주인공들의 치열함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 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어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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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던가? 그래서,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이 있었던가?

먼저,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어떠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했다. 성과가 좋더라도 나의 혼신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면 별로 기쁘지 않았다. 지난 해 첫 책을 출간한 어느 선배의 말은 잔잔했지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담담해. 아마도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책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아.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내가 생각하는 '생애 최고의 순간'에는 '치열한 노력'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한 가지 조건이 정해졌다.

잇따라 든 생각은 치열한 노력의 대상이었다. 이왕이면 좋아하는 일이면 더욱 기쁠 것이다. 물론 싫어하는 일에도 치열한 노력을 하여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지는 기쁨이 극대화되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연출되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본다. 여기서 이 영화가 한 가지의 힌트를 준다. 저들은 금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결과가 최고면 더욱 기쁘겠지만,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다고 해서 '최고의 순간'이 될 자격을 상실하는 것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각이 일단락되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치열한 노력을 다하여 결과까지 보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없이 아무 일에나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전율케 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시작한 일을 설렁설렁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함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간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근성을 발휘하여 결과를 보는 것이다.


그 결과가 실패라고 하더라도 과정이 아닌 끝을 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실패든 성공이든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과정에서의 포기가 실망스러운 것이지 결과를 본 실패는  절대로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시도로 자신의 개인사에 기록될 사건이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던가?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결과까지 몬 것이 언제였던가?

부끄럽지만, 너무나도 부끄럽지만 아직 그런 장면은 없었다. 몇 가지 후보는 있지만 대부분이 혼신의 노력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후보에 불과하다. 그 후보들은
- 첫 책을 출간하기로 2006년에 계약을 하고, 원고를 마감했던 2007년 10월 17일
- 한국리더십센터 입사를 위해 이력서와 자소서를 완성하여 면접을 본 후 합격했던 2002년 9월
- 20대 초반에 강사의 비전을 품고 열심히 강의를 할 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숱한 날들
- 육군훈련소 퇴소식에서 육군훈련소장상을 수상했던 장면

이런 장면들이 10개 이상 떠올랐지만, 나를 전율시키는 정도는 아니었다. 결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를 위해 나는 보다 더욱 소중한 것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고, 그 집중에 대한 최고의 노력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상무와 LIG의 남자 배구 경기를 보았다. 경기 전 몸을 푸는 장면을 보았는데, 감동적이었다. 스파이크를 때리기 위해 그들은 하늘로 솟아올랐고 세터는 그보다 더욱 높이 배구공을 띄워올렸다. 배구공이 내려오고 선수는 점프를 하고...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선수를 가장 높은 지점에서 배구공을 힘차게 후려쳤다. 상대의 수비가 없는 빈 곳에 공이 꽂히면 득점을 할 것이다. 세터는 이번 기회의 공격을 누가 시도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공을 보낼 것이다. 세터의 공이 향하는 지점에서 공격 선수는 힘차게 도약을 하고, 상대 코트의 빈 곳을 향하여 힘차게 스파이크를 때린다.

나는 세터가 된다. 올해에는 어떤 시도를 해 볼 것인가? 내가 도전해야 할 중요한 목표는 뭘까?
나는 공격수가 된다. 힘차게 도약하여 최고의 높이에서 공을 후려치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내 삶에 재현하기 위해 나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싶다.
나는 득점을 하고 싶다. 헛손질을 하지 않도록 훈련할 것이며, 어디로 꽂아야 할지 내다볼 것이다.
그리고는 강하게 내려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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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우생순 명장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

개인적으로 꽤 감동적으로 본 영화다. 선수들의 코트 밖 생활을 보며 삶의 진짜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고 힘겨움을 딛고 일어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선수들의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런 개인적 감상에 관한 얘기는 지금까지 했으니 이제 이 영화에 대한 아쉬운 점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본다.

1. 새로 부임한 대표팀의 감독(엄태웅님)의 설정이 엉성하게 느껴졌다.
스포츠 선수가 아니고, 그 쪽 세계를 잘 몰라서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리더십을 살짝 공부한 나로서는 그가 부임 초반에 보인 행동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존의 질서를 저렇게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감독들은 모두들 뛰어난 리더십 철학을 가지고 있을 터이고 실제로도 뛰어나는 리더들이 많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아줌마 선수들의 무조건적인 반대자로 설정되어 있는 감독 역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영화의 갈등 구조를 위한 설정이라고 해도 억지스러워서 설득력이 없다.

2. 아줌나와 대표팀 감독, 그리고 아줌마와 젊은 선수들의 화해 과정이 비약적이었다.
분명 첨예한 대립를 보였던 관계였는데, 어느 새 저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한 완벽한 팀이 되어 있었다. <델마와 루이스>라는 영화가 보여준 감동은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우생순]에는 그러한 개연성이 없었다. <델마와 루이스>를 아시는지? 두 아줌마가 둘만의 여행을 떠났다가 겪게 되는 사고들을 다룬 영화인데,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이 엄청난 간격을 보여주는데, 끝으로 가는 과정이 그 엄청난 틈을 비교적 잘 메워준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도 비약적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우생순> 조금 더 비약적으로 보인다. 감독의 설정이 엉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곳곳에 배치된 유머와 재치를 통한 웃음이 즐거웠지만 스토리 전개가 아쉬웠다.
영화의 줄거리는 아테네 올림픽 핸드볼을 향한 도전의 스토리지만, 이것 이외에도 이야기는 많다.
문소리가 남편의 사업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분투의 장면들
대표팀 감독과 김정은의 러브스토리도 아닌 뭔가 어쩡쩡한 장면들
아줌마 선수들과 대표팀 감독의 갈등 상황의 장면들
이런 장면들이 다소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조금만 더 유기적으로 메인 스토리와 조화되었다면 하는 작은 아쉬움이다.

글의 처음에 밝혔던 간단평을 옮김으로 글을 맺는다.
감동적인 소재로 영화의 씨를 뿌렸으나 활짝 꽃피지는 못했다. 스토리가 전개가 엉성하고 감독의 설정이 조금은 비약적인 듯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소재와 제목이 주는 감동이 있었다. 이제 그 감동을 내 삶으로 실현할 일이 남았다. 내 삶을 향한 에너지를 얻은 영화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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