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받아들이기

- 영화 <콰르텟> 감상기 

 

 

1.

<콰르텟>은 상실을 다룬 영화다. 피해자는 세상의 모든 노인들이고, 피의자는 쏜살같이 빠른 세월이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은 젊음이다. 세월은 저만치 흘러갔고, 영화 속 주인공인 4명의 은퇴한 뮤지션들은 이만치 늙어갔다. 씨씨(폴린 콜린스)는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고, 최정상급의 소프라노였던 진(매기 스미스)도 은퇴하여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세월은 한 세대를 풍미한 음악가라도 해도 비켜가지 않았다.

 

2.

“재능이 사라졌어.” “그런 게 인생이야.”

 

이야기는 은퇴한 음악가들이 모여 사는 비첨하우스에서 진행된다. 진은 비첨하우스로 입주하고서 전 남편 레지를 만났다. “왜 음악을 관두게 됐어?” 레지가 물었다. 진은 비평가들이 두려워졌다고 말했다. 더 이상 예전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레지는 자신이 메모해 둔 쪽지를 보여주었다. ‘창작은 비평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외롭고 영원한 길.’ 또 다른 장면. 진은 세월이 흘러 예전같이 노래를 부를 없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젊은 날의 재능이 사라졌어.” 레지가 대답했다. “그런 것이 인생이야.” 젊은 날들의 체력, 열정, 재능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이 인생이다.  

 

3.

나는 글의 서두에서 <콰르텟>을 노년의 영화라고 쓰지 않고, 상실의 영화라고 썼다. 노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젊음을 잃어가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1년 전의 젊음을 상실하며 산다. 모든 사람들이 젊음과 이별하며 산다는 점에서 <콰르텟>은 노인들만의 인생이 아니라, 누구나의 인생을 담은 영화다.

 

사람은 스물다섯까지는 성장하고 이후로는 노화가 진행된다. 그러니 스물다섯 이상을 먹은 사람들이라면, ‘이건 우리 할머니 영화네’라고 치부해 버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시간의 의미와 젊음의 소중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라면, 자기 연령대와는 상관없이 <콰르텟>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나이든다는 것의 의미를 음미할 것이다.

 

나이 들어감에 집중하여 예민해지자는 말은 아니다. 나이 듦은 예민해질 일도, 외면할 일도 아니다. 예민해질 수도 있지만, 담담해질 수도 있다. 외면하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을 밀쳐두는 행위다. 나는 항상 나탈리 골드버그가 말한 “자기 인생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실천하며 살려고 한다. 받아들이고 음미하다 보면 깨닫고 배우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4.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음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그것이 젊음이었음을 깨닫는다. 야속한 젊음이다. 영화는 젊음의 상실이 처음엔 당황스럽더라도 나이 든 자신의 인생과 점점 화해해가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고마운 영화다. 영화를 통해 자기 삶을 성찰할 기회를 마련하기만 한다면.

 

5.

인생이란 크고 작은 상실이 가득한 여정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여러 물건들을 잃어버렸다. 작은 상실들이었다. 한때는 뜨겁고 소중했던 관계도 세월이 흐르면서 관계의 폭과 깊이가 변화되기도 했다. 관계의 틀어짐은 큰 상실이었다.

 

언젠가는 아직 은혜를 갚지 못한, 아니 영원히 못 다 갚을 부모님과도 그리고 한평생 정을 쌓아온 배우자와도 헤어져야 한다. 이것은 가슴이 미어지는 상실이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상실들을 만나야만 하는 여정, 그것이 인생이다.

 

피식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 또 하나의 상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요즘 탈모 관리를 받고 있다. 친구들보다 탈모가 빨리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문득 슬프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자신의 머리칼과 이별한다. 내가 그렇다는 사실이 유감이다. 어제는 유감을 넘어 조금 우울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주인공 레지의 헤어를 부러워했다. 그는 백발이지만 머리칼이 풍성했다.

 

6.

“내게는 노래와 인생 둘 다 중요해.”

 

한평생을 살아온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건진 인생의 지혜도 많았다. 레지는 젊은 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진에게 말했다. “내게는 노래와 인생 둘 다 중요해. 당신에게는 노래만 중요했지.” 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진은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다 잃었어. 보석 몇 개와 시원찮은 고관절 밖에 없어. 여기에 온 것도 봉사단체의 후원을 받아서야.”

 

노래뿐만 아니라 인생이 중요하다는 것은 영화가 붙잡고 있는 줄기다. 주인공들에게 노래는 직업이었다. 인생은 우정, 산책, 건강, 즐거움 등 직업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영화 속에 등장한 두 노인네 듀엣은 “돈이 많으면 무엇하리, 오늘 웃었는지,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를 노래했다.

 

7.

탈모관리를 위해 돈을 지불한 나는 값비싼 대가도 기꺼이 치르며 젊음을 유지하려는 풍조에 올라탄 것일까?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게서 영화 속 진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나는 탈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다.

 

당황스럽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밀쳐내지는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자신도 있다. 조만간 한 달에 5~6회 정도 탈모관리를 받고 있는 현실과도 화해할 것이다. 결국 나는 자유로이 살고 싶으니까.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우리 자유의 경계다.”

 

진은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받아들였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기 좋은 대로 해석하는 일을 멈추고,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말이 내게 힘을 준다.

 

“신기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영화 <휴고>는 한 인물,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했다. 영화의 역사에 무지한 내게, 그는 생경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영화인들에게도 가물가물한 이름일지도. 하나의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모두 그 산업의 창시자를 기억하는 건 아닐 테니까.) 생경한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야말로 <휴고>를 연출한 마틴 스콜세지의 목표였으리라.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1895년, 조르주 멜리에스는 서른 네살이었다. 마술사였던 그는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에 흥분했다. 곧장 카메라를 구입하여 트릭과 기술을 활용한 단편물을 만들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영화 종합촬영소를 세우는 한편, 500여편의 영화를 만들어 1900~1910년대의 영화계를 이끌었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만년은 비교적 평범했거나 초라했다. 영화 <휴고>에서, 그는 장난감을 팔고 수리하는 일을 하며 아내와 함께 사는 노인이다. 그가 영화와 무관하게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로, 세계대전의 결과로 사람들의 영화와 같은 여가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까닭을 들었다. 영화에서는 그의 만년을 무난하게 그려낸 셈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이 말하는 조르주의 만년은 조금 다르다. "변화없는 트릭 기술의 반복과 개인적인 기술자 기질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부진하여 만년은 빈곤하였다." 모든 사람의 성공과 몰락은, 환경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재능적 요인과 불찰이 어우러진 결과임을 감안할 때,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낸 조르주는 조금은 미화되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영화 <아티스트>의 주인공인 '조지'처럼 계속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을지도 모르니까.

 

"고된 작업이었지만 즐거웠다.

그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었고 영광스러웠다." - 스콜세지 감독

 

미화라도 좋다. 감독으로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전부가 아닌 일부를 보인 것이지 과장이나 거짓은 아닐 거라는 짐작도 들기 때문이다. 스콜세지는 "영화의 모든 것은 조르주 멜리에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난 미화에 신경쓰이기보다는 조르주의 명성을 복원해낸 연출력에 놀랐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조르주가 만든 영화'가 여럿 등장한다. 나는 그 영화를 '구닥다리'가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르주가 영화사에 남긴 업적에 감동했다. <휴고>라는 영화가 아닌 다른 곳에서 조르주의 영화를 보았더라면, 유치하고 기술력 떨어지는 영화 정도로 스쳐지났을 법한데, <휴고> 덕분에 당대의 의미를 느끼며 감상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며, 역사를 접할 때의 태도를 생각했다. 역사 속의 무언가를 평가하거나 접하게 될 때면, 현재의 관점이 아닌 당대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또한 당대에 어떠한 변화와 의미를 주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스콜세지는 나를 80년 전으로 데리고 가서 당대의 시선으로 조르주와 그의 영화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소년 '휴고'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후반부로 가면서 '조르주'에게로 옮겨갔다. 흐름은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영화 제목이 <휴고>인데다 초반부에 워낙 '휴고'를 위주로 진행되던 영화였기에 극장 문을 나설 때에는 제목의 적합성을 잠시 생각했었다. 감사 혹은 존경을 뜻하는 프랑스어, '오마주'를 제목으로 하면 어땠을까? 

 

나에게도 오마주의 대상이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나서 떠오른 질문이다. 문필가와 작가 몇 명이 떠올랐다. 아직은 깊이 존경할 만큼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부끄러웠던 것은 삼십 대 중반 즈음이라면, 관심 있는 인물에 대한 공부를 깊이 해 둘만한 것 같기도 해서다. 이런 류의 생각을 할 때마다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공부는 내 운명인가 보다. 아니면 이루지 못할 염원이던가.

 

'영화'라는 매체의 힘에 대해서도 새삼 다시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로도, 책으로도 전할 수 있겠지만 영화로 전달하는 힘은 그것들과는 또 다른 힘이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는 생각은 아니지만, 폭넓은 대상에게 다가서는 힘이 다른 매체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에 영화를 좀 더 자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육자인 내게 영화는 괜찮은 교육 도구가 될 테니까.

 

자신의 대선배에게 바치는 오마주인 <휴고>는 영화의 탄생과 초창기의 역사를 긴장감 있는 스토리로 맛볼 수 있는 영화다. <휴고>에 이어 <아티스트>를 본다면 영화의 탄생에서부터,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대까지의 영화사를 공부하는 셈이 된다. 영화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좋은 공부꺼리가 되는 영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보보

 

 

 

1.

<방자전>은 내가 본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야했다. 그리고 조여정은 아주 섹시했다. <후궁 : 제왕의 첩>을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조여정의 노출신이었다. 하지만, 노출신은 많지 않았고, 조여정의 전라 연기도 수위가 낮았다. 벗겠다고 말한 영화가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때 분노와 아쉬움을 느낄 터인데, <후궁>은 그렇지 않았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2.

스토리가 흥미진진했다. 영화는 하나의 장면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빠른 장면전환도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일부 관객들의 스토리가 허술하고 비약적이라는 평가는, 전개가 빠르다 보니 중요한 한 두 장면을 놓쳤거나 영화를 보는 중에 연결하여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 스토리의 허술함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3.

<돈의 맛>은 부의 유혹을 다뤘다면, <후궁>은 권력의 유혹을 다뤘다. '유혹'은 달콤한 뉘앙스를 풍기니, 그보다는 권력의 '종말'이라도 좋겠다. '권력에 대한 탐욕이 어떤 결말을 만드는지'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그리고 쟁취 당하지 않기 위해 죽고 죽이는 상황이 이어지니까.

 

4.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어두운 면 한 구석을 제대로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나는 어두운 구석이든, 밝은 구석이든 제대로 보여주어 인간이해를 높여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부당거래>는 엔딩장면까지 치밀한 구성이었던 데 반해, <후궁>은 막바지에 가서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화연(조여정)이 권유(김민준)에게 "이 아이는 누구 아이도 아냐. 내 아이지"라고 말한 대목부터가 그랬다. 그때부터 조여정은 변한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하는 여인으로. 그녀가 변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권력을 잡으면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비의 죽음에 오열하던 효녀, 몸종에게 아낌없이 폐물을 내어주던 이가 권력의 화신으로 너무 빨리 변했다.

 

5.

어쩌면 스토리에는 문제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들과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숨죽이며 살던 화연이 궁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터득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만약 그렇다면 영화 후반부가 작위적이라고 느낀 것은 빠른 전개를 내가 따라가지 못했거나 조여정에게 감정이입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조여정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반증이다. 아비의 죽음에 오열하던 장면 등 조여정이 빛나는 장면이 많았다.

 

6.

만약 영화의 스토리에 찬탄한 다른 관객들도 나처럼 영화의 막바지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겠다. 권력의 끝맛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지나친 결과라고. 과욕은 무리수를 두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영화 <은교>의 베드신에서 은교(김고은 양)의 음모까지 보여준 것은 감독의 과욕 혹은 무리수였다고 생각한다.

 

7.

조여정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화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작품에 모든 것을 던졌고, 극중 인물에 몰입했다. 나는 자기 일에 미친 사람들의 모습을 동경한다. 한 배우가 작품에 흠뻑 젖어드는 몰입의 경험을 한다는 것, 나도 경험하고 싶다. 이것이 <후궁>이 내게 준 유익이다.

 

<덧>

배우 ‘이경영’에 대한 반가움을 느낀 영화기도 하다. 영화 초반, 옆모습을 보고서도 ‘어, 저 사람 이경영 아냐?’ 하는 반가움이 들만큼 그는 십대의 내가 좋아하던 배우였다. 개인적인 과오와 시련의 시기를 겪은 그가 힘차게 재기하기를 기원해 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경영지식인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주의 : 별 내용이 없는 시시한 글일 수 있음.


<7광구>를 보았다. 아쉬운 영화였다. 서사는 비약적이었고, CG는 엉성했다. 영화의 중반부에서부터 흥미를 잃었지만, 하지원의 열연 덕분에 잠들지는 않았다. '7광구'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내가, 7광구의 존재와 중요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 영화가 나에게 준 유익의 전부였다. 

영화를 보다가 결정적으로 흥미를 잃은 대목은 캡틴의 탈출 장면이었다. 해준(하지원 분)의 말처럼, 캡틴은 '현장의 치열함을 모르면서 이론만으로 결정'하는 리더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릴 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부하들을 버린 인간이었다. 

그도 부하들의 절규를 보며 잠시 갈등하긴 했다. 하지만, 선택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캡틴이 부하를 버린 대목에서, 나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좋았다. 캐릭터가 일관성을 유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몰염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상황에서 부하에게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영웅일 것이다.

문제는 다음 장면이다. 캡틴은 잠수정을 타고 석유 시추선을 안전하게 탈출했다. 해저로 서서히 돌진하는 잠수정! 그런데 돌연 괴물이 나타나 잠수정을 습격하여 캡틴을 죽인다. 불의한 자의 비참한 결말에 속이 시원할지는 모르겠지만, 스토리의 리얼리즘은 크게 손상되었다. 괴물을 자신이 쫓던 이들을 잠시 놓아두고 시추선에서 어찌 해저로 한걸음에 달려왔단 말인가.

(시추선 아래로 떨어진 동수(오지호)가 밧줄을 타고 탈출하는 장면, 괴물과 해준(하지원)기나 긴 사투도 사실성이 떨어졌다. 캐릭터 중에는 송새벽과 박철민의 활약이 컸다. 약방 감초처럼 적절할 때마다 웃음과 감동을 주었다. 비중 있는 오지호와 안성기보다 인상 깊은 장면을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SF  액션 장르에 리얼리즘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최소한의 스토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서사는 극의 기본이다. <7광구>에는 그 기본이 없다. 석유시추선에 오르게 된 인물들의 사연도 없고, 괴물의 탄생 배경도 시간 설정이 헷갈렸다. 해준과 동수의 러브 라인도 약했고, 위기 대처 상황에서의 등장 인물들이 보여 준 캐릭터의 표현도 악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 캐릭터를 일관되게 표현해야 한다. 표현의 결과로 괴물은 괴물다워야 하고, 주인공은 주인공다워야 한다. 불사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위기나 갈등과 같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기 캐릭터를 보여 주어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7광구>의 위기는 그저 쫓고 쫓기는 위기일 뿐, 위기를 통한 인물의 캐릭터 표현과 극적인 긴장감을 몰아가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장르 영화의 승부처가 되어야 할 컴퓨터 그래픽도 엉성했다. 해준과 동수가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은 영화가 아니라 게임의 배경처럼 어색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집중도가 좋은 편이지만, 서너 번은 '저건 정말 CG 티가 너무 나는구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결론! <7광구>는 실망스러웠다. 영화 지식이 없어 실망의 원인을 분석할 순 없다. 그저 아쉬운 감정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실망의 감정을 나열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인가? 아니다. 질문 하나가 생긴 것이다.
"삶을 살다가 어떤 것에 실망하게 될 때, 어떡해야 하는가?" 흔히들 얘기하는, 실망을 줄이는 법은 기대를 낮추는 것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대감이 주는 떨림과 흥분은 긍정적인 것이니까.

실망을 느낄 때의 대처법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실망을 줄 만큼 시시한 것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것이 시시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는 감탄을 줄 만한 대단한 것들도 많으니까. 시시한 것을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조금씩 시큰둥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든지, 안목 있는 이들의 조언을 듣기 위해 부지런히 검색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시큰둥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에이 한국 영화는 역시 별로야'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않는 것이다. 방금 보았던 영화가 시시했을 뿐이다. 부분의 특성을 전체의 특성으로 착각할 때, 우리는 편협해진다. 전체에 대한 판단은 섣불리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성격이 복합적인 것 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새로운 최신의 것이 항상 가장 좋은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교훈도 기억하자. 감탄할 만한 대단한 영화를 찾는다면 신작 개봉관만을 찾을 일이 아니라,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가슴을 뒤흔들 대단한 책을 찾는다면 신간 코너를 뒤적일 게 아니라 인류사라는 시간의 검증을 견뎌 온 고전 한 권을 읽는 게 나을지도.

시시한 영화 하나를 먼저 접한 자로서, 누군가에게 "이것은 시시해요"라고 말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시시한 것에 투자한 내 시간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노력이 부질없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보지 않으려고 했다가 이 글 때문에 '7광구'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또 무슨 상황일까? 인생은 그렇다. 예측불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리더십/ 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컨설트 ceo@younicon.co.kr 

'™ My Story > 끼적끼적 일상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어디에 사세요?  (7) 2011.10.20
자기경영학의 필수과목  (5) 2011.09.09
<7광구>, 시시한 영화 대처법  (10) 2011.08.07
나의 어머니  (20) 2011.08.05
나를 알리는 일의 힘겨움  (10) 2011.07.19
그만 살까, 하는 생각이 들때  (6) 2011.07.12
Posted by 보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황해>

남자를 움직이는 것들

★★


2010년 1월 개봉한 <파라노말 액티비티>란 영화를 보셨는지? 영화는 잔인하지 않다. 피를 흘리는 장면은 하나도 없고, 무서운 흉기나 귀신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무서움으로 전율했다. 공포영화나 스릴러를 많이 보지 않아서 이런 말 하긴 머쓱하지만,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내가 보았던 가장 무서운 영화다. 며칠 동안, 밤마다 영화 장면이 생각나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어느 날엔,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옷을 주섬주섬 집어 입고 친구 집에 가서 잤다. 무서워서라고 말하진 않으련다. 야밤에 친구가 보고 싶었던 게다.


내가 본 가장 무서운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무서움은 일상적이고 점진적이다. 그래서 현실적이다. 영화의 배경은 외진 산장이나 으스스한 분위기의 거대한 저택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침실이다. (내가 잠드는 방과 비슷하다.) 나는 영화에 쉽게 몰입했다. 매우 일상적인 장면이니까. 영화가 나를 사로잡은 도구는 일상성으로 조여드는 무서움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보고 극찬을 했고, 판권을 구매했단다. 나 역시 스필버그의 호평에 힘입어 관람했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게 만든 영화였지만, 바로 그런 경험을 해 주었기에 이 영화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일상성으로 공포 연출에 성공한 영화, 잔인하거나 괴기스럽지 않아 더욱 무서웠던 영화로.


잔인함은, 슬픔이나 불운보다 일상적이지 않다. 부모님과 일찍 사별한 아이들은 많지만, 끔찍한 사건으로 잃은 이들은 그보다는 적다. 잔인함으로는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끌어내기 힘든 까닭이다. <추격자>는 달랐다. <추격자>는 매우 잔인하면서도 관객의 감정이입을 매우 잘 이끌어냈는데, 그것은 깡패나 살인청부업자가 아닌 일반인 여성이 영화 끝까지 살아남아 주었기 때문이다. 나도 관객들도 여자 주인공의 무사귀환을 바랬을 터이고, 그랬기에 가게에서 그녀가 살해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토록 안타까워했다.


황해를 본 첫소감, 글쎄?!


반면, <황해>를 보며, 나는 어느 인물에게도 깊이 몰입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람했다. 죽이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잔인했지만, 그것은 살인청부업자들과 깡패들의 싸움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잔인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황해>를 보는 나의 감정이입은 처음에는 면가(김윤석)에게, 후반부에는 구남(하정우)에게 이루어졌다. 면가는 처음부터 구남의 귀국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면가를 지독한 악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구남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했으니까. 이것이 영화 이해를 다소 방해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실망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이후로 공포영화를 전혀 보지 않았지만 <황해>는 예외였다. <추격자>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추격자>는 무서웠지만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하는, 잘 만든 영화라 생각했다. <황해> 관람은 감독의 전작을 좋아한 내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첫 소감은 당황스러움이었고, 시나리오도 엉성하고 감정이입에도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움직이는 것들


영화를 본지 이틀이 지나 리뷰를 쓰는 지금은 영화에 대한 소감이 바뀌었다. 감독의 인터뷰와 <황해>의 줄거리를 다시 읽으며 영화에 이해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남자들은 대부분 그 정도와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돈, 여자, 가정 이 세 가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의 말에 영화에 대한 궁금증 혹은 답답함이 많이 해결되었다. 물론, 남자들도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한다. 다만 감독은, 남자들이 어떻게 살려고 노력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남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다룬 것이다. 사람은 이상과 현실을 모두 가진 존재지만, 감독의 '현실'의 모습만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김승현이 누구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면가는 김승현을 죽이려고 하지?' 영화 초반, 나의 의문이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쉽게 드러난 김승현의 실체. 그의 공식 직함은 교수지만, 실체는 어둔 밤 업계의 큰 손이었다. 김승현을 죽이려는 또 하나의 진범을 확인한 것은 영화 끝 무렵이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김승현 살인자는 면가의 살인청부를 받은 구남(하정우), 김승현의 운전기사다. 요컨대, 구남과 운전기사는 '김승현을 죽이고 싶은 이들'이 아니라, 죽이고 싶은 이들의 부탁을 받은 '김승현을 죽여야 하는 이들'이었다. 왜?


죽이려는 자들과 죽여야 하는 자들


이 모든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무엇일까? 구남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정을 지킬 돈이기도 했다. 운전기사 역시 거액의 돈에 매수된 듯하다. 우리 남자들은 움직이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분명 돈이다. 돈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영화 초반, 구남의 가정 이야기 등장한 것은 사건 전개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감독의 의도를 전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등장하고 장인어른이 등장하고, 영화 내내 구남의 딸아이 사진이 등장한다. 남자를 움직이는 또 하나는, 가족을 지키려는 책임감이다.


한편, 구남과 운전기사에게 돈을 준 이들은 무엇 때문에 김승현을 죽이려고 했는가? 살인을 청부한 두 남자는 김태원과 김정환이다. 이들은 여자 때문에 움직인 사람들이다. 영화 도중, 깡패 두목 김태원이 "그 자식(김승현)이 내 여자를 건드렸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의 애인인지 아내인지를 김승현이 '건드린' 것에 열받은 것이다.


은행원 김정환은 김승현의 아내와 내연 관계다. 김정환은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다소 우발적으로 그녀의 남편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우발적이라 한 것은, 김정환이 어느 술집에서 "죽이고 싶다"고 말한 것을 조선족이 듣고 자기 아는 여인이 살인청부업자를 안다고 소개한 것이다. 그 살인청부업자가 면가(김윤석)다.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를 읽고 나서야, 감독의 시나리오가 리얼리즘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엉성한 시나리오'라는 표현은 취소해야겠다. 2시간 4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긴장감을 풀어주지 않고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여전했다. 다만, 나는 왜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나의 이해력이 엉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련다. 나는 영화에 꽤 잘 몰입하는 편이고, 이해력도 평균은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감독의 자신의 좋은 시나리오를 제대로 표현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은 아닐까? 내가 영화를 뒤늦게야 이해한 원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감독이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2% 부족한 연출 때문이거나 혹은 극도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은 내가 너무 나이브(naive)하거나.


[덧1] 구남의 아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아내의 모습은 구남의 꿈일까? 아니면, 구남에게 아내의 사망 사실을 확인해 준 남자 역시 돈에 의해 움직였을 뿐이라는 또 하나의 슬픈 리얼리즘일까? (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변사체를 보고 구남의 아내라고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아내가 맞다"고 말했다.) 감독은 구남의 아내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단다. 나도 말하고 싶다. 구남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차피 마지막 장면은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먼 장면 아닌가. 중국을 여러 번 다녀 온 바에 의하면, 기차에서 구남의 아내처럼 홀로 내리는 장면은 있을 수 없으니까. ^^


[덧2] 구남에게 연민 혹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드는 까닭은 뭘까? 조선족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기분 좋은 호칭일까? 항상 식당에서 조선족을 만나 몇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나의 선한 의도를 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라스트갓파더

★★


영화를 보는 내내 에머슨의 글이 생각났다. "어른은 자의식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그들의 감정을 고려하느라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한다. 반면, 소년은 어른과는 다르다. "소년은 결과나 이해관계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 제 마음대로 순수하게 판결을 내린다. 오히려 우리가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랄프 뢀도 에머슨의 『자기신뢰 Self-reliance』 中)


자의식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의식 덕분에,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좀 더 평화롭게 살아간다. 에머슨이 언급한 것은 자의식의 역기능이다. 자의식은 도전의식을 좀먹는다.


프런티어 정신의 소유자, 심형래


영화에서 나온 슬랩스틱 코미디 장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에이! 이거 <변방의 북소리>나 그 뭐지 심형래가 펭귄 복장으로 나온 프로그램에서 모두 했던 거잖아. 창의성이 없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심형래의 도전정신이었다. 영화의 전개와는 상관없이 이런 생각을 이어갔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 혹은 가장 잘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무기다. 어쩌면 새로운 도전이란, 무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나 영역을 바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형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심형래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로 세계적인 영화 시장에 도전한 것이다. 나는 그가 프런티어 정신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비판이나 회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는 자의식의 역기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슬랩스틱 코미디 장면은 영화 내내 등장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이 영화는 별다른 재미를 주지는 못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초반의 슬랩스틱이 억지웃음을 만드느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웃음이 터졌다는 점과 영화가 한국을 알리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원더걸스가 실제로 등장하고, 추신수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를 본 3人의 반응 : 1명의 한국인과 2명의 미국인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뻔한 이야기 전개의 한심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 진지하게 임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했다. 특히 영구의 아버지로 분한 하비 케이텔과 대부의 오른팔로 분한 마이클 리스폴리(토니 역)의 열연이 고마웠다. 이 고마움은 애국심의 발로일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내가 왜 이 영화를 보고 있을까, 를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궁금한 것은 미국의 반응이었다. 나처럼 80년대 심형래의 코미디에 익숙한 시니컬한 관객이 아니라, 온 몸을 던지는 그의 유머를 처음 보는 그네들의 평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필명 'redion86'을 쓰는 미국인은 "진심으로 디워보다 훨씬 나아요. 미스터 심, 감독을 하고 싶으면 코미디 장르에 충실해 주세요. 공상과학 쪽에서는 프로듀서로서 더 적절해요. 아니면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내가 느끼기에, 'steakopera'라는 이의 글은 가장 호의적이었다. (어느 블로거가 영어 댓글을 번역해 둔 것을 인용했다. 출처는
http://database7.tistory.com/382)


"이거 잘 될 수 있겠는데. 이런 성격의 코미디를 접한 적이 없어서 미국인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어. 한국 버전의 <쓰리 스투지스> 같아. 심형래가 모든 걸 쏟아 부었어. 난 심형래가 영어로 해야 할 인터뷰가 더 걱정되는데, 그의 용기가 존경스러워. 그는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거라는 꿈이 있었잖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그를 응원해야 해. 웃기지 않으면 뭐 어때? 적어도 그는 노력했어. S.H.R(심형래) 파이팅!"


정작 심형래 본인은 이런 댓글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노력이 대단했다는 칭찬보다는 "맘껏 웃어 제친 영화였다"는 평판을 듣고 싶어할 테니까. 평론가들의 혹평을 예상했다는 듯 심형래 감독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론가를 위한 영화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남녀노소가 다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거예요. 어제 극장에서 온 가족이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대중들이 즐겨보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이 심형래의 영화철학이다. (진중권은 <디워>를 두고, 영화 철학이 없는 영화, 애국코드로 결점을 묻어버린 엉망진창 영화라고 폄하한 바 있다.) 철학이 무어 저리 경박하냐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면, 나는 침묵으로 대답하련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화하고 싶지 않지 않으니까.


심형래의 저력


어차피 난, 영화보다는 심형래 감독의 도전에서 느낀 바가 있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나 쓰련다. 먼저 그의 자신감이다. “영화는 전문가만 보는 게 아니에요. 1년에 한두 번 극장에 올까말까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요. 제 영화는 그런 사람들까지 끌어들입니다. 괜히 어렵게 만들고 배배 꼬고 싶지 않았어요. 제 영화가 흥행하면 그건 시장을 잠식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거예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관객의 평가를 받고 싶어요.”


촬영장에서의 첫 3일 동안 스탶들의 반응이 싸늘했다던데, 그것을 이겨내고 결국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그의 실행력이다. 개봉 1주일이 채 못 되어 130만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하니 (아직 초반이긴 하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러 많이들 왔다. 이것이 그의 대중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리우드 진출을 꿈꾼 게 사실이라면 그는 비전가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실망했어도, 그의 꿈꾸고 도전하는 삶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싶다.


진중권에 대한 단상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 "유감스럽게도 난 한 번 불량품을 판 가게에는 다시 들르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이번에는 봐드릴 기회가 없을 거 같다"고 썼다. <디워>를 불량품으로 비유한 것이다. "예전처럼 심빠들이 난리를 친다면 뭐 보고 한 마디 해드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불상사는 다시 없기를 바란다."고도 썼다. <라스트갓파더>를 안 보겠다는 말이다.


나는 진중권의 불량품 론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대할 때에는 '어제의 그'가 아니라, '오늘의 그'로 대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어제보다 선해질 수 있고, 도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불량품을 파는 것은 '가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그 가게는 언젠가는 불량품 대신 질 좋은 상품을 내 놓을 수도 있다고 믿어야 한다. 디워가 불량품이란 건 아니다. 그 영화는 못 봤다.


(사실, 가능성 자체는 선악, 옳고 그름이 없는 중성적 개념이다. 선해질 수 있는가 하면, 추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으니까. 인간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지녔다. 그러니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나의 담론이 낭만적이고 나이브한 수준을 넘어섰음을 밝힌다.)


20대 초반과 중반, 나는 강준만과 진중권의 책을 뒤적이면서 지적 자극을 많이도 받았다. <인물과 사상>의 지면을 통해 벌어진 두 사람의 지적 논쟁은 쾌감을 줄 정도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 분들의 책을 읽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강준만의 삶과 태도는 여전히 존경하지만, 진중권은 지식 전문가로서만 존경하기로 했다. 그 분은 종종 인간의 다양성을 간과하거나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쉽게 단정 지어 버림으로 좀 더 필요할지도 모르는 인식의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코미디 영화?


<라스트갓파더>는 오락영화다. 의미와 교훈, 그리고 진정성을 추구해 온 내게 필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나 조정래의 소설이 아니라, 이런 코미디 영화인지도 모른다. 조정래 선생의 『황홀한 글감옥』은 내게 매우 유익하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나 역시 조정래 선생처럼 리얼리즘과 역사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리얼리즘과 역사의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역사의식이 없는 개인을 '문제적 개인'으로 여겨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니까. 고행이 나를 높은 의식 수준으로 끌어준다고 하여, 모든 이들에게 고행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고행주의'가 되어 인간의 고유성을 말살한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은 삶의 전영역을 지배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다. 리얼리즘이 삶에 도움을 준다면, 코미디 역시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이가 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고 하면, 이것을 열등한 삶의 유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게다.


나는 어떤 지식인이 되고 싶은가?


얼마 전, QOOK TV에서는 2010년 한국영화 화제작 Best 3편이라고 하여 <이끼> <하녀> <아저씨>를 홍보했다. 공교롭게도 관람한 영화가 하나도 없어서 1월 중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얘기를 들은 한 지인은 "요즘 한국 영화는 왜 이렇게 잔인한지 몰라"라고 말했다. <아저씨>도 잔인해요? "그럼, 그것도 좀 무서운 영화지." 검색해 보니, <아저씨>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다.


심형래의 말을 곱씹게 된다. "온 가족이 다함께 볼 수 있는 예쁜 영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올해(2010년) 개봉한 한국 영화들을 한 번 보세요. 찌르고 죽이고 심지어 인육을 먹고…. 어떻게 아이들 손잡고 극장엘 가겠어요?"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보니 잔인한 한국 영화가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한국 영화의 그런 흐름을 인지하여 코미디 영화를 만든 것인지는 내가 알 길이 없다. 허나, 심형래의 말들, 한국 영화에 대한 지적과 그의 영화철학은 내게 생각꺼리를 안겨다 주었다.


나는 지식인을 꿈꾼다. 책이나 영화에 대하여 좋은 평론집을 내고 싶다는 꿈도 가졌다. 전문가도 사람인데, 심형래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럼 전문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과 감성을 지녔다는 말인가. 물론 지성은 남다른 면이 있어야겠지만, 그 지성이 사람들의 더 나은 삶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고민하는 전문가라면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감성을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도와 준 영화나 책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가 되기 이전에 공감력과 포용력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내게는 『죄와 벌』보다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추천을 하고 싶지는 않다. 독서를 할 때에는 리얼리즘에 매달려 온 내게 가장 적합한 진단이니까.


이런 생각을 이끌도록 도운 이는 심형래인가? 진중권인가? 아니면, 에머슨인가? 조정래인가? 정답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다. 모든 분들의 영향으로 이 글을 썼다. 글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라, 짧은 글 한 편도 여러 사람들의 덕분임을 말하고 싶다. 내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겠지만, 그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꾸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투어리스트

★★


얌전해진 졸리 + 어수룩한 조니 뎁 = 어중간한 영화

모두들 섹시하다고 말하는 안젤리나 졸리인데, 나는 그녀가 예쁜 줄 모르겠다.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외모 아니, 오히려 날이 선 얼굴선이 다소 부담스럽다. 송윤아나 소녀시대의 서현처럼 부드러운 인상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영화 <투어리스트>에서 볼거리는 오직 그녀뿐 이라는데, 그렇다면 나에겐 이 영화는 볼거리가 없는 영화다. 별 두 개를 준 것은 베니스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어리스트>는 예고편을 두 번 보았다. 배를 타고 쫓고 쫓기는 스릴 넘치는 추격신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액션영화인 줄 예상하면 실망할 것이다. 안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액션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적응력이 뛰어난 이들은 영화의 흐름을 얼른 쫓아가며 자신의 관람 모드를 로맨틱 드라마로 재설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실망할 것이다. 로맨틱 드라마치고는 아기자기만 사건이나 섬세한 감정의 터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영화 전체를 짜 맞춘 느낌마저 들어, 반전의 효과가 감한 것도 영화에 대한 마지막 호감도를 떨어뜨린다.

영화는 두 흐름이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어느 수학교사(조니 뎁)가 기차에서 만난 여인(안젤리나 졸리)을 좋아하게 되어 그녀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고, 갱 두목의 돈을 훔쳐 달아난 '알렉산더 피어스'라는 대범한 인물을 경찰과 갱이 함께 쫓는 것이 다른 흐름이다. 두 줄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만나 하나의 큰 강을 이뤄야 하는데, (과장을 보내어 표현하자면) 영화에서는 물과 기름처럼 두 흐름이 서로 섞이지 못했다. 내가 수학교사 프랭크에게도, 피어스에게도 몰입하지 못한 이유다.

극장을 빠져나오며 오락영화는 즐기는 마음으로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웃고 즐기자고 만든 영화라면, 오락 영화임을 전면에 내세워 관객이 엉뚱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홍보해야 한다. 융통성이 없는 관객들은 자기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비난을 하기도 하니까. 나처럼 액션영화나 스릴영화로 인식한 관객들이 있었던 것 같다. 융통성이 충만한 이들이 오락물이라는 한껏 감안하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그들 역시 비난할 것이다. 그러니 <투어리스트>는 이런 저런 이들에게 악평을 받을 것 같다. 이런 영화인 줄 몰랐다는 이유로, 엉성하거나 재미없다는 이유로.

나는 베니스의 풍광을 감상한 것과 졸리의 대사 하나에 만족하련다. "어머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야누스처럼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면을 모두 받아들이는 거래요." 그 사람의 장점과 함께 단점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스물 한 살 때 깨달았지만, 서른이 넘어서야 조금씩 실천하고 있는 사랑의 진리다. 이 진리를 내 삶에서 한껏 실현한다면 영화비 정도는 아깝지 않은 투자가 될 것이다.

[덧1]
<투어리스트>의 감독, 플로리언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이름 참 어렵네)가 <타인의 삶>이라는 작품성 뛰어난 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타인의 삶>은 전세계 21개의 상을 수상한 수작이었다. 검색하니 주요 수상목록이 나왔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외국영화상 (2007)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외국영화상 (2008)

뉴욕 비평가 협회상 최우수 외국영화상 (2007)

LA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2006)

런던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영화상 (2008)

그런데 왜? 감독은 두 번째 영화를 이렇게 찍었을까? 나만 별로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할리우드에 영혼을 팔았다"는 첩보도 있다. (첩보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말한다.) 영혼을 판 것은 사실인지, 팔았다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진다. 영혼을 판 것이 아니라면, 전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영화가 만들어진 원인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조만간 <타인의 삶>을 보아야겠다.

<주의 : 두 번째 덧말에는 스포일러 있음>

[덧2] 묘하게 프랭크(조니 뎁)가 갱에게 쫓겨 지붕 위를 달려 도망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중요한 장면도 아니고, 멋진 장면도 아닌데 말이다. 잠옷을 입고 어설프게 도망가는 모습이 참 엉성했다. 그렇다고 유머러스하여 관객을 웃기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 어중간한 장면이었다. 영화에 대한 나의 느낌을 표현한 장면이어서 떠오른 걸까? 프랭크도 결국 갱 단원인데 도망가는 모습이 왜 저리도 어수룩한가? 그 절박한 순간에 일부러 어수룩하게 보이려고 노력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어설픈 갱이었는가? 이것은 졸리가 기차에서 알렉산더와 가장 비슷한 인물로 프랭크를 찍은 장면의 어설픔과도 연결된다. 가장 비슷한 인물을 결국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이렇듯 앞뒤의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 서사를 헤치는 대목들이다. 반전과 즐거움을 위한 짜맞추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초능력자

★★★


영화의 전반부, 아이가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어지는 장면, 어미에게 해코지를 하는 모습도 다소 무서웠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이후엔 다시 그런 장면이 반복되지 않은 것이 내게 숨통을 터 주었다. 영화는 선량한 세 남자, 임규남(고수 분)과 그의 직장 동생들이 등장하면서 밝아진다. 규남은 가진 것 없는 블루컬러 노동자로서 착하고 정의로운 사나이다. 규남을 따르는 두 동생은 외국인 노동자다. 이들 역시 사회의 약자로 지내지만, 선의로 가득한 인물들이다.


별점이 인색한 것은 영화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숨어버린 듯하고, 그래서 결말이 다소 엉성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 중 일부는 엔딩 장면에 대해 "이게 뭐야?"라는 식의 황당함이었다. 나 역시 잠시 영화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물론, 모든 영화가 교훈적일 필요는 없지만 나는 이렇듯 나에게 주는 어떤 메시지를 찾는 편이다.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영화의 흠집을 좀 더 잡아보련다. 나는 초인(강동원 분)이 범죄할 때마다 답답했다. 초능력에 의해 세상이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초인의 범죄 장면이 그대로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경찰에게 넘어갔을 때에는 '이제 됐다' 싶었는데, 테이프의 행방은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묘연해진다. 이 점은 납득하기 힘들었고, 규남이 총알을 2방 맞고도 꿋꿋이 목숨을 이어가는 불사조의 주인공 모습을 보인 것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교훈은 있다. 영화는 '다름(Difference)'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초인은 자신이 남들과 달라서 오는 힘겨움을 여러 번 토로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배척당하거나 차별을 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선입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눈은 말한다. 당신은 틀렸다고. 혹은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해서 그럴 거겠지, 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와 다른 사람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폭력적인 시선도 있다.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나라도 점점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외국인 노동자도 많이 늘었다. 한국 영화 <의형제>와 <초능력자>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등장했는데, 사회의 변화상을 느낄 수 있었다. 소수자를 존중하는 문제는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다수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자>
는 여러 소수자를 등장시킨다.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하고, 장애인이 등장한다. 2010년 부로, 우리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는 50만명을 넘었고, 결혼하는 10쌍 중 한 쌍은 국제결혼이라고 한다. 분명 소수자들이지만, 적은 숫치는 아니다. 절대적인 소수자는 주인공 초인(강동원 분)이다. 그는 단 한 명,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영화가 전개되는 줄곧 가해자로만 보였던 그가 약자와 소외받은 자로 느껴진 것은 영화의 결말에서였다. 초인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힘겨워했고,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는 초인이기도 했지만, 소외받은 자, 사회가 부를 이름이 없는 자이기도 했다.


규남은 초인의 초능력에 조종당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규남의 정의로운 활약을 알고 있는 사람은 초인 뿐,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초인이 규남의 추격을 방해하기 위해, 어느 여성의 아이를 달려오는 지하철을 향해 내던지는 장면이 있다. 규남은 아기의 목숨을 가까스로 건져냈다. 물론 여기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은 초인의 초능력에 의해 멈춰 있다. 규남의 정의로운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은 초능력에서 풀려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아기는 살았고, 규남은 피를 철철 흘리는 중상을 입는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규남은 장애인이 된다. 건강하던 신체를 가졌던 규남을 누군가를 돕다가 장애인이 된 것이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분들은 혹시 우리를 구하려다 모두 지금의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들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물론 과대망상일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걷다가 좀처럼 장애인을 만나볼 수 없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들의 눈이 권력과 이익만을 중시하는 눈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중국의 실천적 지식인 류짜이푸의 한탄이 떠오른다.

"세계의 눈이 과학기술로 무장된 이후에는 천리 밖이나 만리 밖까지, 심지어는 억만 광년 밖까지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눈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반짝거렸지만, 아쉽게도 이 두 눈은 끊임없이 고층 건물이나 만리장천을 보았을 뿐 사회의 하층은 보지 않았다. (중략) 기자의 카메라는 지도자, 부호 및 유명 인사를 추적하지만 가난한 산촌과 갱내(坑內)로 카메라 렌즈를 돌리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영화 <초능력자>는 내게,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영화였다. 나의 관심도 '반짝'일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 모두는 비장애인이 아니라, 예비 장애인이라는 어느 사회복지사의 말을 곱씹어 본다. 시민단체 활동이라고 하나 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시들해질 마음일 것만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

Posted by 보보



부당거래

★★★★☆


극장을 나오며 든 생각은 인간의 본성을 참 잘 다뤘다는 것이고 집으로 돌아와 한 일은 누가 각본을 썼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각본 박훈정. 각본까지 챙겨 기억하기는 처음이다. 영화가 준 감동이 컸기 때문이다. 감격적이거나 아름다운 스토리가 아닌 비열한 이야기로 감동을 얻을 수 있음이 놀랍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 준 영화도 감동적이지만, 인간이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옮겨 놓은 영화도 감동적일 수 있음을 보았다. 세상의 빛과 그늘을 모두 체험하고 느껴야 균형있는 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빛과 그늘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항상 반쪽짜리 지혜가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부당거래>를 통해 얻은 것은 재미와 감동 뿐만이 아니었다. 관람 후 '폭풍처럼' 밀려든 생각들로 나는 수십 분 동안 멍하게 있어야 했다. 한꺼번에 매우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잠잠해졌다는 점에서 
폭풍이라 할 만했다. 생각을 금새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정리되었다는 말이다. 잘 마른 옷을 색깔별로 서랍장에 개어넣듯이 영화의 주요 스토리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나의 패러다임에 생각별로 잘 정돈되었다. 낭만주의-시인 휠덜린-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가능성 그리고 마키아벨리즘-김훈-야만성과 리얼리즘. 

영화는 엔딩 무렵의 반전이 놀라웠고, 비운의 형사 최철기(황정민 분)가 의리파에서 권력욕으로 파멸해가는 과정이 절묘하게 잘 표현된 것에 감탄했다. 특히, 검사 주양(류승범 분)과 장인어른이 나눴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깊었다. 그 장면을 들여다 본다. 부당거래로 인해 모두가 죽거나 파산하지만, 현직 검사인 주양만이 빠져나왔다. 자신의 말썽에 대하여 법조계 실세인 장인 어른께 연신 "죄송합니다"고 말하는데, 장인 어른의 '말씀'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대장부가 그만한 일로 기죽으면 되겠나? 어깨 펴."

그만한 일이라니! 주양이 사다리 오르기에 도움이 될 이번 사건을 맡게 된 것도 장인 어른이 힘써 준 덕분이고, 지은 죄로 따지면 최철기에 못지 않다. 정서적으로는 가장 열 받게 만든 이가 주양인데, 그만한 일이라니! 이 장면은 우리 사회 일각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적확한 사회 비판이기에 무릎을 치며 감탄하면서도 씁쓸했다. <부당거래>의 힘은 이러한 리얼리즘에 있었다. 물론 리얼리즘 만이 세상 이해를 돕는 것은 아니다. 유머와 풍자, 이상과 낭만주의도 세상 이해를 돕는다. 그러니 어느 한 가지의 견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철기는 애정이 가는 캐릭터였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불행하게도 최철기는 조금씩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매우 현실감 있게 꼬여가는 '점진적인' 악화였다. 점진적이었기에 개연성이 있었고, 사건과 사건의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두 영화의 비슷한 점은 주인공들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더 큰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점과 주인공이 죽는다는 것이다. 두 영화가 다른 점은 델마와 루이스가 그저 주말 나들이를 떠난 것이 사건의 발단인데 반해 최철기는 첫 출발부터 범죄라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엔딩을 처리하는 방식이 달랐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음을 맞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상징적으로 처리되고, <부당거래>는 피가 쏟아지는 장면을 모두 보여주는 적나라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은 명장면이다. 절벽을 향한 자동차에 앉아 있는 엠마 톰슨과 지나 데이비스는 손을 꼭 잡은 채로 악셀레이터를 밟는다. 자동차는 절벽을 떠나 공중에 떠오른다. 이것은 주인공의 죽음일까, 여성 해방의 상징일까? <부당거래>의 마지막은 문자 그대로 '파멸' 혹은 '끝장'이다. 이것은 부당거래의 끝일까, 모든 힘 없고 연줄이 없는 사람의 종말일까?


최철기의 파멸은 부당거래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집을 수 없는 사회적 권력을 상징하는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모든 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일지도 모르지만, 끝은 아니다.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자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하워드 진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권력을 이긴 사람들'을 썼다. 감동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이어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꿈을 죽이거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이 아님을 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은 꿈을 현실적으로 낮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꿈은 원대하게 꾸되, 현실을 꿈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제대로 파악하라는 말이다. 

<부당거래>는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관람 내내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였기에 재미있었고, 인간의 야누스적인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유익했다. 내가 뽑은 명장면은 최철기가 주양 검사와 통화한 후, 공중전화 부스를 나오며 통화내역조회 기록부를 찢으며 울부짖는 장면이다. 상황의 주도권이 주양에게 넘어가게 된 전환점이었고, 최철기가 주양에게 무릎을 꿇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그 장면이 왠지 슬펐다. 자신의 '부당거래'가 검사에게 탄로난 것을 알게 되어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함께 절망했었다. 이후, 최철기가 실수로 부하 형사를 쏘게 되고, 다시 부하의 손에 죽게 되는 마지막 장면까지 나는 최철기에 몰입하였다. 영화의 결말은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리얼리즘 하나 만큼은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류승완 감독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감독 본인도 스스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리얼리즘은 높이 평가한다. 그의 멋진 한 마디도 참 마음에 든다. “
<부당거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후진'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건 감독으로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시민으로서는 행복할 것 같다.”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 리얼리즘이 떨어지는 영화라고 평가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올까? 촘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

Posted by 보보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이탄]

개봉일 : 2010. 4. 1
감독 : 루이스 리터리어
출연 : 샘 워싱턴 (페르세우스), 리암 니슨 (제우스),
          랠프 파인즈 (하데스)

관람 : 2010년 4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평점 : ★★★

간단평 :  올림푸스 신전, 신화 속의 괴물, 신과 인간의 싸움, 장엄한 스케일 등 볼거리가 많음. 신과 인간의 경계 등 생각꺼리도 있음. 그러나, <아바타>의 공감각적인 메시지 확장은 없음.



※ 스포일러 있음. 그러나 <타이탄>은 미스테리도 아니고,
    시나리오가 치밀하거나 마지막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영화 보시는 데에는 무방함.


오전 8시 30분이라는 이른 시각에 본 영화 <타이탄>. 관객보다는 출근하는 시민이 많은 시각에 영화관으로 향하는 기분이 묘했다. 일해야 하는 시간인데, 라는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내야 했던 점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다. 더 큰 감정은 즐거움이다. 3~4시간 동안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짓는 일도 아닌데 괜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해야 할 일을 완료해 두어야 더 즐거울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을 보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처리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했다. 줄거리 역시 신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여 제우스의 거대한 동상까지도 무너뜨린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여러 신들과 함께 인간의 도전을 어찌 다뤄야 할지 고민한다. 제우스의 전지전능함을 질투하는 지옥의 신 하데스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제우스의 허락을 얻은 하데스는 인간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제우스에게서 신적 능력을, 인간인 어머니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물려 받은 영웅 페르세우스다. 그가 하데스의 파괴를 막아낸다는 이야기가 줄거리다. 승리는 페르세우스의 것이고, 그는 신들의 세계인 올림푸스 신전이 아닌 인간 세계에서 살기로 선택한다.

바다속으로 빠지는 제우스 동상


신과 인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싸움. 각 진영의 장군은 지옥의 신 하데스와 반신반인 페르세우스다. 사실, 기독교인인 필자로서는 신과 인간의 '싸움'은 상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계시가 있고, 그것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니까. 분별과 순종을 추구했고, 회의와 반항은 멀리했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필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어서인지, 아니면 영화의 스펙타클이 주는 몰입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기독교는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환영한다. 회의에서 건너 온 확신이 더욱 굳건한 믿음이 되곤 하니까. 
 

<타이탄>은 <아바타>의 명성에는 못 미쳤다.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는 아니었다. 함께 보았던 친구는 "<반지의 제왕>보다 논리적 연결이 엉성하다"고 했다. <타이탄>은 블록버스터 영화로서는 부족하지 않다. 스케일이 크고, 영화의 장면이 되는 공간들은 '저긴 어디지?'라는 질문과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주요 볼거리들이 모두 섬세하게 만들어져 엉성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아바타>와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바타>의 주인공(샘 워싱턴)이 다시 한 번 페르세우스 역으로 주연을 맡았다는 점 만이 비교할 만하다. <아바타>의 감동과 메시지가 훨씬 깊고 울림이 크다. 나에게 <아바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기반을 돌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소한 성찰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받은 메시지다. 다른 이들이 받은 메시지는 나와 달랐다. 이것은 곧 <아바타>가 메시지 확장이 열려 있는 영화란 의미다. 볼거리는 물론이고, 공감까지 자극하는 영화였다.
 

올림푸스 신전의 신들


그에 비해 <타이탄>은 매력은 볼거리 속에 숨겨져 있다. <아바타>를 압도하는 수준의 영상은 아니다. 메두사, 올림푸스 신전, 거대한 전갈 등은 볼만 하지만, 경탄이나 아름다움까지는 아니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타이탄>의 중요한 메시지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다. 이 점에서 생각을 자극하기는 했다. 신화에서의 신은 개신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개신교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인격적으로 온전한 분이시다. 반면, 신화 속의 신들은 하나씩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의 '싸움'이 일어날 만한 신이고,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중에서 어느 곳이 더 살만한 곳인지 고민해 볼 만한 신이다.

영화 속의 기이한 괴물들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지 정답이 아니다.


필자는 <타이탄>의 장엄한 스케일, 신화 속의 신들을 표현한 방식 등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신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얻은 약간의 철학적 단상들이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님은 신화는 정답이 아니라 '질문'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신화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신화에서는 회의를 얻어 오면 된다. 질문에 대한 답은 삶의 현장 속에서, 인류의 지혜 속에서, 약육강식의 자연사 속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어제까지의 역사와 오늘의 현장 속에서 말이다. 때로는 정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탈레스가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라고 회의한 그의 질문 때문이지, '물'이라는 대답한 정답 때문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는 무엇인가?
신에게는 인간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 내가 얻은 질문들이다.

"서로 싸우게 하여 우리로 돌아오게 하라."
- 제우스가 동생 하데스의 인간 공격 명령에 찬성하며

"인간을 창조하셨으면서도 인간을 모르시는군요."
- 페르시우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한 말.


필자의 마음에 남아 있는 몇 마디의 대사를 인용해 하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영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형 제우스에게 인간을 공격하겠다는 허락을 얻을 때, 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싸우게 하여 우리로 돌아오게 하라." 제우스의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의 화해였다. 제우스는 인간을 자신에게 돌이키기 위해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의문이 생긴다. 선한 목적을 이뤄가는 수단이 부당할 때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나는 지혜로운 선택을 알지는 못한다. 분명한 것은, 목적만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합의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페르세우스는 신이 인간을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상대를 이끄는 선의가 폭력적일 때가 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한 채 이끌 때다. "인간을 창조하셨으면서도 인간을 모르시는군요."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을 모를 수 있음, 지적한 것은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아이를 잘 모르는 부모님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자녀 교육의 지혜도 어려운 문제다.

"제게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어요."
- 페르시우스가 올림푸스 신전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며.

아들에게 동전을 건네는 제우스


영화에서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 페르세우스에게 2번 초대한다. 신들의 세계 올림푸스 신전으로. 아들은 2번 모두 거절한다. 두 번째 거절을 하면서 "제게 필요한 것은 여기 다 있어요"라고 말한다. 신화에서의 신과 종교에서의 신은 능력과 인격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페르세우스의 신념을 현대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중세, 이성과 과학기술에 있다고 믿었던 근대, 그리고 다원성을 중요시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구원과 행복, 신과의 적합한 관계는 중요한 문제였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졌는가? 신만이 채울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인간 세계에 필요가 모두 있는데, 사람에 따라 발견하거나 못하거나의 차이인가? 고민해 볼 일이다.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되렴."
- 제우스가 아들 페르시우스를 인간의 땅에 남겨둔 채 승천하기 직전에 한 말.


제우스는 2번에 걸친 아들의 거절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올림푸스 신전으로 돌아가기 전, 아들 페르세우스에게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돼"라고 말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다운 성품과 권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신의 세계를 버리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남겠다는 아들에게 신보다 나은 존재가 되라고 하는 말은 내게 울림이었다. 오만하지 않은 겸손의 말이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아들에게 보내는 사랑과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타이탄>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고민하는 이에게는 고민꺼리를 줄 수 있다. 그러니 신에게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볼거리 이상의 메시지는 없다. 이것이 <아바타>와의 차이점이다. <아바타>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울림 있는 메지시를 준다. 사랑, 자연, 더불어 살기, 소통 등에 대하여. <타이탄>은 잘 만든 영화지만, 아바타가 가진 메시지의 확장 면에서 2%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영화의 메시지들이 좋았다. 기독교 세계관과는 맞지 않아 필자의 견해와 달랐지만 말이다. 다르다고 하여 영화를 두고 괜히 흥분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생각을 하고 싶다. 신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인생과 나에 대하여.


※ <아바타>를 통해 3D 영상에 매료되셨더라도, <타이탄>의 3D를 추천하지는 않는다.
    3D 대중화를 일궈 낸 <아바타>와는 다르다. 혹자는 말했다. "어찌 대사만 3D로 나온다니?"


Posted by 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