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인들은 그들의 신, 비슈누를 사랑한다.

비슈누식 사랑은 다섯 단계로 나눠진다.


1) 주인 대 하인

2) 친구 대 친구

3) 부모 대 자녀

4) 배우자 대 배우자

5) 절대적인 사랑


힌두인들은 번호가 커질수록 높은 수준의 사랑으로 여긴다.

주인을 향한 하인의 사랑은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주인이시여,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지 말해 주시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은 (첫 단계의 사랑보다) 자주 서로를 생각하는 사랑이다.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사랑을 경험한다.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눔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단계보다 친밀함을 누린다.


힌두교 전통 사고에서 나온 이 다섯 가지 척도를 통해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 생각들은 내게 중요한 생각꺼리를 안겨다 주었다.


첫째, 헌재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첫 단계 수준이라는 점이다.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사랑은

힌두인들에게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랑이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발적인 실천이 지속적으로 결여된다면

순종은 부담스런 의무로 전락할 것이다.


신앙 훈련 = 하나님의 사랑 체험 + 책임감 있는 순종,

이라는 등식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던 바였다.

나는 알고 있던 것일지라도 한 번씩 되새겨 주어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기에

되새김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 돌아본 것은 유익이었다.


둘째로 하게 된 생각은 절대적인 혹은 열렬한 사랑에 대한 단상이다.

이러한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 이외의 것들은 모두 잊게 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두 주인공이 보여 준 사랑이 떠오른다.


열렬히 사랑할 때에는 대상에 대한 생각 뿐, 다른 영역에서는 균형을 잃는다.

여러분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다.

인생의 지혜를 발견한 이들은 하나 같이 사랑을 고귀하게 여겼다.


삼십 대일지라도 이십 대 초반의 청년들처럼

매일같이 만나고, 수십 만원의 휴대폰 요금을 지불할 정도로

정열적으로 연애하는 연인들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귀한 순간을 누리고 있음에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20대 청년의 고백보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30대 성인의 고백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더 많은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것이니까.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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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누군가를 최고의 상태로 돕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다.
팀원이 나와 다른 업무 스타일로 일하더라도, 속도가 느려 내가 끼어들고 싶어도,
혹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것이 팀원의 성장에 필요한 것이라면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사랑의 격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서로의 다른 점을 바라보기 시작한 연인들이
더욱 좋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 욕심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바꾸시어 보다 지혜로운 결정, 누군가를 섬기는 결정을 선택하게 하신다.
거의 모든 경우, 내가 할 일은 정의와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했다.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에는 사랑과 정의로 결정하는 것의 유익을 잊어 버리거나,
혹 기억하여 그런 결정을 하더라도 결정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힘겹다.
그 때 나는 느낀다. 사랑이 내 안에 없었던(혹은 많지 않았던) 것이구나, 하고.

생각해 보면, 좋은 성품이 내 삶에 드러났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찹으로 탐스럽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내 삶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랄수록, 좋은 나무가 되도록 힘써야 함을 떠올린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마태복음 7:17

사랑의 성령의 첫번째 열매요, 은사 중 제일의 은사다.
요즘 나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아니, 사랑이 필요한 건가? ^^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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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나.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여
호텔에서 혼자 운다.

만약,
주말에 이뤄진 두 번의 강연 중에
은혜와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계신다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리라.

온전히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하나님께서 도우셨기에.

만약,
두 번의 강연이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면
전적으로 나의 죄인됨을 탓하고
진실하지 못한 내 삶을 탓해야 하리라.

말하고 글 쓴 바를 삶으로 행하지 못하여
내 말에 진정성이 떨어졌을 것이기에.

감사하게도
참으로 감사하게도
눈물이 주르르 흐를만큼 감사하게도
강연은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의 행위가 아닌
저의 존재를 바라봐 주시는 군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시면서도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사랑과 기대를 보내 주시는군요.
 
두 번의 강연 모두 호텔을 떠나기 전,
침대 위에 무릎꿇고 앉아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강연을 아름답게 이끌어 주세요.
아무리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한치도 제 덕분이라 생각지 않고,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겠습니다.
주님이 영광받으실 자리를 제가 차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곳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의 위대함을, 인생의 감격을,
삶의 지혜 한 조각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기도를 하다가 가슴 떨림을 느꼈고,
이것이 강연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것임을 알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성당을 향했다.

강연 시작 전에 또 한 번 주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에 접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강연이 끝나마자 다시 무릎꿇을 수 밖에 없음은,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를 사용하심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아~!
감사한지고.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기대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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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브라질 여행 단상]
신의 의도를 생각하면 삶의 무게가 거뜬해진다.

덩치가 큰 그는 비행기 좌석을 두 개에 걸쳐 앉았다.
몸이 아주 불편하여 거동하기도 쉽지 않았다
.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데에만 10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선반에서 짐을 끄집어 냈다. 작지 않은 가방이었다
.
나는 그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와 드릴까요
?"
그는 단호함과 다정함을 섞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나를 쳐다보며고마워요
."

그는 어느 친절한 청년의 호의를 거절했다
.
자신이 들어야 할 삶의 무게는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
 무게를 포기하면 자신이 점점 연약해진다고 믿는 것처럼
.

그는 자기 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매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비행기에서 내려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걸었다.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지만, 아내도 그도 각자 자신의 짐을 들고 있었다
.  
나는 호의를 베푸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진정으로 그를 돕는 데에는 실패했다.


                                                                       - 2월 10일, Foz du Iguasu 공항에서

*

누구나 자기 어깨의 짐을 거뜬히 짊어질 수 있고, 삶의 질곡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다.
때로는 거뜬하지 않을 만큼 무겁기도 하고, 앞길이 어두워 두렵고 불안할 수 있지만,
우리를 주저앉힐 만큼의 힘겨움은 없고, 영원히 치명적인 실패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우리에게 주지 않으시니.
시험을 주실 때에는 또한 피할 길을 내어 우리가 능히 감당하게 하시니.
시험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련하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니.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Posted by 보보

어젯 밤, 교회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 다른 부서여서 교회에서 만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낸다. 편한 사이라는 말이다.
"내가 왜 전화했냐면, 내일 새벽 기도회 나오라고."
이번 주가 특별새벽기도회 주간이니 참석해 보라는 것이다.
"오케이" 내가 생각해도 즉각적이고 시원스런 답변이었다.
누나도 한치의 주저함 없는 답변을 들은 것에 기뻐했으리라.

내 속마음은 이랬다.
기도회,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동했다.
그렇잖아도 기도하고 싶은 요즘이었고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더해지는 날들이었다.
누나 역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권했을 것이고
누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긍휼히 여긴 누나의 기도에 하나님이 기뻐 응답하셨는지도.

사실, 오늘은 바쁜 날이다.
정오까지 원고를 업로드해야 하는 날이다.
나의 두 번째 책은 청소년 시간관리를 다룬 책인데, 몇 명과 함께 쓰고 있다.
오늘이 완성된 원고를 공저자들끼리 공유하기로 한 마감일이다.
오전 내내 매달려야 하지만 기도회에 대한 마음의 주저함은 없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후 시간을 더욱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기도하는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되심을 고백하고 지혜를 의뢰하는 순간이니까.

새벽 3시 30분에 눈을 떴다.
차를 마시고, 곧바로 원고 마무리 작업에 임했다.
2시간 가까운 시간을 몰입하여 책을 쓴 후에 기도회 나갈 준비를 했다.
씻고 밥을 먹는 일 말이다. 이른 시간이라 샐러드와 사과를 먹었다.
기도회는 집에서 가까운 커피숍에서 진행된다. 다행이다. ^^
정시에 도착했고, 처음 참석한 곳이라 조금 외진(^^) 곳의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어떤 여인이 잠든 아이를 안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갓난 아이와 함께 참석할 만큼 기도에 간절한 그녀를 바라보며
나의 마음도 더욱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찬양을 했다. 기도하고 싶을 땐 잠시 찬양을 멈추고 기도했다.
깊은 임재는 아니었지만, 평안함과 간절함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찬양 인도자의 자연스러운 진행이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찬양이 끝나고 어떤 형제님이 나오셨다. 목사님인지는 모르겠다.
이 글의 어조가 담담하고 건조한 까닭은 이 분과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에게 몇 가지 아쉬움을 느꼈던 것이다.

형제님(?)께서는 대표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가 뜨겁지 않았다.
영으로 기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기도 내용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관념적이었다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테헤란로를 깨우자고, 비전을 깨우자고 하셨는데
추상적인 기도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없고, 인도자로서의 준비도 부족했다고 느꼈다.
테헤란로의 영성 상태에 대한 조사(유흥업소 수가 지난 해에 비해 10% 늘었다는 등의)를
할 수도 있고,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들려 주실 수도 있는데....
매일의 기도회가 특별하고 소중한데, 특별한 준비없이 나오셨다면 그건 정말 나태함이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형제님의 인간 이해에 대하여 아쉬움이 컸다.

가장 큰 문제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나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인도함이 없는) 교회 자체에게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한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를 기대한다. 그분의 능력이 심히 크시기 때문이다.
회의 반, 호기심 반 혹은 
애정 반, 아쉬움 반으로 다가서는 나같은 교인에게도 한껏 친절함을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 

형제님은 이런 말을 하셨고, 그와 동시에 나의 마음은 걍팍해졌다.
"주님을 향한 삶은 넉넉해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삶은 풍성하지 않고 부족해집니다."
정확한 표현으로 묘사하진 않았지만, 이런 뜻의 말씀이었다.
몇몇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넉넉함과 부족함이 물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날의 주제가 <물질을 나누고 사랑을 되받다>였기에 물질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세상을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한 건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비기독인들도 사랑하신다.
때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청빈(淸貧)으로 이끌기도 하시고,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부를 주시기도 하신다.
부자들이 자신이 가진 부에 묻혀 더 큰 가치를 못 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부자들은 빈자보다 훨씬 아름다운 일을 하며 살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가능성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방식으로 기독인과 비기독인들을 사용하신다.
나는 형제님의 인간 이해가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들었다.
오! 교만한 보보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지어다.
이렇게 나처럼 맹랑한 청년도 보다듬어 주려면 인도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어진 목사님의 설교도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아쉽다.
첫째, 설교가 너무 길었다. 길었다는 점이 아쉬운 게 아니라,
그 자리가 새벽 기도회라는 점에서 아쉽다.
나같이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도 소망하는 자리가 새벽 기도회다.
얼마나 기도하고 싶었으면 새벽을 깨워 그 자리에 나갔겠는가.
충분히 동기 부여된 상태로 참석하는 예배자들이다.
한 소절의 찬양에 마음을 활짝 열고, 한 마디의 말씀에 꿇어 엎드린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이 길어져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내 기억으로는 30~35분 정도 말씀을 전하셨던 것 같다.
참석한 이들의 소원을 헤아리셨다면 조금 줄이셔도 좋았다.
말씀을 듣는 훈련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억울하다.
나는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좋아 일부러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를 찾는다.
1시간 50분 예배 중에 90분 이상의 시간 동안 말씀을 전하신다.

둘째, 설교 말씀에 성경이나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설교가 좋다.
사실 목사님의 설교는 재밌었고 감동이 있었다. 
말씀 중에 등장한 목사님의 친구, 삶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했다.
이 점이 아쉽다는 점이다.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의 삶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오늘 하루 중 서너 번 이상 목사님에 대한 생각이 났다. 
나는 새벽 기도 후에 쭈욱 하나님을 생각을 하고 싶었는데... 아이러니다.

나의 직업은 강사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지만,
종종 교회에서 특강을 하거나 간헐적으로 예배 시간에 강연도 한다.
목사님의 설교 방식이 꼭 내가 강연을 하는 것과 흡사했다.
강연은 나 자신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책 속 이야기보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승리한 이야기들이 더욱 강렬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어야 한다. 
하용조 목사님은 늘 하나님을 중심의 설교를 하신다. 
이점은 많은 목회자 분들이 숙고해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나는 감동이 아닌 은혜를, 목사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게다.

오후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지 일년 남짓 되는 청년을 만났다.
같은 교회를 다니니 우연히 교회 얘기가 나왔고, 오늘 목사님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목사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분명, 어떠냐고 물었다. 야, 좋디, 라는 식으로 비꼬듯 묻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입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성향이 아니에요, 너무 흥미 위주세요.
라는 동문서답 식의 답변이 흘러 나왔다.
이것을 뒷담화라 생각해도 좋지만,
일면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채워지지 못한 거룩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신앙 1년차가 흥미 위주의 설교여서 아쉽다고 느낀다면
분명 그 설교에는 보다 경건한 메시지와 영적 도전이 포함되어야 할지 모른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목사님이 읽으셔도 좋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고
기독 청년이 읽어도 좋겠지만 유익할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저 이곳을 들러 주시는 분들이 읽으시리라.
이왕 태어난 글이니 한 가지만의 메시지만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보보는 맹목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점.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머리로 판단하여 이것이 진리라고 하나님을 믿어 왔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 
얼마 전, 누군가가 내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을 읽으며 불편했지, 라며 물었다.
강한 기독교 비판이 많이 실려 있는 책이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을 읽은 기독 청년 한 명은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사실을 그도, 나도 안다. 
나에게 어떠했냐고 묻는 그 분에게 많은 얘기를 못했다. "아니오"라고 말 밖에.
엉뚱하게도 이 블로그를 빌어 그 때 못한 나머지 말을 해야겠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작년에 내가 읽는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불편하기는커녕,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아주 반가웠다.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한 공격에 열려 있지 않으면 배타적이 된다.
공격에 배타적으로 반응하면 생각이 멈춘다. 심하면 썩는다.
나는 어떤 진리가 정말로 진리라면, 공격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온갖 공격과 비판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공격이 오면 온 몸으로 맞아 더욱 강해지는 것이 참 진리이리라.
공격을 받고 무너진다고 무서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무너진다면 그 때, 다른 것으로 빨리 갈아타면 그만이다. 

『다빈치 코드』로 공격당했을 때에도 반가웠다.
오히려 기독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만으로 세상을 향해 변호할 때 아쉬웠다.
세상에 대하여 제대로 변호하려면 그들의 언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인들의 종교적인 언어에 아쉬움을 느꼈던 게다.
니체의 탁월한 비판에 반가웠다는 내 심정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왜 이해받으려고 하나?
기독교가 옹졸하고 배타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오직 구원에 대한 문제에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지만,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

기독교인들은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다.
기독교도 신자들에게 지적 자살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다, 싶으면 배교할지도 모른다.
그 배교는 나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거나, 금지령이 너무 많아서, 라는
식의 개인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거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거나
내가 믿는 믿음이 다른 진리에 의해 와해되면 나는 곧장 옮길 것이다.

이것이 불신앙인가?
내 신앙의 연약함이거나 부족함일지는 몰라도 불신앙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나의 가슴으로 믿고 싶을 뿐이다.
나를 옹호할 수 있는 시 한 수가 문득 떠올라서 반갑다.
이 시로 관념적인 신앙에 대한 나의 불편한 감정을 대신한다.

신을 믿는 것
                          - 미구엘 드 우나무노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신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덧] 글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다.
다만, 이 글만은 나의 진심이기에 숨기지 않고 살려 내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이라 생각하면 두렵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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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지난 주, 문자 메시지 하나가 왔습니다.
고향에 있는 교회 형이 사망했다는 비보였습니다.
문자 확인과 동시에 문자를 보냈던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그쳤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그도 몰랐지만 형의 죽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에게 전해 들은 내용은 참으로 기가 막히고 황망했습니다.
아침에 몸이 안 좋아 집에 쉬겠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누워 있었고 그 날 오후에 사망한 것입니다.

심장마비라고 합니다. 35살의 아주 건강하고 착한 형인데...
사망하기 불과 30여 분 전에 친동생과 통화를 했고,
사망 추정 시간 불과 10~20분 후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숨을 거둔 뒤였던 게지요.
뭐라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날밤,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새벽에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비는데 참으로 허망했습니다.
활짝 웃는 영정 사진을 보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형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고, 빈소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웃었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저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허망했습니다.

돌아가신 형의 친동생이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동생도 제게는 형이 되는 나이입니다. 명복을 빌고 난 내게 그가 말했습니다.
"희석아... 우리 히야 가뿟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습니다.
아! 이렇게 젊은 한 사람이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말입니다.
형의 가시는 길, 길이 길이 기도하지 못한 게 뒤늦게서야 후회가 됩니다.

"형, 정성스럽게 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빈소를 찾은 저의 발걸음이 오롯이 형의 가시는 길을 위한 걸음이 아니었음을 용서해 주세요.
형에게 죄송하여, 오늘 아침 잠깐이마나 형의 동생과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눈물이 와락 쏟아지더군요. 형이 나를 지켜 보는 것 같았지요. 고마워요. 따뜻히 웃어 주어서."

이렇게 떠나기도 하고, 저렇게 떠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이것이 부인할 수 있는 인생의 단면이라면 좋겠지만,
이런 일이 종종 있으니, 이런 인생의 모습까지도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묘하게도,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네요.

형이, 나에게, 열심히 살라고 말씀하는 듯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사랑을 온전히 이루며 살라고 부탁하는 듯 합니다.

아침에 기도하며, 형의 동생에게 전화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리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생각한 것이니 하나님이 주신 생각 같네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 몇 가지를 실천하며 오늘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


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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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들림 = 살아있음

영혼이 살아 있는 어느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마 전, 강연에 참석했던 청년이었고 크리스천이었다.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열정적이었지만, 방법을 모르는 청년이었다.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지 문제해결에 대한 조언이 필요한지 물었다. 그는 정서적으로 지원해 주는 친구는 많다고 말하며 후자를 원했다. 나는 마음껏 이야기를 했다.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는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다. 전화를 끊을 때의 기운은 전화를 시작할 때와는 달랐다. 우리는 함께 기분이 좋았고, 다음의 통화를 기약했다. 그는 불확실한 상황과 불안 속에서 조바심을 느끼고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곧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힘내렴!

나는 그에게 다음과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것은 다른 비전 청년들에게도 해당되리라.

#2. 하나님의 뜻

"이 길인가 저 길인가를 고민하며 오늘 하루를 낭비하지 마라.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태도와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겠다는 태도와 거룩한 삶의 존재 방식을 선택한다면 어느 길을 가든 승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결심했다면, 당신의 마음이 이끄는 길로 당당히, 그리고 자유롭게 걸어가라. 주어진 모든 기회와 자신이 가진 자원을 하나님을 위하여 선용하라.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묻느라 오늘 하루를 무심히 흘려보내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깨닫기 위해 몇 달, 몇 주를 소비하며 고민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바로 오늘을 하나님을 위해 성실히 일상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공부,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을,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성실히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성실을 발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현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3. 나의 소명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며 하나님께 더욱 민감해짐을 느낀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조금 더 뜨거워짐을 느낀다. 바로 이 지점이다. 세상의 필요와 나의 재능이 만나는 지점 말이다. 그는 나에게서 도움을 받기만 한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이제 나도 도움을 받았음을 말해야겠다. 그는 나의 소명에 접근한 것이고 나를 하나님께로 더욱 다가가게 했다. 내가 언제 가장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나의 재능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어 주었음을 모르고 있다. 나는 그에게 이 글을 읽게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할 것이다. 그는 내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않도록 도와 주었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기뻐하기를.

#4. 다시 시작할 일들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 나는 공부는 너무 적게 했고 강연은 너무 많이 했다. 인기 있는 강사라는 말이 아니라, 강연 횟수에 비하여 공부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지금은 다시 공부하고 기도해야 할 시기다. 어느 학교에 들어가거나 학원에 다니겠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지금 독서대학에 다니고 있다. 졸업은 곧 나의 죽는 순간이 될 것이니 평생 학습과정이다. 최근 여러 가지로 지성 연마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정체된 것 같다. 객관적 지식도, 주관적 체험도 정지 단계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지라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정지는 곧 퇴보다. 세상은 죄의 경향성을 지녀 힘차게 진보하지 않으면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귀기에 힘쓰고, 공부에 열심을 내자. 그리고 주어진 강연을 성실하게 준비하자.

$5. 구체적인 계획

- 5월 말까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 4장과 5장 읽고 토론 문제 풀기
- 시간관리 도둑 제거하기에 대한 국내 문헌 조사하여 정리하기 (6월 20일한)
- 베트남 여행에 대한 자료 조사를 통한 성실한 준비
- 현대경제연구원 [작심삼일] 원고를 위한 자료 조사와 독서
- 6월의 필독서 : 『인생수업』, 『자신감』, 『포트폴리오 인생』, 『타임전략』, 『4시간』
- 7H 워크숍의 효과적인 진행을 위한 스팟 연구하고 익히기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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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오랫만에 온누리교회 양재성전에서 2부 예배를 드렸다.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2부 예배를 계속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 사랑에 감동이 있으려면 희생이 있고 져줘야 한다는 말씀. 자존심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 평생 걸리는 성화를 갈망하라는 말씀. 가정 행복의 키워드는 화해라는 말씀.

이 모든 말씀이 나의 가슴에 절절히 다가왔다. 비교적 잘 실천하고 있는 말씀에 대하여 개념 정리를 해 주시기도 하고,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도전을 주시기도 하고, 내 삶 속에 간절히 실현되었으면 하는 말씀으로 소망을 주시기도 하셨다.
지난 해 이맘 때즘 함께 교회 다니던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찬양을 부르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다짐한다. 매 주일마다 다짐을 하면서도 삶 속에서는 여전히 천국 시민답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다짐과 노력을 구분해야 함을 느낀다. 나는 다짐에 이은 매일의 삶 속에서의 노력을 행해야 한다. 내가 꿈꾸는 삶을 향한 노력!

내가 꿈꾸고 있는 삶이란...
내 삶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하는 삶이다. 윌리엄 윌버포스처럼.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고 푯대가 되는 삶이다. 나의 선생님처럼.
오늘 하루 가운데 행복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기뻐하는 삶이다. 어느 평범한 사람처럼.
나의 가족과 함께 믿음의 가정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이다. 스펄전 부부처럼.

이러한 꿈을 위한 나의 노력을 찾아보려 해도 많지 않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대목이다. 내일을 기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는 곧 내가 행해야 할 목록이기에.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개선할 수 없다. 한 달이 저물어갈 즈음에 나는 내 삶에 대한 개선의 기회를 얻었다. "지금 내 삶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질문이다. 측정이 없으면 경영도, 개선도 없다.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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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11
하나님을 향한 수고로 하루를 채우자!

2절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말씀을 굳게 붙들고 제대로 믿고 있는가?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접하는 손과 복음을 전하는 발을 가졌는가?
도덕적, 정신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는가?

하나님의 빛을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인지 알게 된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나의 심각한 죄도 하나님의 빛 앞에서는 숨길 곳이 없다.
오늘 아침은 헛되이 믿는다는 말에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된다.

10절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의 감당치 못할 은혜로 인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쁠 즈음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큰 은혜를 주신 것일까?'
이것은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묵상케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계획하심에 동참한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명으로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다.
이 동참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따라야 한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는 신실함의 고백,
"그 모든 수고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는 겸손함의 고백!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주님을 위한 수고와 헌신하는 것에 관심을 갖자.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고로 하루를 채울 때는 감격과 기쁨이 넘친다. 이 기쁨을 기억하자.
최고, 최대를 향한 목표는 달성했을 때에 공허하고 깊은 기쁨가 없다.
영원과 의미를 향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자.

[적용]
1. 하인들을 위한 수고 : 메일보내기, 성경공부 준비하기, 모임 위한 기도하기
2. '주님의 영웅들'에게 기도제목 메일 보내기
3. 현규와 정환에게 편지쓰기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나 같이 연약한 죄인이 어찌 강연을 한단 말인가?
내가 어찌 믿음의 사람들 앞에서 전한 말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오직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는 깨끗치 못한 그릇까지 털어내어 사용하시는가?
그렇다면 내가 깨끗한 그릇이 되면 얼마나 즐겨 쓰시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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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로마서 2:13)


나는 몇 가지의 율법을 알고는 있지만 삶 속에서의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졌다.
늘 말이 앞서고 행함은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회개하고 나서 또 죄를 범한다.
나의 주특기 범죄 앞에 항상 굴복하고 만다. 또 다시 회개의 자리에 나선다.
회개하는 나를 보며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이다.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 그리고 오래 참으심이 풍성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셨기에 나에게 회개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성품이 나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루를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에 묻고 얻은 대답은 60분 동안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예수님이 매 순간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며 성실함을 조각할 것이다.
나의 일하는 모습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싶다.


*

자신을 경영하여 훌륭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저 로마서의 말씀은 통찰력 있는 지혜를 준다.
오직 지식을 행하는 자라야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강연을 듣고,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삶의 수준을 높여야 고민의 수준도 높아진다.
매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제 고민의 수준을 높여야 할 때다.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고민하지 말자. 실천해 보고 시도해 보자.

"절대로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면, 어떤 일을 시도해 볼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라. 그리고 시도하라.

내가 얻은 대답은 박사님께 추천서를 부탁 드리겠다.
여러 가지 이유로 두려웠는데, 용기를 내야겠다.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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