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497

4기 와우팀원 선발 과정 중에...

2003년도에 시작된 와우 프로젝트! 어느 덧 4기 와우팀원을 맞아들이고 있네요. 17명이 4기 와우팀의 문을 똑똑 두드렸고, 12명에게 독서과제를 제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골치아픈(^^) 지원서를 성실히 작성하여 1차 관문을 통과한 이들입니다. 12명 중 한 명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직 지원서를 제출하지 못했지만 마음이 참으로 간절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면 남들보다 기회는 한 번 더 얻을 수 있나 봅니다. 하지만, 일을 이루어내는 것은 소원보다는 성실한 노력이겠지요. 오늘이 첫번째 독서과제를 제출하는 날입니다. 제가 떨리고 긴장되어 이렇게 짧은 글로 떨림음 달래고 있습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하기 전에 제출한 넉넉한 이들도 있고 마감 한 시간 전인 지금쯤 열나게 마무리하..

스승님께 올리는 편지

스승님께 십여 년 전, 저는 오른팔로 왼팔의 팔꿈치를 받친 채 왼손의 검지와 엄지로 턱을 살짝 꼬집는 버릇이 있었지요. 이것은 당시 제가 참 믿고 따랐던 성경공부 리더의 습관이기도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따르니 그의 버릇까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20대 초반의 제 신앙의 모델은 바로 그 사람이었고,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그만큼 따랐던 사람은 없었지요. 몇 주 전부터, 저에게는 또 하나의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른손을 살짝 굽혀 허공에다 공을 만지듯이 두어 바퀴 돌리는 모양인데, 전화를 할 때에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에도 자주 이 버릇이 튀어나옵니다. 저는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연구원 수업 때에야 알았습니다. 바로 스승님이 자주 취하는 포즈였으니까요. ^^ 3..

3년 만의 만남

4시 50분에 눈을 떠서 바쁜 아침을 보냈다. 한국리더십센터 웹진 를 작성하고 메일 두 통을 보낸 후 집을 나섰다. 용산역으로 향하여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이다. 경부선이 아닌 호남선을 탄 것은 작년 여름 순천으로의 강연 여행 이후 처음이다. 오늘 향하는 곳은 광주의 전남대학교이다. 광주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내게는 민주화항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조금은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광주. 대학생일 때에는 매년 5월 18일마다 광주에서 피고 진 영혼들의 넋을 기렸다. 마음속에 언젠가 꼭 망월동에 가 봐야지, 하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따스하고 포근하다. 며칠 전, 베이징에서의 둔탁한 하늘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봄날은 무척이나 화창하다. 호남의 산세는 여성스럽..

가족과의 전화 통화로 행복을 느끼다

"정우야... 도착했냐?" "집에 다 와 간다. 이제 계단 올라간다." (목소리가 씩씩하다.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통화를 더 하고 싶었지만,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를 터이니 서둘러 끊었다. 동생과 함께 베이징으로 3박 4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세 번째 중국여행이었지만, 내 동생에게는 첫번째 해외 여행이었다. 그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좋겠다. 군대에 가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추억 중에 하나가 되길 바랐다. 나는 2003년에 입대하였고, 2002년에 38일동안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군대에서 힘이 들 때, 나는 종종 중국에서의 일들을 추억을 되살리려 힘은 얻곤 했다. 힘든 군생활 중에 정우에게도 힘이 되는 것이 있을 게다. 여자친구, 엄마와 아빠, 할머니, 친구들... 그리고 그 중에 하나..

사랑의 능력을 활짝 펼치고 싶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일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는 2년을 사귀었고, 그 전의 여자 친구와는 5년을 사귀었다. 두 번 모두 자연스럽게 시작하거나 여자 친구가 먼저 마음을 고백했었다. 아주 오랫동안(적어도 8, 9년 동안) 나는 나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분명 내 안에도 사랑의 능력이 있다. 그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랑의 능력을 펼치는 데 장애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왜 사랑하고 좋아하다는 감정 표현이 서툰가? 홀로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 좋아하는 감정을 되돌려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하나 보다. 이것은 옳지 못한 생각이다. 아니, 두려움이다. 그래! 나는 상..

나의 기대를 져버린 양말

옷과 구두에 어울리지 않은 색깔의 양말을 신었다. 외출하고 나서야 지나치게 옅은 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양말이 많이 헤어져서 길거리에서 양말 2족을 5,000원에 샀다. 적당한 곳에서 양말을 갈아 신었다. 양말 하나 바꿨을 뿐인데, 기분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양말에 구멍난 게 보였다. 발가락 부분의 봉제선이 1cm 가량 튿어진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2,500원을 주고 살 때에는 최소한 몇 개월은 유용하게 신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나 몰라라'하고 구멍이 나 버렸다. 이 놈의 양말은 내 기대를 완전히 져 버린 것이다. 근데 양발 터진 모양이 웃겨서 친구와 함께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는 내게 얼마만큼의 인생을 허..

내 일에 대한 단상

4월 3일, 한양대학교에서의 강연은 퍽 즐거웠다. 학생들의 진지한 반응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주최측에서 한 시간이나 시간을 더 주어서 조금 더 많은 얘기를 풀었고, 그들의 질문도 몇 가지 듣고 대답을 했다. 강연을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에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시간이다. 머리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감각, 온 몸이 이 시간을 즐거워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강연을 할 때엔 오히려 에너지가 생겨난다. 잘 하는가, 라는 질문은 뒤로 해 두고, 일단 내가 진정 강연을 즐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하는 일에서 놀이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을 얻고 있으니 참 다행이다. 강의를 끝나고 개인적인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지고 난 후에 한양대 역에 ..

보보의 몇 가지 일상

몇 가지 나의 일상사를 끄적여 본다. 잔잔하지만 소중한 나의 삶이다. 성찰의 시간은 늘 좋다. #1. 방송국 인터뷰 KBS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모 교양 프로그램의 작가였고, 인터뷰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에 망설였는데, 작가는 정중하면서도 친근하게 부탁을 했다. 결국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집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인터뷰 날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집안 정리를 하고 청소를 했다. 짧은 분량이겠지만 TV 인터뷰라는 것은 약간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런데, 다시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송 내용이 조금 바뀌게 되어 인터뷰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속 사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집안 정리를 했다. 기쁜 일이다. 몇 지인들에게 인터뷰 건에 대하여 아쉬운 듯 말하였지..

의미와 영원을 추구하는 인생

손을 벌벌 떨며 사발을 집어 든다. 사발 안에 든 사약을 들이마신 사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화완옹주와 함께 이산을 모략하고 당쟁을 주도한 정후겸의 최후다. 그 날, 정후겸은 낚시를 다녀왔다. 인생에서의 마지막 날을 낚시를 하고 유배지로 돌아왔다. 그 곳에는 홍국영과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국영과 정후겸은 이생에서의 마지막 술자리를 가진다. 간단한 술자리다. 홍 : 낚시를 다녀오셨다 들었습니다. 정 : 그랬네. 이곳에 와 쭈욱 포구에서 낚시대를 들이대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내 번잡했던 마음이 달래지더군. 어쩌면 날 낳아준 친아비처럼 그렇게 평생을 어부로 살았어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었어. 내 괜한 쓸데없는 얘기를 했군. 이제 조정을 쥐고 흔들 권세를 쥔 자네한테는 공연한 소리가 될 텐데..

효의왕후 김씨를 닮은 와우팀원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씨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