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278

정말로 거저먹기의 글쓰기

1. 소설과 에세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의 두 양식.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잘 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아니, 아주 가끔 읽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앉아 책장에 꽂힌 하루키의 에세이집 『더 스크랩』을 꺼내 들었다. 하루키의 에세이, 2년 만이다. 『더 스크랩』은 제목 그대로의 책이다. 하루키가 1980년대에 , 일요판 등을 ‘스크랩’하여 일본 잡지 에 연재했던 글을 엮었다. 하루키는 책을 여는 글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스크랩한 글은 대부분이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화제뿐이다. 다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삿짐을 싸다 벽장에서 나온 오래된..

첫 눈 내린 날

첫눈 오늘 첫눈이 왔다 아주, 희미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쉽게도, 금새 그래도 눈이었다 분명, 눈이었다 흔적도 없이, 이건 틀린 말이었다 내 마음에 실눈이 소복이 쌓였으니 첫눈은 하나의 실체였고 존재였다 존재는 형체가 사라져도 흔적을 남긴다 그대여, 첫눈처럼 자리를 떠날 때마다 누군가의 마음에 흔적을! * 첫 눈이 오면 꼭 만나고 싶은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첫눈에 관한 속설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첫 눈 오는 날의 만남을 핑계로 어떻게든 엮어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첫 눈을 맞지 못했다. 기억이 맞다면, 그 날 나는 홀로 눈 오는 밤거리를 달렸고 집으로 돌아와 시를 썼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나는 시를 잊었고, 그녀는 결혼하여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오늘..

술병이 나긴 했지만...

무수골 술잔치 한 잔 두 잔 술잔이 잘도 비워지던 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오고갔던 시간 파전과 막걸리가 사라지면 금세 “여기요” 했던 사내들 사람 좋고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홀짝 홀짝 한 두 번은 벌컥 “형님! 제 생각이 맞는지 한 번 좀 들어봐 주쇼.” 나도 끼어들고. 형님은 아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갤 끄덕이며 얘길 듣더니 장광설을 쏟아내고. 환한 대낮에 시작한 술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더니 시간은 흘러 자정을 향하네. 들어올 땐 쌀쌀했던 늦가을인데 나설 때에는 몸이 뜨겁고 마음은 봄이로다. 달달하다고 속삭이며 한잔만 더 달라하던 위장은 귀갓길에 춤을 추기 시작했네. 이튿날 하루 종일 집에 드러누워 내 뱉는 후회, 다시는 주량을 넘지 말자. 후회마저 밀어내는 어젯밤 대화의 훈훈함 그리고 무..

사제지우 師弟至友

師弟至友 (선생과 학생이 벗에 이르다) 선생이 머리를 열었다. 학생이 흡족해한다. 좋은 수업이다. 선생이 가슴마저 풀었다. 학생들이 감동한다. 훌륭한 수업이다.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여 배우고 익혀 성장한다. 최고의 수업이다. 나는 홀로 생각하고 홀로 뜨겁다. 엉터리 선생이다. 학생이 머리를 열었다. 선생이 감탄한다. 진한 기쁨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전에 없이 뜨겁다. 스승의 탄생이다. 스승은 그저 산다. 학생은 그 삶으로 깨닫는다. 인생이 곧 수업이다. 선생은 머리가 희었고 학생이 뒤를 따랐다. 사제는 우정이 되었다. * 나를 선생으로 대해 주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선생의 자격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 나은 선생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어우러진 뜨거움이다. 내 인생은 엉터리 선생에서..

두 나그네를 그리며

가을 바다는 쪽빛 입김을 불어댔고 지붕이 받아내니, 하늘이다. 세월은 봄여름을 품어왔고 대지가 화답하니, 결실이다. 새들은 오색 물감을 떨어뜨렸고 수목들이 채색하니, 단풍이다. 오색 단풍, 쪽빛 하늘, 넘실대는 결실들이 저문다. 자네, 나그네여! 좀 더 머물다 가시지... * 가을비는 야속하다. (아! 감성을 돋워주긴 하지.) 가뭄을 해갈하는 일 말고는 미운 구석 투성이다. 왠지 낙엽의 걸음을 채근하는 것만 같다. 어제 쾌청한 하늘과 쨍한 햇살이 비출 때에는 마냥 '와! 가을이구나' 싶었는데, 오늘 가을비를 보니 '나그네 같은 계절이 속절없이 지나가는구나' 싶다. 초겨울의 쌀쌀함보다는 만추의 낙엽 서걱거림이 좋아서일까, 짧지 않았던 가을인데도 자꾸 붙잡고 싶다. 계절은 가고 세월도 흐른다. 인생길을 함께..

경험 빈곤자의 자기 반란

자신의 삶에서 경험의 빈곤을 목격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환호다. ‘경험의 빈곤’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다. 추상적 개념이다. 사물을 목격하는 일과 달리, 개념의 목격은 시각적 활동이 아닌 새로운 인식의 획득이다. 그러니 자신에게서 경험의 빈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진보다. 경험의 빈곤을 인식하면 경험의 부족 상태에서는 느끼지 못할 개혁 의지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개선보다 개혁이 쉬운 법이다. 벤야민 역시 ‘경험의 빈곤’이 지닌 긍정적인 면을 역설한다. “경험의 빈곤은 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끈다. 새롭게 시작하기, 적은 것으로 견디어내기, 적은 것으로부터 구성하고 이때 좌도 우도 보지 않기이다. 위대한 창조자들 중에는 인정사정이 없는 자들이 항상 있었는데, 이들은 일단 판을 엎어버리..

또 하나의 빈곤

경험은 놀랍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경험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는 관용을 품게 된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역도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경험은 관점을 변화시킨다. 또한 경험은 앎을 이해로 바꾼다. 체험이 못하는 일도 척척 해낸다. 우리 사회는 체험과 경험을 어느 정도 구분하여 사용한다. 체험(體驗)은 몸 ‘체’자를 쓰는 한자어다. 몸으로 잠깐 겪어보는 일이 체험이다. 체험은 일시적이고 가상적이다. 예전 TV 프로그램 중 방송인들이 노동 현장에 가서 일일 근무를 했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를 두고 ‘경험’이 아닌 이라 부른 것은 정확한 용법이다. ‘가상현실 체험’이지 ‘가상현실 경험’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같은 맥..

부부는 부창부수하며 산다

주말에 또 싸웠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상스러운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언성을 높여갔다. 급기야 남편이 물건을 집어 던졌다. 아내는 앙칼지게 달려들었다. 옆집 얘기다. 이번에는 조용한 축에 속하는 싸움이었지만 훨씬 소란스럽게 싸우는 일도 잦다. 아내가 걱정도 되고 밤잠을 설치기도 해서 경비실이나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관둔 적이 여러 차례였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남편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 아내가 이에 화답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내가 선창하고 남편이 따를 수도 있겠다.) 나란히 길을 걷던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노래를 흥얼거리자 곧이어 아내가 따라 불렀다. 며칠 전 내가 목격한 장면이다. 곁에 있던 나까지 행복감을 느낄 정도로 흥겨웠다. 서로 아는 같은 취향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는 쉽..

가을 예찬

낮에는 햇살이 따갑더니 해가 기울면서 금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맑은 하늘, 큰 일교차, 강한 자외선, 서늘한 바람, 코스모스... 가을이 성큼 다가섰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다시 말해서 아침의 첫걸음을 동반하는 희망과 에스프리, 저녁의 휴식에서 맛보는 평화와 정신적 충만감을 찾아서 여행한다." 가을이야말로 스티븐슨의 이 말을 온 몸으로 경험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몸과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 걷기'는 매력적이고, 고즈넉한 마음으로 '홀로 걷기'는 매혹적이다. 가을은 날씨를 쫓아 벗들과 함께 하기에 좋고, 하늘을 벗삼아 홀로 거닐기에 좋다. 구름이 바람의 유혹을 따라 하늘을 배회한다. 나는 가을의 유혹에 못..

연남동 투어의 4가지 코스

연남동은 매혹적인 동네다. 연남동(과 이웃한 연희동) 곳곳에 맛집이 널렸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골목길마다 들어서 있다. 2015년 여름이 되기 전에는 경의선 숲길이 열리면서 더욱 환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나와 홍대와 상수역으로 이어지는 거리들이 10~20대 초반에게 신나는 놀이터라면, 3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펼쳐지는 연남동으로 골목들은 20대 이상의 모든 연배들을 폭넓게 유혹한다. 유명한 여행지가 대개 그렇듯이 연남동도 어느 골목 하나를 보거나 경의선 숲길 만으로는 매력을 충분히 느끼거나 연남동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연남동 투어는 경의선 숲길 / 동교로 & 성미산로 / 동진시장 골목길 / 경성고 골목길 이렇게 네 군데로 나뉠 수 있다. 거리만 둘러보는 데에는 90분이면 가능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