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한다는 것
"일상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건가요?"
함께 공부하는 동학(와우팀원)이 보낸 메일이다. 곧장 답변하진 못했다. 진심이라 해도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유의 말을 건네긴 싫었다. 때론 진심의 말도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하잖은가. '최선'에 대한 정의나 느낌이 다를 테고, 사람마다 ‘최선’을 달리 해석할 것이다. 내 답변 역시 주관에 머물겠지만, 생각을 안길 만큼의 주관이길 바랐다. 이왕이면 최선을 '설명'하는 대신 ‘보여' 주고 싶었다.
그이의 질문을 자주 생각했다. '일상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라는 화두 말이다. 간간이 내 삶도 들여다보았다. 일상을 어떻게 사는지, 최선을 다하고 싶을 때는 어찌 행동하는지 관찰했다. 메일 회신에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이었다. 메일을 받은 이후, 최선을 염두에 두고 행했던 일들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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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기 와우팀원과의 만남이 있었다. 단지 약속이 잡혔기에 만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지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약속 시간에 늦지 말아야 함은 당연했다. 최근 회사 생활을 박차고 나온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떤 감정일지, 어떤 상황일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묻고 싶은 질문과 듣고 싶은 얘기도 정리했다. 한 권의 책 선물도 미리 준비했다. 예쁜 리본으로 책을 포장해 두었다.
- 8기 와우팀 MT가 다가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공헌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대형마트에 가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와인 몇 병을 구입했다. MT 담당 팀원에게 와인 잔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여 부족분을 준비했다. 하루는 MT 특강을 위해 시간을 쏟았다.
- 친구를 만났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친구는 최근 인간관계에서 제법 큰 실수를 했고, 그로 인해 힘겨운 날들을 보내던 터였다. 둘의 대화가 불평으로 채워지는 게 못마땅했지만, 조언을 건네면 그의 힘겨움이 더해질지도 몰랐다. 그 순간의 최선은 비유컨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펼치는 것이었다. 한 손엔 위로를 다른 손엔 진실은 움켜잡고, 친구의 말에 공감하고 경청하면서, 친구가 원하는 말이 아닌 필요한 말을 사려 깊게 분별하여, 부드러운 언어로 따뜻하게 전하는 일! 나는 균형을 잃지 않은 채로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진실하면서도 친절한 대화 상대자가 되고자 노력할 때마다 나는 진지해지고 용감해진다. 살면서 가장 열정적인 순간이기도 하리라. 헤어질 무렵, 친구가 인사를 하고선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 사이엔 좀처럼 하지 않는 표현이었다.
메일을 보낼 때는 다른 사례도 더 적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포함된 이야기라 여기엔 셋만 옮겼다. 모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노력이었다. 상황을 막론하고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었다. 생각, 준비, 노력 그리고 균형! 무엇이 최선인지에 관해 귀납적으로 얻은 키워드인 셈이다. 최선을 다함이란, 가장 현명한 절차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시간을 마련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이며, 상황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균형’ 있게 ‘노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무엇이 최선일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해야 한다. 답변의 수준이 곧 최선의 수준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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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때부터 내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잠을 줄여서라도 공부 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할 때면 ‘시간의 양적 확대’라는 의미가 먼저 떠오른다.
학창 시절, 교실에만 틀어박혀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녀석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교과서를 빼곡히 옮겨 적느라 너덜너덜해진 연습장이 여러 권이었다. 본인 말로는 집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했다. 행동이 듬직했고 순수했기에 절로 믿어지는 말이었다. 하위권에 속한 그의 성적이 아쉬울 뿐.
공부 방법을 보면 낮은 성적은 당연했다. 녀석은 교과서의 모든 말을 옮겨 적었다. 중요하지 않은 문장은 물론이고 문장의 종결어 '습니다'까지 모조리 옮겼다. 핵심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의 아둔한 열심을 안타까워했다.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시간의 양적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친구였다. 최선이 선한 의도뿐만 아니라 기대한 결과를 얻어야 하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다시 말해 Longtime Working을 나는 일차원적 최선이라 정의했다. 일차원적 최선은 체력과 시간상의 한계가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잠을 줄이면 득보다 실이 커질지도 모른다. 방법론이 따라주지 않으면 결실이 초라해질 것이다. 나에게는 좀 더 현명한 최선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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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만난 K는 아주 성실하고 배움에 열정적인 23살 여대생이다. 겸손하고 배려심도 깊어, 나는 그녀를 아꼈다. 그의 남자 친구 도영은 3개 국어를 구사하는 동갑내기다. 공부도 잘 하지만 놀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K가 남자 친구를 소개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도영이 효과적인 노력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비결을 물었다. "저는 4시간 정도 공부할 양이면 항상 어떻게 하면 3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지 궁리해요."
도영의 십 대는 나의 십 대와 달랐다. 그때부터 그는 시간의 양적 확대가 최선이 아님을 깨닫고 시간의 질적 개선을 추구했다. 최고의 노하우와 최적의 프로세스를 수행해야 시간 투자의 결실이 극대화된다.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요”가 아니라 “효과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요”가 중요한 것이다. 시간 활용의 효과성을 따져 묻는 Smart Working이야말로 이차원적 최선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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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차원의 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직장 상사에게서 배웠다. 신입사원이었을 때, 상사의 지시대로 작성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말씀하신 대로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아쉬웠지만, 나름의 최선을 기울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요한 절차를 숙고하면서 필요한 자료도 성실히 검토했다.
상사는 보고서 둘째 페이지를 보다가 말했다. "여긴 무슨 말이에요?" 자신 없던 부분이 한 대목 있었는데, 귀신같이 그걸 집어냈다. "아, 이해 안 되는 점이 있어서 일단…" 부연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상사가 말을 잘랐다. "이 대리에게 물어봤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에 찬물 한 바가지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차! 도움을 구하질 못했구나.’ 홀로 고민하고 독립적으로 일하는 성향 탓인지 도움을 구하고 물어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간의 질적 개선으로도 안 되면, 누군가와 협업하거나 도움을 구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기(Working Together)라는 3차원적 최선이 있었던 것이다.
3차원적 최선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서로 배움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창조하는 일하기다. 모두를 합친 것보다 현명한 개인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재능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운다면, 새로운 차원의 최선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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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준비, 노력, 집중 그리고 균형이라는 최선을 구성하는 키워드 중 ‘생각’을 살펴보았다. 최선이란 무엇인가? Longtime Working, Smart Working 그리고 Working Together의 단계를 거치면서 최선의 수준을 높여가는 것! 다시 말해 시간의 양적 투입, 시간의 질적 개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을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이제 실행의 문제가 남았다.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앞날을 내다보아 시간을 내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와우팀원의 메일을 받고 '나부터 최선을 다해봐야지' 하고 생각하고선, 가장 노력하게 되는 것이 '미리 준비하기'였다. 특정 시간대의 교통 체증은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위기는 미리 내다보아 일찍 출발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위기를 두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데드라인이 코앞에 다가와야 몰입하는 성향이라 해도 ‘정말 그것이 최선인가’를 묻는다면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상황이 촉박하면 최고의 노하우와 최적의 프로세스를 채택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다. 시간이 긴박할 때는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힘들어진다. 어떤 성향의 사람이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여유롭게 일을 시작하고 미리 준비하는 모습을 뜻한다.
순간마다 노력을 다하는 것도 최선이다. 노력이란 근성을 발휘하여 매일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날엔 체력의 한계로, 어떤 날엔 너무 바빠서, 어떤 날엔 동기가 떨어져서 노력이 멈추기도 할 것이다. 그런 날에는 매일의 노력이 멈출 수밖에 없다. 그래도 괜찮다. 이튿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젠 하루를 날렸네. 괜찮아! 이어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깐’ 하고선 다시 노력을 기울이면 그만이다.
산만한 주의력을 제어하여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날 때의 최선이란, 휴대폰에 주의를 뺏기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수학 시간이라면 영어에 대한 호기심을 접어둔 채로 수학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놀려고 모였으면 민감한 정치 문제로 분위기를 흐리지 말아야 한다. 연인을 만났다면 가르치려 들지 않고 데이트에 집중해야 한다. 상황마다 목적이 무엇인지 묻고, 그 목적에 집중하자는 말이다. 최선이란 부주의함이나 산만함보다는 집중하는 시간에 깃들기 마련이다.
최선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마지막 키워드는 균형이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최선을 다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신체 에너지가 떨어지면 집중력도 저하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평소 건강한 식습관과 정기적인 운동으로 얻은 건강한 체력이 최선의 질을 높인다.
배우자와 심하게 다퉜거나 자녀에게 실수라도 하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기가 힘들다. 관계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관계의 원만함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만드는 윤활유와 같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에 삶의 ‘균형’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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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환경미화원이라면 마땅히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베토벤이 작곡을 했던 것처럼 거리를 쓸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멈추어 서서 '여기, 자기 일을 정말로 열심히 임했던 위대한 환경미화원이 살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며칠 전, 책을 읽다가 발견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이상적인 말이지만, 최선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아마도 자기연민이나 변명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최선일 것이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대신 혹독한 기준을 들이대고, 이해와 용서 대신 엄격하게 다스리는 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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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에 대한 생각을 담아 와우팀원에게 메일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났다. 메일을 받은 그는 어떤 대목이 도움 되었는지 콕콕 짚어서 전해 주었다. 기분 좋은 회신이었다. 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최선을 완성하는 마침표는 자기 삶의 현장에서 벌이는 실천에 달렸으니까. 지금의 그에겐 ‘최선’이 필요한 시기가 지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생각이 최종해는 아니겠지만 하나의 유효한 관점이길 바란다. 그리하여 최선에 관해 생각하실 때, 한 번쯤 쓰이면 좋겠다. 그때 다음의 문장도 함께 고려해 주시길.
“최선의 삶만이 정답이라 생각진 않습니다. 최선을 강요하는 글은 더더욱 아니고요. 최선이란 게 강요나 부추김으로 이뤄지진 않잖아요. 지금의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며 살자는 함의를 헤아려 주면 고맙겠습니다. 최선의 노력이 필요한지, 최소한의 노력으로도 괜찮은지 돌아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삶이라는 게,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다가도 때로는 지극히 각자의 몫으로 남잖아요. 최선의 삶이란 그렇게 단독자로 남을 때나 힘써 연대할 때만 잠깐씩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가슴 한편에 품고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