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건강해지면 뭘 하고 싶어?
"다시 건강해지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야?"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암 제거 수술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아산병원 서관 4층의 야외 휴게소에서 산책하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고요. 점심 식사를 마친 탓인지, 따뜻한 햇살 덕분인지 꿈결 속을 거니는 몽롱한 기분이었습니다.
질문을 던지며 제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답변은 여행이었습니다. 어느 아름다운 곳으로 편안하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뭐 이런 답변 말이죠.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연 친구의 답변은 제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일 하고 싶어. 다시 열심히 일을 해서 내가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인지 보여 주고 싶어."
의류 사업에 수완이 있는 그는 최근 3년 동안 다른 사업에 손을 댔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자신의 본업이라 할 의류 사업을 막 시작하자마자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매장을 오픈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느껴지는 답변이었지요. 일하고 싶다는 답변은 친구의 특수한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일에는 기쁨이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여인을 품는 걸 8시간씩 할 수는 없지만, 일은 8시간씩 그것도 매일 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괴테의 단편 「정직한 법관」은 마을에서 가장 아리따운 부인을 홀로 남겨두고 일하러 떠나는 사내가 등장합니다. 그는 아내의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다시 일을 하러 멀리 떠나고 싶어합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당신 곁에서 누린 행복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마음 속에서 자꾸만 왜 빈둥거리고 있느냐는 질책의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그 행복을 더 순수하게 느낄 수 있을 거요.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다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리고, 나의 오랜 습관이 다시 날 끌어당기고 있소. 제발, 내가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볼 수 있게 해 줘요."
사내가 일의 순수한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 주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니, 친구에게 던진 질문에 제가 대답을 하더라도 '일하고 싶다'고 말할 것 같네요. 좋아하는 일을 말이죠. 물론 일에는 기쁨만이 아니라, 고됨이 서려 있기도 합니다. 일의 양면성에 대해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은 축복일세. 일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면 말야. 그러나 일에만 매달려 삶의 의미를 도외시한다면 그건 저주야." -『흐르는 강물처럼』 中
코엘료는 일의 자기성찰 기능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책상에 앉아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며 자신을 발견합니다. 저는 어떠한 일을 하기 전에 기대하는 성과를 적고, 일이 끝나면 실제 성과를 관찰하여 그것을 기대 성과와 비교합니다. 성과분석이라 부르는 이런 작업을 통해 나를 조금씩 알아갑니다. 이때, 일은 자기발견의 근원이요, 축복입니다.
나는 친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일하는 것 말고 또 없어?" 친구는 이제 대답을 술술 이어갑니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 5년 후면 나도 완전히 나을 테고, 그러면 가은이도 이제 함께 나들이를 떠나면 즐길 나이가 될 테고." 가은이는 그의 한살짜리 둘째 딸입니다. 친구에서 아버지로 돌아간 그 순간에 나는 경건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일을 하고 싶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참 평범한 답변입니다.
어쩌면 행복은 평범한 것들을 제대로 누릴 때에 얻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평범한 것이라 부르는 것들이 실상은 실현하기 어려운 비범한 목록일 테고요.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라고 말하면서 늘어놓는 평범함의 기준들 - 이를테면, 작은 집 한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 -이 평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평범함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비범한 축복임을 느낍니다. 세상엔 아픈 사람도 많고, 자신의 일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많으니까요. 일을 더욱 잘 해 보거나 건강을 만끽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거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월요일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