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존재를 만나는 현장
1.
"평화롭게만 살고 싶은 한미소" 우연히 방문한 블로그에서 만난 주인장의 인삿말이다(이름은 가칭). 문장을 보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내 삶에도 평화가 깃들면 좋겠지만, 일부러 평화를 추구하고 싶지는 않다. 평안을 느끼고 평화롭기보다는 도약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때때로 고통이 수반될 텐데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혼란을 거쳐야 지혜를 얻는다면 혼돈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겠다. 각오만큼은 단단하다. 불이익이나 위험을 마주하더라도 내가 정의에 눈을 감지 않기를 바란다. 정의를 선택한 대가로 행복은 내놓을 수 있지만, 고통과 위험은 사실 많이 무섭다.’
우연히 만난 문장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 속에 나의 가치와 두려움이 존재했다. 투쟁하고 싶은 것들과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보였다. 반응이 곧 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똑같은 자극, 똑같은 글, 똑같은 사건에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를 테니까.
2.
그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막강하고 깊고 뛰어나다. 그의 수준과 나와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질투를 느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듯한데 그 동안 난 무얼 하며 살았나' 싶기도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울과 무력감을 교차로 느꼈다. 그래서 거짓 이유를 둘러대며 그를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했다. - 어느 나르시시즘의 고백
그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막강하고 깊고 뛰어나다. 그의 수준과 나와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훌륭해 보인다고, 종종 만날 수 있다면 많이 배우고 싶다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삶의 푯대 하나를 발견했음에 환희와 감사를 느꼈다. 그이처럼 나만의 인생길을 성실하게 달려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어느 강인한 정신의 고백
스스로에게 함몰되어 자기를 보호하려 애쓰는 나르시시스트는 기회마저 위협으로 느낀다.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행복을 기만적으로 꾸미기도 한다. 반면 정신이 강인한 이들은 행복을 가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불안과 질투를 드러냄으로 삶의 혁명에 쓰일 에너지로 전환한다. 심지어 위협마저 기회로 여긴다. 누군가에게 해로운 것도 그에겐 이로운 것이 된다면, 어떤 것도 악이 아니다.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악이란 현재의 조건 속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과의 마주침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만났거나 내가 강한 소화력을 갖추었다면 악이 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해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악이다." (고병권, 『니체 천개의 길 천개의 고원』, p.90)
3.
A, B, C 세 사람은 허기를 느꼈다.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일을 중단하기 싫은 A는 가까운 곳에서 얼른 끼니를 때우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성취자). B는 식사 시간을 고대하면서 미리 알아둔 식당에서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즐긴다(미식가). 음식 맛보다는 분위기를 느낄 줄 아는 C는 좋아하는 이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며 식사했다(사교가),
날마다 당면하는 끼니 앞에서도 이처럼 다르게 반응한다. 반응이 곧 그 사람이다. “You are What you eat.” 누가 이 말을 했더라. 당신이 먹은 음식을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이지 알려주겠다는, 이 호기 어린 말은 비약이 아니다. 나도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당신이 먹은 음식만이 아니라 식사 시간을 대하는 방식과 음식을 즐기는 스타일 또한 당신이라고.
#.
세상 만물과 모든 사람이 자극이다. 우리는 그 자극들에 반응한다. 타자를 만났을 때 떠오르는 생각, 나보다 강하거나 연약한 정신을 만났을 때의 행동, 근원적인 욕구(수면, 식욕, 성욕 등)에 대한 자신만의 태도, 이 모든 반응이 우리를 나타낸다. 우리가 하는 말보다 순간마다의 반응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고 끊임없이 보여주는 셈이다. 반응의 총합이 곧 그 사람이다. 그렇기에 다음의 짧은 문장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반응이 곧 존재다! 자신을 알고 싶다면 자연스레 반응하는 순간을 주목해야 하리라. 반응이 일어나는 시공간이야말로 나라는 존재를 만나는 현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