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 Nova/단상

오래 전에 죽은 자

카잔 2026. 4. 20. 10:26

 

그는 죽은 자였다. 언젠가 죽을 줄로만 알았지, 이미 죽은 상태였음은 전혀 몰랐다. 세상은 곧잘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다. 그 역시 자신의 인식과는 달리 오랫동안 죽은 채로 살았다. 누군가에겐 헛소리로 들릴 테지만, 내겐 '그의 이른 죽음'이 자명한 사실로 들린다. 어느 소설 속의 문장이 진정 진실로 들리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숨을 쉬고 거리를 걸어 돌아다닐지언정 신의 눈에는 죽은 자입니다.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강합니다. 결정의 힘은 강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약해지는지를 엄포하는 선언이다. 그의 삶이 왜 그리 시시한지 역설하며, 정신은 또 왜 그리 비실한지 보여주는 문장이다. 

 

그이의 시시함과 비실함에 대한 발언이 과격한데, 그나마 정제한 표현이고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 묘사한 이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랬다. 나는 저쪽 길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러한 필연으로 이쪽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아니, 어느 길도 선택하지 못했다. 모든 길을 걸을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신조차 지상에선 하나의 삶을 산다. 예수를 보라. 그도 여러 삶을 살지 못했다. 일상적 삶과 십자가의 삶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유럽인도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나 아람어를 쓰며 단일한 삶을 살아야 했다. 붓다 또한 인도에서 태어나 왕자의 삶과 수행자의 삶을 연이어 살았지, 동시에 살지는 못했다. 그들도 선택하는 존재였다. 

대학 시절 읽었던 책들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서번트 리더십』과 『하나님의 모략』에서 공명한 구절들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었고,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에서 만난 그의 지적인 삶을 동경하면서 서점과 도서관에서 살았다. 톰 피터스의 『와우 프로젝트』에 감동하여 내 생애 최고의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책의 세계에서 영감과 용기를 발굴하여 인생살이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20대의 결정적 발굴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었다. 이 책은 첫 직장과 내 직업을 결정해 주었다. 나는 대학 졸업장을 따기도 전에 스티븐 코비의 국내 파트너사인 한국리더십센터에 가기로 결정했다. 결정했으므로 당시의 나는 강한 존재였다.  

 

강했던 순간은 짧았고, 연약해진 시절이 도래했다. 나는 결혼 상대를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결정이 늦어질수록 나는 비실해져갔다. 선택으로 책임지는 삶과 멀어졌던 것이다. 선택이 책임을 떠안는 행위임을 모르지 않았다. 강인했던 시절에는 나는 선택을 감행했다. 데이트 상대를 만나면 그녀의 취향과 상황을 십분 고려하면서도 때때로 무슨 영화를 볼지 무엇을 먹을지 박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여인 앞에서는 다양한 옵션을 주었고("이 영화는 이렇고 저 영화는 저래요"), 내게 결정을 떠넘기는 여인 앞에서는 과감하게 결정했던 것이다('영화가 재미없을 사태를 내가 떠안아야지!'). 이를 알면서도 어찌 그 많은 결정을 미뤘을까?

 

결정으로부터의 도피는 삶이라는 진정한 모험에서 달아나는 행위다. 우리는 생생하게 펄떡이며 별안간에 죽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점진적으로 죽는다. 꿈꾸고 도전하는 용기가 죽고, 배려하던 선한 마음이 죽고, 팔팔하던 생기가 죽는다. 우리는 단박에 죽지 않는다. 강한 자신이 죽고 약한 자신으로 거듭난다. 1.0의 시력이 죽고 0.7의 시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시속 4킬로미터의 보행에서 시속 3km의 보행자로 거듭나 새로운 보법으로 살다가 언젠가 완전히 멈추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거듭남이 영광과 희열을 선사하진 않는다. 어떤 거듭남은 서글프고 안타까운 퇴락이다. 나는 지금 강력한 퇴락이 '미결정'으로 이뤄져 왔음을 온몸과 전생애로 절감한다.

 

절친한 친구와의 이른 사별로 힘들어하던 시절, 십수 년 진행했던 와우 프로젝트도 잠정 휴업이었다. 가까스로 11기까지 마쳤지만, 이후 기수를 어찌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빠져 어물쩍 결정을 미뤘다. 간혹 사람들이 물으면 "생각하고 있어요" 또는 "고민 중이에요" 라고 말할 뿐, 결단을 단행하진 못했다. 한때 방송국에서 일했던 PD 분이 수차례 유튜브를 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지만, 이 역시 실리를 따지고 용기를 내지 못해 결정하지 못한 채로 수년이 흘렀다. 사람은 나이 듦만으로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결정을 외면함으로 약해지고 결정을 미룸으로 시든다. 그사이에도 야속한 세월은 나를 뒤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흘러갔다. 

※ 인용한 문장은 파울로 코엘료의 아포리즘 모음집 『라이프』에서 만났다. 출전은 코엘료의 소설 『다섯 번째 산』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