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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카잔 2010. 12. 8. 12:52


저는 리영희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만나 뵌 적도 없고, 그 분의 책을 꼼꼼히 읽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삶을 어렴풋이 아는 수준이고, 한 두 권의 책을 읽은 정도입니다. 그런 제가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개론 수준에도 못미칩니다만,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약간의 지식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20대 와우팀원들이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세상의 지식을 모두 알 순 없지요. 

오늘 오전에 리영희 선생님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무렵이면 5.18 국립묘지에 영원히 잠드실 테지요. 시기적으로, 리영희 선생님을 소개하기에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일주일 전에 올렸으면 읽히지 않았을 글이 지금이라면 한 명 정도는 읽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글입니다. 그저 블로그에 오신 분들 중에 리영희 선생님에 대해 궁금하신 몇 분이 읽어 주면 고마운 일이지요.

리영희 선생님께서는, 지식인으로서 활동하신 기간을 195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라 하셨습니다. 2000년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이후에는 활동을 줄이셨는데, 다행히도 많이 회복하셔서 회고록인 『대화』를 구술하셨습니다. 그 분을 사상의 은사로 만든 여러 권의 책들은 1970~80년대에 출간된 책들입니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등과 같은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벼락같은' 책들 말입니다. 두 권의 책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모르면 이해가 어려습니다. 그래서 쉬이 권하기가 어렵네요. 다만,『대화』는 블로그 방문객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사상적 담론이 주요 내용이지만, 시대의 스승 한 분을 알 수 있는 책이고, 지식인의 사명, 언론의 본분 등에 대해 사유할 수도 있겠지요. 좀 두껍다는 것이 흠이요, 장점이지요.

리영희 선생님에 대해 궁금하시거나 시대 의식,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래 글을 계속 읽어 보시면 되고,  아니신 분들은 다른 곳으로 건너 가셔도 좋습니다. 잠들 무렵에 만족하실 만한 하루를 만들어 가시길~!


들어가며...


대학시절부터, ‘지식인’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홍세화,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노암 촘스키 등의 책을 한두 권씩 읽었는데, 그 중에 강준만 교수의 글이 나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주었다. 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강준만 교수는 경향신문에서 조사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지식인으로 백낙청, 리영희, 최장집에 이어 4위로 꼽혔다. 앞선 세 분의 원로 지식인들에 비해 강준만 교수(1956년생)는 젊다. 또한 90년대부터 활약하기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강 교수는 분명 혜성같이 등장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박상훈 주간은 그의 약진을 두고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


실명을 거론한 전방위적 비판이 가득한 그의 책들과 월간지 <인물과 사상> 을 통하여 나는 비판적 지성이 어떤 것인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여 실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 몽롱한 의식의 수준이지만, 강준만은 언제나 나에게 ‘찬물 한 바가지’와 같은 존재였다. 나의 몽롱한 의식을 깨우는 찬 물 한 바가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글도 나에게 참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리영희 前 한양대 교수인데, 왜 뜬금없이 홍세화, 강준만 교수를 소개했는가? 리영희 교수가 (진실의 빛을 밝히기 위한 글을 쓰는) 지식인들의 사상적 스승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홍세화는 SBS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에서 리영희를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제시해 주신 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상적 스승”이라고 말했다.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라는 키워드로 한국현대사를 정리한 한 권의 책을 썼다. 강준만은 말한다. “리영희 교수는 순수 그 자체다.” 강준만이 지식인들에게 들이대는 칼날은 날카롭다. 그의 날카로움 앞에서도 아름답고 순수하게 빛나는 지성 리영희는 누구인가?




지식인 리영희(李泳禧)


사실, 대학 시절에 리영희의 이름을 듣기는 했다.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랐지만, ‘통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신영복, 유럽 여행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20년을 파리에서 이방인 생활을 한 홍세화, 그리고 나에게 최고의 데이터수집가로 보였던 강준만과, 리영희 교수는 같은 폴더에 정리해 둔 지식이었다. 폴더의 이름은 ‘지식인’이다. 나에게 지식인이라는 단어는 사회학적인 의미였다. 경영학 혹은 경제학에서는 지식인을 변화의 흐름 읽고 미래비전 제시하는 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김수영 시인이 표현한, “지구와 나라의 문제를 마치 자신의 문제처럼 여기며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정의가 마음에 들었고, 리영희를 이런 ’지식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2007년, 리영희에 대해 몇 가지를 조사하며 새롭게 깨달은 것은 리영희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인들의 ‘스승’으로 분류해야 할 사람이었다.


메트르 드 팡세 VS 의식화의 원흉


경기도 산본에 살고 있는 리영희의 고층아파트 현관에는 특이하게도 ‘李泳禧’라고 쓰여진 나무 문패가 달려 있다. 집으로 찾아간 한수진 기자가 아파트에서 나무 문패를 본 것은 처음이라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리영희 교수의 답변이다.


“군대에서의 7년, 형무소 3년 동안 있으면서 인간이 번호로 불리는 게 제일 싫었어. 군대에서의 비인간화, 죄수로서의 비인간화... 이게 싫었어. 아파트도 번호로 불리는 집에 살고 싶지 않은 거지.”


이 짧은 답변에서 그의 생애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6․25를 최전방에서 보내며 전쟁의 참혹함을 몸으로 체험한 이후에도 리영희의 생애는 말 그대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언론사에서의 두 번의 파직, 대학교에서의 두 번의 해직, 다섯 번의 옥고를 치르며 3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던 그다. 정말이지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강준만의 말처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따라왔던 것이다.


모진 시련이 닥치면 변절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평화와 안정의 시대에서는 진정한 지식인과 변절할 지식인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정의가 권력에 굴복하고, 진실을 발설하면 보복이 가해지는 상황이 되면 앎과 실천의 괴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런 시절에도 말과 글로써 강직함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다. 상황이 닥치기 전에 어려움을 가늠하는 것과 실제의 상황에서 실천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언론인, 문인, 사학자,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을 쌓아 올린 최남선은 1929년 가을부터 변절의 길을 걷는다. 그해 10월에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총탁으로 임명되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된 후에는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일삼았다고 한다. 1929년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투쟁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이후 일제의 통제와 탄압이 한층 가중되었고, 그 즈음에 최남선이 변절한 것이다.


리영희는 끌까지 변절하지 않은 지식인이다. 그는 언제나 진실로부터 시작해서 진실로 마쳤다.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세월 중에는 숨막힐 듯이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다고, 회고록인 『대화』에 썼다. 그 구절을 두고 한수진 아나운서가 이렇게 물었다. “타협을 하고 살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타협이라...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거니까. 나에게는 ‘진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양보하고 부둥켜안고 할 수 있지만,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둘 밖에 없어.”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강직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김만수는 『리영희:살아있는 신화』라는 성실한 리영희 평전을 썼는데, 그 책의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리영희는 실천과 공부를 통해 한평생을 변절하지 않고 초지일관하여 광신적인 냉전․반공․극우․독재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웠다.”


김만수는 ‘실천과 공부’를 리영희가 사용한 계몽의 수단으로 보았다. 리영희의 ‘실천’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살펴 본 그의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이제는 그가 어떻게 이성을 연마해 왔는지 살펴보자. 리영희는 어떻게 공부해 왔을까?


리영희는 많은 공부를 했다. 리영희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썩 잘 한 것으로 보인다. 리영희는 ‘대관초등학교 개교 이래의 몇 천재 중의 하나’였고, 당시엔 알아주던 명문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했다. 리영희의 진학은 면의 큰 화젯거리가 되어 축제를 벌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리영희 교수님은 개인 생활에서도 학구적인 것과 기자적인 취재욕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대화』의 대담자였던 임헌영의 말이다.


강준만은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에서 짧게 리영희의 대학 시절의 학습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을 썼다.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그는 대학 시절에 탄탄한 영어 실력을 쌓은 데다 많은 독서를 통해 인문사회과학도의 자질을 갖추었다.”(p.29) 독서를 통한 지성 훈련은 지성인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이다.


리영희는 왜 그렇게 공부에 열심을 내었을까 그는 안철수 의장과 비슷한 말을 한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단다.


“내가 본래 다른 재주가 없어. 골프, 화투, 바둑, 아무 것도 할 줄을 몰라. 공부가 적고 머리가 남보다 못한데 무지하게 공부하고 시간을 아끼고 분초를 아껴서 하지 않으면 따라가지 못하니까. 불어도 영어만큼은 못하지만 또 중국어도 일어만큼은 못하지만, 자료 읽을 만큼은 했거든. 그러니까 구하는 자료의 폭은 넓어지지." 극비 문서들을 구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리영희는 미국 CIA의 첩자가 아닌가? 했다는데, 와싱턴포스트의 통신원이었던 까닭에 그런 것을 협조해 주어 (내게는) 소스가 많았어.“
이 말 속에서 강준만이 말한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그의 곧은 성품과 예리한 지성이 날이 갈수록 더욱 굳건하고 첨예해져서 결국 그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은사가 된다. ‘사상의 은사’라는 말은 분명 리영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키워드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 정권이 대량 학살했던 이른바 ‘광주사태’로 내가 투옥됐을 때, <르 몽드> 동경 특파원 퐁스 기자가 한국사태 긴급취재를 와서 <르 몽드>의 파리발 첫 보도에 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큰 은사)라고 썼어요.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의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가 잡혀갔다고요.” (『대화』에서)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상의 은사’에 정반대되는 평가로 리영희를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상반되는 평가에 내려진 배경에 대해서는 강준만 교수가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두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개의치 않고 ‘빅 브라더’가 해선 안된다고 규정한 말과 행동을 악착같이 하려고 들었다. 학생들의 그런 변화를 가리켜 ‘의식화’라고 했다. 젊은 학생들이 그런 자세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사람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은인’이라 불렀고, 병영체제 수호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보았다.”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p.6)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4.19 혁명의 최전선에서 뛰었으며, 5․16 쿠데타로 인해 당시 많은 사람들처럼 혼란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는 1990년대까지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자신의 삶을 살았다. 강준만은 이러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기를 보게 하는 책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를 썼다. 머리말에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설명을 해 두었다.


“그건 리영희만큼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그 누구보다 더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겪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글은 곧 실천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넓은 행동 반경에서 살아왔다. 리영희의 삶이 곧 한국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p.6)


리영희라는 창은 맑고 깨끗했다. 창이 깨끗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리영희라는 창의 효용성을 설명했다.


“리영희는 한국 현대사에 최상급의 증언과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왜 ‘최상급’인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아사리판’에 어느 정도 타협했거나 그 판을 멀리서 구경만 했던 사람들은 결코 감지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리영희는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역사학 교수가 아니지만 나는 그의 ‘리영희=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라는 의견에 신뢰를 보낸다. 강준만은 성실하다. 그의 자료 수집은 능력도 출중하겠지만, 성실함에 있어서도 대단하다. 또한 강준만은 강직하다.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만큼 자신의 행동에도 엄격하게 대한다. 어느 날,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실하고 강직한 강준만 교수가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총 18권의 『한국현대사 산책』을 펴내면서, 아마도 ‘리영희’라는 이름이 자주 눈에 밟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리영희=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라는 그의 주장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산본 자택에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오른손이 떨리어 더 이상 글을 편하게 쓸 수가 없다. 그의 최근작 『대화』는 임헌영과의 대담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 책을 마지막으로 하여 더 이상 그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더 안 쓰실 거냐는 질문에 “쓸 만큼 썼고, 싫은 소리도 많이 했고, 한 사회에 영향도 많이 줬으니 더 이상 하려고 한다면 그건 욕심이지.”라고 답하는 말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노인의 남모를 감회가 묻어난다. 그 속에는 자신의 지식인적 소임을 다하였다는 자아의식과 또 다른 소임을 향한 어떤 다짐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소임은 아마 가정에서의 못 다한 역할에 대한 소박한 꿈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리영희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뒷산을 산책한다고 한다. 그토록 아끼던 책도 도서관에 기증하고 TV나 신문도 애써 멀리하고 있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에 그는 “앞으로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는 애써 알지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팡이를 짚고 다시 역사의 현장에 섰던 적이 있다.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 교수의 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임을 주장한다.


“리영희는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리영희가 원한 세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의 책들은 계속 읽혀져야 한다. 그런 세상이 누구의 피와 땀 덕분에 오게 됐는지 그것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점점 언론을 통해 세상에 할 말을 하기보다는 내면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할 말을 하며 살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경향신문 2004년 1월 26일자 인터뷰에서 요즘의 삶이 어떤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든가, 그와 관련한 상황 조성이라든가, 그런 걸 군자의 미덕으로 삼았던 논어적 삶을 떠나려 하는 것이죠. 난 이제 환자니까,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 속에 일체화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지난 50년을 외향적으로 살았다면, 이제 내향적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뇌기능도 많이 상실했어요. 나이도 너무 많고요.”


그의 글은 우리의 지성을 흔들어 깨워 준 귀한 선물이었지만, 리영희의 피를 들끓게 할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선물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리영희 선생의 글은 오랫동안 남겠지만, 리영희 교수는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왠지 그날이 나에게도 슬픈 날이 될 것 같다.
                                                                                            -2007. 5, 14

2010년 12월 8일, 오늘이 그 슬픈 날입니다. 5일 새벽에 소천하셨고, 오늘 저녁이면 광주의 아름다운 땅에 영원히 잠드십니다. 오늘은 영결식에 참석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하지 못한 울분의 날이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니 5시 50분, 영결식 10분 전이었지요. 고질적인 게으름을 원망하며 6시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후, 한 시간 동안 『대화』를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육성이 귀에 쟁쟁했습니다. 선생님이 꿈꾸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저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타고난 모양대로 살되, 정의만큼은 실천하며 살고 싶은 게지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이 잠드시옵소서!
              선생님의 삶을 따르는 21세기의 지식인들을 응원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