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7

이제 불면과 동침하러 간다

온종일 동분서주했던 하루였다. 분당으로 부친상을 당한 친구의 조문을 다녀왔고, 마포로 넘어가 스승의 번역 교정을 도와 드렸다. 저녁엔 온라인 글쓰기 피드백을 진행했다.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못 되어, 처음으로 카페를 찾아 들어가서 줌에 접속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손님이 한 분 밖에 없었고, 그이는 처음부터 이어폰을 끼고 있었지만, 카페에서의 줌 활동은 목소리를 크게 내기가 저어됐다. 오늘은 불가피했지만 앞으로는 강의 진행은 물론이고, 일대일 수업 또한 웬만하면 집에서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엔 잠자리에 들고서 3시간 가까이 불면에 시달렸다. 덕분에 오후 내내 졸음과 싸워야 했는데, 저녁 귀갓길엔 다행히도 그나마 멀쩡했다. 12시 어간에 잠들던 취침 리듬이 깨진 채로 며칠이 흘렀다. 도저히 다시..

Vita Nova/일지 2026.06.17

오래 전에 죽은 자

그는 죽은 자였다. 언젠가 죽을 줄로만 알았지, 이미 죽은 상태였음은 전혀 몰랐다. 세상은 곧잘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다. 그 역시 자신의 인식과는 달리 오랫동안 죽은 채로 살았다. 누군가에겐 헛소리로 들릴 테지만, 내겐 '그의 이른 죽음'이 자명한 사실로 들린다. 어느 소설 속의 문장이 진정 진실로 들리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숨을 쉬고 거리를 걸어 돌아다닐지언정 신의 눈에는 죽은 자입니다.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강합니다. 결정의 힘은 강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약해지는지를 엄포하는 선언이다. 그의 삶이 왜 그리 시시한지 역설하며, 정신은 또 왜 그리 비실한지 보여주는 문장이다. 그이의 시시함과 비실함에 대한 발언이 과격한데, 그나마 정제한 표현이고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

Vita Nova/단상 2026.04.20

어쩐지 뿌듯한 귀갓길

궁궐 답사를 다녀왔다. "계절은 봄인데, 가을 하늘 같아요." 일행 중 한 분이 말했다. 그야말로 화창한 날씨였다. 공기는 맑았고 하늘은 푸르렀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북악산도 희미한데, 오늘은 북한산 비봉 능선이 선연히 보였다. 설명을 위해 사진을 찍어 확대했더니 비봉 위의 진흥왕 순수비가 식별될 정도였다. 하늘의 축복 아래 따뜻한 봄볕과 함께 답사가 시작됐다. 육조대로, 광화문, 경복궁을 걸으면서 '세종의 문화 혁명'에 집중하고자 기획한 답사였다. 종업원이 7천 명쯤 되는 회사의 임원단이 참여했고, 나는 설렘 반 부담 반을 느끼면서 답사를 준비했다. 준비라고 하니 거창한 느낌이 든다. 실상은 1) 늘 진행하던 콘텐츠 중에서 강조하고 싶은 주제를 선정하여 관련 내용을 선별하고, 2..

Vita Nova/일지 2026.04.16

씻고 달리고 쓰는 하루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과를 시작하기 전, 세안을 위해 손에 물을 받으며 생각했다. '눈앞의 오늘을 잘 살아보자!' 얼굴을 씻을 때마다 자주 『소학 小學 』이 떠오른다. 조선의 학동들이 유학에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공부한다는 주자학의 기초 교재 말이다. 칠팔년 전 『소학』을 정성스레 읽었다. 당시 얻은 숱한 배움 중에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부터 쓸고 세안을 하고서 책상에 앉으라는 가르침을 참 좋아했다. 요즘엔 그리 못하지만, 아침마다 마당 쓸기와 세안하기를 오랫동안 실천했었다. 칠팔 년 전의 세월이 그립기도 하고, 몇몇 구절을 복기하고 싶기도 해서 책장에서 『소학』을 찾아서 펼쳤다. 찾으려던 구절은 '이른 아침에 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 하에 달린 글이었다. "안팎의 사람들은 첫닭이 울면 모두 세수하고..

Vita Nova/단상 2026.04.14

벚꽃과 갈매기와 언어적 환대

1.오후 4시의 햇살은 따뜻했다. 와우들과 함께한 1박 2일 MT를 마치고 일행들과 헤어진 직후였다.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져 화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흐린 날씨도 어느새 개어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귀여운 에피소드들로 출발선에 함께 서진 못했지만, 우린 같은 시간을 달렸다. 꽃은 거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새벽 3시까지 우리 숙소에서도 대화의 꽃이 피었다. 작은 소란들로 삶이 분주했던 와우도 먼 걸음을 달려와 함께해 주어 더욱 뜻깊었다. 표현을 하진 못했지만, 한분 한분께 참 고마웠다. 2.이번 MT의 핵심은 마라톤이었고, 귀가하는 길에 택한 원픽 여정은 무의도 해상관광탐방로였다. 느긋하게 거닐다가 갈매기를 말없이 관조했다. 활짝 펼친 두 날개로 활공하는 모습을 시샘하듯 바라보았다. 양파링을 던져주는..

Vita Nova/일지 2026.04.12

죽기 살기로 비타 노바

1. 고단한 삶이 3년 6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낱 꿈이길 바랐던 그 일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한 노력도 허사였다. 되돌릴 방도가 없었다. 하릴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야심차게 기획하여 추진하던 일이 순항하다가 뜻밖의 암초를 만나 좌초되고 말았다. 마음의 타격만 입었던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일로 내겐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 원의 빚이 생겼다. 그때는 몰랐다. 자산 1억과 부채 1억이 어떻게 다른지, 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1억이 얼마나 큰 돈인지, 단기간에 갚아야 하는 큰 빚이 얼마나 삶을 옥죄는지 정말 몰랐다. 무지의 대가는 혹독했다. 삶이 달라졌다. 한 끼 외식이나 카페에서의 커피조차 사치였다. 3년 6개월 동안 혼자 카페에서 커피..

Vita Nova/일지 2026.04.10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새소리를 들으며 앞마당을 쓸고 왔다. 아니다. 쓸 때엔 새소릴 인식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 쓸고 나니 선연히 들려왔다. 합창이라도 하는 걸까. 십 수 종의 새소리가 일제히 지저귄다. 2주 전 집주인 할머니가 오셨을 때도 마당을 쓸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아이고, 땀 나겄어. 해 없을 때 선선해지면 하셔.” 오늘은 어른의 조언을 따랐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살랑이는 봄바람을 맞으며 쓸었으니. 가을 낙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봄 마당도 사나흘에 한 번씩 쓸어주면 좋더라. 떨어진 낙엽과 꽃가루가 군데군데 뭉쳐 있기 때문이다. 마당과 함께 현관과 계단도 싸악 쓸어냈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재활용 쓰레기를 구별하여 분리 배출도 끝냈다. 내일 아침 일찍 해도 되는 일이었다. 손을 털며 거..

카테고리 없음 2019.05.22

사진

[짧은 소설] “다음 순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입니다. 내빈 여러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매년 5월 19일, 남양주 해유령 전첩지에서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육지전 승리를 이끈 신각 장군 추모 제향식이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다.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카메라에는 큼직한 셔터가 달렸다. 하늘은 잔뜩 흐렸다.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빛을 들이는 정도를 잘 조절해야 하기에 날씨는 중요한 변수였다. 그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선 이들의 사진을 몇 컷 찍었다. 사회자는 순서를 진행해 나갔다. “애국가 제창이 있겠습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는 이들의 모습 두 장을 가까스로 찍어냈다. 그는 디지털 화면을 통해 방금 찍은 사진을 보며 사냥꾼이 느낄 법한 포획감을 느꼈다. 사진 속 주인공이..

카테고리 없음 2015.08.31

탁월한 해석의 첫걸음

세상 끝에서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 보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른 독수리는 지구의 중심에서 다시 만났다. 그곳이 델포이다. 사람들은 델포이를 옴파로스라 불렀다. 배꼽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를 지구의 중심, 델포이를 지구의 배꼽이라 생각했다. 옴파로스에 아폴론 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다. 신의 뜻을 알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신이 아닌 ‘피티아’라고 부르는 무녀와 사제들이 신전에서 그들을 맞았다. 피티아는 신과의 매개자였다. 신의 말씀은 그녀를 통해 인간 언어로 전환된다. 피티아가 중얼거리면 곁에 있던 사제들이 피티아의 말을 모호한 해석을 덧붙여 의뢰인에게 전달한다. 신도 피티아도 만나지 못한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다. 의뢰인도 해석을 덧붙일 ..

카테고리 없음 2015.01.19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

인식이 변화를 이끈다. 자기 인식 없이는 자기 변화도 없다. 자기 인식은 뒤통수를 치듯이 우리에게 접근한다. 노력과는 별개로 불쑥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자기를 인식하고 나면, 정말 뒤통수를 맞은 듯이 멍해진다. 자기 인식을 하는 순간 우리는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그리고 얼마간의 절망과 허망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은 본인에게만 그렇다. 타자는 아무렇지도 않다. 오늘 인식한 나의 일면을 그들을 이미 쭈욱 알아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자기 인식은 그야말로 '나만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자기 인식은 '뒤늦은 인식'이다. 마치 뒤통수 같다. 뒤통수는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타자의 눈에는 아주 잘 보인다. 오히려 뒤에서 마음껏 나의 뒤통수를 관찰한다. 우리는 둘만 모여도..

카테고리 없음 201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