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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를 만난 기쁨

카잔 2017. 2. 6. 08:22


“나는 부끄러움이 많고 수시로 자책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소설가 이응준의 말이다. 부끄러움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늘 자책하고 나를 폄하하는 사람이다. 만난 적 없이 메시지만 주고받는 지인(?) 한 분이 어제는 “책 20권 읽는 것보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정독하고 씹어가면서 읽는 연 선생님”이라고 나를 표현하시더니, 며칠 전에는 이리 물으셨다.

 

“헌데 연 선생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낮게 여기시고 폄훼를 하는지요? 누가 비난이라도 합니까?” (폄훼는 아마도 폄하를 뜻하신 것이리라.)

 

무엇을 보고 그러시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나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호기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가슴이 동의했다. 알고 있던 문제가 아니던가. 다만 일면식도 없는 분도 저리 느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랐다. 기실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나에 대한 진실’이라는 게 정작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올해 가장 달라지고 싶은 내 모습은 생각만 하는 삶이다. 그래서 행동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나 더 바란다면, 자책과 자기폄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 자책의 순기능(이를테면 남 탓이 없고, 교만에서 멀어지며, 자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노력하게 된다는 점)을 잠시 잃더라도 자격지심을 떨쳐내고 싶다.

 

아침 독서를 하다가(정운영 선집, 『시선』) 김남주 시인에 대한 글을 읽었다. 내가 썼던 글을 확인하려고 블로그 글을 검색했다. 김남주 시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시에 대하여’ 라는 시 전문을 적은 글이다. 나의 감상도 간단히 덧붙였다.



 그런데 나의 소감 앞에다 ‘어설픈 감상’이라고 적어둔 게 아닌가. 그 동안 스스로의 글에다 ‘어설프다’고 평해 버리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 아니 수십 가지를 훌쩍 뛰어넘는다. 오늘 아침 ‘어설픔 감상’이라는 말을 지워 버렸다. 올해는 자아도취를 위해 애써야겠다. 도취까지는 꿈도 꾸지 못하나, 도취와 폄하의 중도까지는 나아가고 싶다.

 

이응준 씨는 산문집 『영혼의 무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중도는 어설픈 화해를 거부하고 옳은 판단을 내려 행동하는 강력한 이성의 실현이다" 중도, 균형, 중용, 조화는 내가 부단히 고민하고 추구하는 단어다. 어설픈 화해 거부라는 단어를 단박에 이해했다. 암, 그래야지. 그리고 편리한 타협도 거부해야지. 좌우를 모두 살피어 강력한 이성을 실현하려는 정직하고 치열한 지적 노력만이 중도와 중용에 이른다.

 

누구나 치우기는 쉽다. 태어난 성향대로 살면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니까. 중도에 이르는 첫 단계는 양 극단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다. 어설픈 이해로는 중도에 이를 수가 없다. 중도를 찾는 과정은 양 극단의 성급한 화해를 거부하는 동시에 결별하고 마는 충돌을 지향한다. 양극단을 모두 이해한다는 말은 양극단의 관점이 지닌 장단점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중도에 이르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지혜로운 중간 지대를 정확하게 찾아가는 일이다. 둘 다 중요하다는 말은 쉽다. 상황, 사람, 시대에 따라 둘의 비율을 어떻게 맞추는가가 중도의 관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가치를 이해하고 제대로 정리한 철학자다. 그는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 추구할 일”이라고 했다.

 

중도에 이르는 세 번째 단계는 오늘 찾아낸 정확성을 버리는 일이다. 오늘 유효했던 중간 지점은 내일이면 재설정되어야 한다. 상황이 바뀌고 인물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중도는 재활용품이 못 된다. 그때그때 출몰시켜야 하는 대상이지, 셋팅해 두고서 재활용하는 대상이 아니다. 중도에 이르려면 그때마다 상황, 사람, 시대를 고려해야 한다.

 

중도를 추구하려면 이성을 동지로 삼아야 한다. 양쪽 모두의 공격을 받게 되어 우군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의 비난을 부르는 이응준의 표현을 보라. "이 나라 소위 좌파들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고독한 지식인 행세로 나르시시즘의 허기를 채우고 있다면, 이 나라 우파들은 애국자 행세로 속물의 극치를 보여준다."

 

희소식이 있다. 추구할 선배들과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석은 합리성을 발휘하여 중도를 추구하는 작가다. 최근의 행보가 수상쩍었지만, 아직은 그간의 걸었던 길로 그를 바라보아야 하리라. 이응준 씨도 위로로 삼을 선배이지 싶다. 보다 확신 있게 말하려면 그의 산문집을 읽어야 할 것 같다. 나의 인생을, 폄하와 자책을 일삼으면서도 아름다운 가치(중용, 예술, 과학, 리더십)를 추구하는 글쟁이의 우왕좌왕 좌충우돌 여행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응준 씨의 책은 좋은 길동무가 될 것 같다.


큰일이다! 올해 행동하는 인생을 살면서 ‘한달 동안 책 읽지 않기’라는 이상한 목표도 세웠는데 읽을 책이 늘어난다. 이 목표는 폐기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