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투브에서, 언론에서 자주 뵙는 요즘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가 된 것이다. 5월 23일을 전후로 바쁘게 보냈다. 와중에도 틈틈이 영상을 찾아 시청했다. 5월이 다 가기 전에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싶었다. 오늘 그 마음을 좇아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4부 작별’을 읽었다.

두 번 울었다. 2008년에는 국가기록물 사태가 터졌고 이후 대통령에게 나쁜 소식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정치 인연들이 줄줄이 세무조사를 받거나 구속됐다. 형님이 구속된 직후에는 봉하 방문객 인사를 관두었다. 외출조차 하지 못하게 됐다. 노짱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겨울 내내 가끔씩 학자들을 집으로 불러 보았다. 이 모임을 할 때는 며칠 전부터 가슴이 부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읽고 메모하고 또 읽으면서 새벽까지 토론 준비를 하곤 했다. (…)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나를 겨냥한 4월에는 이 작업마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덤덤하게 읽었다. 그러고 싶었다. 바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아래 문단을 읽다가.

“4월 11일 아내가 부산지검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같은 날 건호가 귀국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건호가 탄 차와 따라붙은 기자들의 차가 보였다. 공항 입국장에서 사진을 다 찍었는데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자고 밥을 먹어야 다음날 대검중수부에 가서 조사를 받을 텐데……. 건호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흉기로 보였다. 미국에서도 기자들이 건호 집을 포위하는 바람에 손녀가 남의 집에 피신했다고 들었다.”

아비의 심정이 전해져 흐느껴 울었다. 이중의 고통이었다. 당신의 고통 그리고 가족들의 힘겨움을 바라보는 고통.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읽어나갔다. 다시 눈물이 흐른 것은 지난날을 회한 가득한 시선으로 돌아보는 정치가의 마음을 읽으면서였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었다. 대통령을 하려고 한 것이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꾼 지도자가 되려고 한 것이 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야망이 있어서 스스로 준비하고 단련했지만, 그들은 나로 인해 아무 준비 없이 권력의 세계로 끌려들어 왔다.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들이 고초를 겪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노동자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다면 애초에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회한 그리고 체념···. 노짱에게서 강인한 영혼을 느끼고 아모르 파티(운명애)를 생각하며 니체가 떠오르기도 했다. 유시민 지금의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노 대통령의 젊은 날 기록은 의분이 슬픔을 압도하지만, 봉하마을에서 남긴 기록은 회한이 두터워 분노가 잘 보이지 않노라고 썼다. “모든 것이 다 타 버리고 켜켜이 쌓인 잿더미 아래 마지막 불씨가 숨어 있는 화로”와 비슷하다고. 과연 그렇다. 회한에 덩달아 마음이 아파 가까스로 읽었다. 읽었던 챕터 중 하나의 제목은 “수렁에 빠지다”였다.

유시민 이사장은 에필로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함께 고통 받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썼다. 사람에 대한 “연민과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백(?)을 써 두었더라. “나에게 그는, 그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태지 않고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청년 윤동주는 시적 언어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삶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윤동주를 좋아하는 바로 그 이유로 인간 노무현을 가슴 깊이 존경한다. 청년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인간 노무현도 나에게는 일종의 예술가였다. 정치적 행동으로, 아니 삶 전체로 수오지심이 빚어낼 수 있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인생 예술가.

자기 삶에 날선 비판을 던지는 사람. 이리 쓰고서 멈췄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잠시 창밖을 내다본다. 봄바람, 흔들리는 나무, 서서히 흐르는 뭉게구름,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당신이 떠나시고 이러한 봄의 향연이 열 번이나 반복됐다고 생각하니, 그 속절없는 세월이 야속해진다.

두 문장을 적는 사이에 구름이 저만치 흘렀다. 구름 사이로 보이던 하늘 모양도 달라졌다. 구름 모양과 하늘 표정은 잠깐 동안에 잘도 변하는구나. 십년의 세월에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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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 후 서촌 밤거리를 걸었다. 스승과 함께였다. 적당한 포만감과 기분 좋은 취기도 동행했다.

스승의 날이었지만 식사하는 동안 감사의 말 한 마디를 드리지 못했다. 특별한 날 혼자서 뵈니 이것도 저것도 쑥스러웠다. 꽃다발을 준비하려다가 꽃바구니를 연구실로 보내 드리기로 했다. 이런 계획도 말씀드리진 않았다.

둘이서 나란히 걷다가 스승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오늘 왜 저를 만나자고 했어요?”
뜻밖의 물음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답했다.

“뵙고 싶어서요.”
(웃으시며) “제일 좋은 말이네요.”

마음에서 우러난 대로의 말인데 스승의 화답으로 충분한 답변이 된 느낌이다.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차로 단골 술집을 향해 걸으며 나눴던 이 대화가 지금도 마음을 적신다.

가로등이 적어 거리는 어둑했다. 서촌 카페들이 내뿜는 은은한 조명이 정겨웠다. 내 토트백에는 정성스럽게 쓴 감사 카드와 『그리스인 조르바』 책 한 권 그리고 한정식 집에서 절반쯤 마시고 남은 이차를 위한 ‘화요’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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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여행에서 만난 분들의 에너지가 남달랐다. 서로 즐거움과 유익을 주고받는 관계로 깊어져 가면 좋겠다. 나도 무언가 기여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마음으로 경청했다. 이를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자리였으니. 같이 일하다 보면 난관이나 어려움도 만나겠지만 함께 넘어가는 경험도 해 보고 싶다.

존경하는 후배와 함께 컬처웨이 대표님을 뵈었다. 일상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사업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편안했고 따뜻했고 즐거운 대화였다. 작년부터 회사 행사에 네댓 번은 부르셨는데 인문정신 수업이랑 매번 겹쳐서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지금에라도 뵈어 반갑고 감사했지만 대표님을 이리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문경수 선생님으로부터 비보를 들었다. 홍승수 교수님이 지난달에 소천 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먹먹했다. 직접 뵙지는 못했기에 나의 슬픔에 내가 당황스러웠다. 리버럴 아츠 특강에서 홍승수 교수님의 강연을 자주 추천했고 무엇보다 이충일 교수님께 들었던 홍 교수님과의 일화를 살갑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

와우 모임에서 ‘세 줄 일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담 없는 형식으로 느껴져 귀가 솔깃했네요. 아직은 간소함의 지혜와 기술을 익히지 못해 '세 줄' 대신 ‘세 덩어리’로 며칠 써 보려고요. 제게 적절한 형식이라면 이어가겠지요. 첫 날을 기념하여 포스팅해 봅니다. 자주 올리진 않겠지요. 일기는 가장 내밀한 글쓰기잖아요. 일기쓰기의 가치와 미덕은 그 내밀함에서 극대화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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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신간이 나왔습니다.『교양인은 무엇을 공부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3월 12일에 손에 받은 책을 이제야 포스팅하네요. 미루고 또 미루다 어느새 두 달이 지났어요. 미룬 것인지 두려웠던 것인지 모를 마음을 누르고 책을 처음 받고서 썼던 메모를 옮겨 둡니다. ^^

<책상 앞에 놓인 신간을 바라봅니다.
오랫동안, 물끄러미.

여러 생각들이 스쳐가네요. 이제야 나왔구나. 더 치열할 걸! 아, 부끄럽다. 깊은 공부의 신호탄으로 삼아야지. 엄마가 보고 싶네.

읽기를 즐겼고 공부를 잘하고 싶어 쓴 책입니다.
그 행복감과 열망이 전해지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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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살리아 2019.05.30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 브라질에도 보내주세요 강사님~~~

    • 보보 2019.05.31 0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로살리아님! 반가워요. ^^

      참 놀랍네요. 벌써 몇 주가 지났어요.
      '안젤리카님께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지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드는 밤인데
      오늘은 안젤리카님에게 메일을 써야지,
      하고 거실로 나와 노트북을 켰어요.

      그리고 로살리아님의 댓글을 본 거죠.
      교감이라도 나눈 듯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달린 댓글에 반갑고 놀라웠어요. ^^

      네, 얼른 보내 드릴게요~
      제 바람과는 달리 한참 걸리겠지만.

“<올해의 10대 뉴스 작성하기>는 누구나 손쉽게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물의 차이가 큽니다. 뉴스 작성이 ‘연말 이벤트’의 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인식을 얻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하니까요. 3단계 역사의식을 실천할수록 더 많은 자기인식을 얻으실 겁니다.” (방법론만 읽으시려면 6번 글로 가세요.)


*

오늘을 포함하여 딱 20일이 남았습니다. 스무 날이 지나면 2019년이 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기 좋은 시절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돌아봐야 할까? 이 질문을 안고 오늘 아침을 보냈습니다. 꼭 돌아보아야 할까, 그냥 지나가면 안 될까? 성찰의 당위성 또는 타당성에 대한 회의를 끌어안고서 며칠 째 생각해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얼마간을 글로 풀어내야 생각의 물꼬를 만날 것 같아 결국 오늘도 무언가를 끼적입니다.


1.
간혹 성찰을 폄하하는 시선을 만납니다. ‘젊은’ 행동파들은 종종 성찰의 중요성을 간과합니다. 성찰이란 행동의 훼방꾼에 불과하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보는 시간을 아까워하더군요. ‘부지런히 달려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라니!’ 그들에게 성찰이란 행동이나 질주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행위입니다. ‘중년’의 행동파들은 다릅니다. 구슬(경험)도 꿰어야 보배란 걸 깨우쳤거나 생각 없는 행동으로 빚어진 과오를 맛보아서인지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2.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성찰을 폄하합니다. 비유컨대 성찰이란 차를 몰고 가다가 잠시 ‘정차’하여 목적지를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연료나 엔진오일이 부족하다면 채우고 갈림길에선 방향을 확인하는 거지요. 후진하거나 주차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찰은 퇴행이 아니라 더 효과적으로 진보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자기이해와 실천이 조화를 이룰수록 성장하겠지요. 자기이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수단!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3.
성찰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만났다면 성찰이 두려워집니다. 다시 그 사건의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요. 감정의 고통 또한 고스란히, 어쩌면 더 크게 느껴야 하니까요. 이럴 때의 성찰은 용기를 발휘한 결실이겠죠. 앞서 설명한 행동파와 신념파의 성찰 회피는 타고난 ‘성향’과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낯설거나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성찰을 멀리한 경우겠습니다. 이때에도 성찰을 시도했다면 자기인식이나 합리적인 논리와 가까워진 덕분이지 싶네요. 이상의 내용을 뒤집어 표현하면 이리 됩니다. 깊은 성찰이 드문 이유는 우리의 자기이해와 논리력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용기를 발휘하기도 어렵기 때문이겠죠.


4.
자기기만이 성찰을 방해합니다. 외면과 합리화는 대표적인 훼방꾼입니다. 외면 이야기부터 해 보죠. 불미스러운 사건은 자아를 둘로 분리시킵니다.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느끼는 자아 그리고 (삶은 계속되니까) 일상을 살아가는 자아! 두 자아는 삶의 다른 두 영역을 살아갑니다. 내면의 고통을 느끼며 개인적인 시간을 살고 최대한 힘을 발휘하여 대외적인 시간을 삽니다. 이중성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정직과 자기기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의식 없이 살려면 또는 자아 분열을 피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 불미스러운 사건에 눈을 감으면 됩니다. 사건을 덮어버림으로 부조리한 진실을 자각할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거죠. 둘째,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적인 목소리에 재갈을 물려 앞으로의 일상에 몰입하자고 주술을 겁니다. 덮어버림과 재갈 물림 모두 ‘외면’이라는 자기기만입니다. 외면은 성찰 자체를 차단하지요.


5.
합리화는 성찰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기만입니다. 인간은 감정적으로 선택하고선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 존재입니다. ‘존재’라는 거창한 단어를 불러들인 이유는 합리화가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 중 하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합리화는 불가피합니다.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엄격한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용납과 선처의 대상으로 봐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합리화를 권장할 순 없습니다. 추구할 목표는 더더욱 아니죠. 합리화를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합리화가 우리의 행복감을 높이기 때문이라면, 합리화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는 합리화가 우리로부터 지혜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에 주목하지 않는 시선이 지혜로워지기는 힘드니까요. 진실에 눈 먼 시선은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6.
십년 넘게 어른학생들과 인생 공부를 함께하면서 성찰을 강조해 왔습니다. 중요성만 강조해서는 곤란하여 수년 전부터는 성찰의 방법론과 철학을 역설했고요. 성찰의 방법론 하나로는 월말에 ‘이달의 3대 뉴스’를 쓰고 연말에는 ‘올해의 10대 뉴스’를 작성하는 겁니다. 누구나 손쉽게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물의 질은 저마다 다릅니다. 뉴스 작성이 ‘연말 이벤트’의 하나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인식을 얻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하니까요. 깨우침의 장으로 만드는 방법은 3단계의 역사의식을 배워가는 겁니다. 뉴스 하나하나를 작성할 때 적용할 지침입니다.


1단계 : 기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것. 더하거나 빼거나 기만하지 말 것. (정직하게 사실을 기술하지 않으면 이것은 자기 ‘역사’가 아니라 자기 ‘픽션’이 됩니다. 성찰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자기를 직시하는 자리겠지요.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체험하면 왜 많은 나라들이 역사를 왜곡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2단계 : 해석. 뉴스마다 인과관계를 파악할 것. 원인과 결과를 합리적으로 따져볼 것. 이것을 어떻게 성취했을까? 왜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까? 왜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이유와 원인을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찾아낼 것. 합리화를 덜어낼 것. (해석은 이성적인 논리적인 작업입니다. 지인과 친구들의 다양한 관점을 들으면 좋습니다.)


3단계 : 평가. 어떤 한 해를 보냈는지 올해의 가치를 매겨 볼 것. 자신의 가치관과 비전에 견주어 평가할 것. (해석은 객관적일수록 좋지만 상대적으로 평가는 주관적인 작업입니다. 자기 기준이 중요합니다. 자기 삶의 가치와 목표에 비추어 스스로 평가하면 됩니다. 정직한 기술과 논리적인 해석을 바라볼 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7.
얼마만큼의 시간 단위가 ‘돌아보기’에 적당할까요? 매 시간을 돌아볼 순 없습니다. ‘한 시간’은 몰입의 대상이지 돌아봄의 주기로는 비현실적입니다. 삶을 전혀 돌아보지 않다가 만년에 ‘평생’을 성찰하려면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겠지요. 많은 기억을 상실했을 테고요. ‘한 시간’과 ‘평생’을 양 끝으로 하는 ‘시간 단위 스펙트럼’에서 저마다에게 적합한 돌아봄의 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겐 매주 그리고 연말이 좋습니다. 삶을 돌아보기에 맞춤한 시절입니다.


돌아봄의 가장 작은 단위는 하루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를 챙기는 형식이 ‘일기’겠고요. 회고록을 작성하는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찰의 가장 큰 단위는 한 해가 아닐까요? 한 해 이상의 세월을 돌아보는 경우가 드물어서 하는 말입니다.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지금이야말로 ‘성찰’을 실천할 적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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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민 2018.12.16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감사합니다. 10대 뉴스를 뽑을 때 기술도 제대로 못했지만 해석과 평가는 더욱 부족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올해는 제대로 해 봐야겠습니다!^^


글쓰기 강좌가 범람합니다. 강물이 범람하면 강에 있지 말아야 할 것들이 떠다니더군요. 헌 신발, 폐기물, 조각난 목재, 부유하는 쓰레기들! 범람의 시대는 곧 주의를 요하는 시절입니다.


매년 증가하는 출간 종수와 수많은 글쓰기 강좌를 바라보다가 느낀 점 몇 마디를 적어 둡니다. 따옴표로 인용한 아래 문장이 글의 요지가 되겠습니다. ‘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저자의 권위와 희소성이 떨어지는 시대에 출간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한 해 8만 종의 책이 출간되는 시대에 저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
글쓰기가 열풍입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책을 출간하려는 분들을 자주 만나는 요즘이네요. 글을 쓰겠다는 ‘욕망’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글쓰기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글쓰기에 깃든 치유의 힘으로 자신의 아픔을 위로하고, 억울한 사정을 글로 표현함으로 고통을 달랠 수 있으니까요. 긴 글을 쓰다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더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공부하면서 쓰면 되니까요. 새들은 무언가를 '잘 알아서' 노래하는 게 아닐 겁니다. '부르고 싶어서' 지저귀는 게 아닐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테죠. 쓰고 싶다면 한껏 즐기거나 공부하면서 쓰면 됩니다.


[Tip] 글쓰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명저들이 있죠! 세 권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권합니다.


2.
수요가 있는 곳에는 공급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수요가 많으면 다양한 수준의 공급자들이 참여하고요. 그들 중엔 하이에나 같은 공급자도 섞여 있을 테고요. 글을 쓰려는 욕망(수요)을 간파한 글쓰기 수업(공급)이 난무합니다. 예술가의 영혼이 아닌 장사꾼의 영혼을 지닌 선생들이 많아 보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필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보다는 강좌를 홍보하고 수강생을 모으려는 노력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선생이라면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쟁이의 눈에는 상스러운 수법이 훤히 보이는데 욕망이 간절한 수강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가요?)


3.
모든 글쓰기 선생이 예술가(작가)의 영혼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선생은 소명과 헌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일반인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침을 건네거나 두루뭉술하게 조언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어느 수준까지는 장사꾼의 영혼을 지닌 선생이 더 잘 가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화법이 뛰어나니까요. 수사적인 능력에다 학습력마저 갖춘 선생이라면 유용한 수업을 진행하죠. ‘저기 아래’에서 ‘여기 위’로 올라선 경험이 있고 자신을 오르게 만든 ‘사다리’를 파악하여 전달한다면 탁월한 선생이 될 테고요. 작가의 영혼이냐 장사꾼의 영혼이냐가 관건이 아닙니다. 훌륭한 장사꾼이 아니라 수준 낮은 장사치의 영혼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Tip] 수강료가 터무니없이 비싸면 일단 의심하면 어떨까요? 책을 출간해 준다고 하면 좀 더 경계하고요. 물론 ‘필력’ 향상이 아니라 ‘출간’이 목표라면 그들의 조언을 따르면 되겠죠.


4.
잠깐 목표를 점검하는 일도 나쁠 건 없겠죠. 목표를 달성해도 예상만큼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출간’을 목표로 글쓰기 수업을 찾으신다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자’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잖아요. 10여 년 전 첫 책을 출간했을 때, 우리나라는 한 해 4만 종을 출간하는 ‘출판대국’(한 출판인의 표현)이었습니다. 4만 종을 내던 당시에도 ‘대국’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더 놀랍습니다. 한 해에 8만 종을 출간하는 나라가 됐으니까요(2017년). 


독립출판이 늘고 전자책 출간도 쉬워졌습니다. 저자가 되는 문턱이 낮아졌다는 말입니다. 출간 종수가 비약적으로 늘어가는 동안 독서 인구는 꾸준히 줄었습니다. (독서 인구의 감소는 통계가 필요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체감으로도 느껴지니까요.) 읽지도 못한 채로 지인의 책 출간을 축하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겠죠. 언젠가 한 정치인의 출간기념회에 참석하기로 했던 지인이 행사를 앞두고 가기 싫어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출간기념회 기피 현상이 정치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확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들이 계속 증가한다면 말이죠.


5.
올해(2018) 읽은 최고의 칼럼은 소설가 박민규의 <백 년 동안의 지랄>입니다. “백 년 전의 조상님들은 꿈꿨을 것이다. 양반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들의 후손도 꿈꿨을 것이다. 대졸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행한 일은 모두가 양반이 되고 모두가 대졸자가 되는 길이었다. 정부의 보조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똑같은 성격의 일을 스스로, 백년 넘게 대를 이어, 자신의 피땀과 사비를 들여 이룩해 왔다는 사실이다. 정말 미안한 얘기긴 하지만, 나는 이것을 ‘지랄’이란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다.”


구한말 시대를 살았던 조상들 대부분이 양반이 되는 가짜 족보를 샀습니다. 그리하여 전체 인구의 99%가 양반인 나라를 만들었죠. 100년 뒤에는 모두가 대학 진학을 부추겨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률을 이뤄냈습니다.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1991년 33.2%였던 대학진학률은 2001년도에 최초로 70%를 넘어섰다가 2008년을 전후로 최고치인 80%를 경신했고 2017년에는 70% 정도까지 내려왔습니다.) 다시 박민규 씨의 글입니다. “양반이고 대졸자인 우리가, 양반인 데다 대학을 나왔는데도 그 어떤 대접도 못 받는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모두가 양반이 되어 아무도 양반이 아닌 세상에서, 다 같이 대졸자가 되어 누구도 대졸자 대접을 못 받게 된 세상에서 말이다.”


[Tip] 저도 질문을 품게 됩니다. ‘저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시대에 출간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한 해 8만 종의 책이 출간되는 시대에 저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6.
(공급자든 수요자든) 문제는 욕심에서 발생합니다. ‘욕망’이 아니라 ‘욕심’ 말입니다. 욕망은 하고자 하거나 갖고자 하는 탐심입니다. 욕망이 곧 그의 고유함이겠죠. 저마다 다른 욕망을 갖고 있으니까요. 욕망이 우리를 추동합니다. 욕망이 우리는 어딘가로 이끕니다. 욕망에는 역동성, 생산성, 창조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반면 욕심에는 이러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없습니다. 욕심은 분수에 넘치도록 탐하는 마음입니다. 날씬해지고자 하는 바람은 욕망이지만, 식사량을 줄이지 않고 몸무게를 줄이겠다는 마음은 욕심입니다. 욕망은 우리를 향상시키지만 욕심은 우리에게 자주 근심과 번뇌를 안깁니다.


[Tip] 3천만 원짜리 과외를 받더라도 날마다 연습하지 않으면 피아니스트가 되기 힘듭니다. 훈련 없이는 뛰어난 실력도 없으니까요. 쉬운 길을 택하면서 고차원의 기술을 익히려는 마음은 욕심이지 싶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제 마음이 욕망인지, 욕심인지 살펴봅니다.


7.
책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출판사의 ‘안목’과 책방 ‘큐레이션’의 중요성을 곱씹게 됩니다. 안목 있는 출판사가 출간한 책들은 여전히 훌륭합니다. (바다출판사가 최근 수년 동안 출간한 단행본들과 잡지는 눈부십니다. 글항아리가 펴낸 책들의 깊이는 여전하고요.) 품격 높은 안목을 더욱 가꾸어가는 출판사들의 존재가치는 영원하겠죠. 독립책방의 큐레이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여과기능 없이 분야별로 진열하는 대형서점들과 달리 독립책방이 저마다의 색깔, 깊이, 테마, 취향을 좇아 구성한 큐레이션은 독자들의 문화 수준을 높일 테니까요. 


글쟁이로서의 바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은 유익하고 고상한 일입니다. 글쓰기를 배우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으려는 ‘욕심’ 대신 필연적인 훈련과정을 기꺼이 실천하겠다는 ‘욕망’을 품는다면 배움의 결실이 커지겠지요. 만약 제가 청강한다면 전체 글쓰기 강좌 중 상위 10% 안에 들 탁월한 수업을 찾으려 할 겁니다.


[TIP] 은유 작가의 글쓰기 수업이라면 권하고 싶네요. 이것은 직감입니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왠지 느낌이 좋습니다. 아래의 글쓰기 책들은 제가 읽은 명저들이고요.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바버라 애버크롬비 『작가의 시작』
앤 라모트 『쓰기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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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도 비가 옵니다. 안개가 자욱하여 거실에서 내다보이던 산 풍광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분명 저기쯤 존재하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생경한 느낌의 아침입니다.

  

소멸이 아니니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하고 자꾸 찾게 되네요. 존재함을 알기에 찾습니다. 새삼 그리움이란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한 감정임을 깨닫습니다.


'소멸'이든 '부재'든 여기에 없으니 그리워하고, 존재함을 알고 있으면 찾거나 헤매게 됩니다.


아침 시선이 헤매는 까닭은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절절히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와 깊은 친밀함을 누렸던 응보겠지요. 오늘도... 나는 헤매고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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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정은 2018.11.28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서관에서 책을빌렸습니다^^ 나는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 인데요,, 독서를 이제시작하고 인생의 방향을 잡는시기이라,,또 이런블로그를 알게되었네요~좋은글많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혹시추천해주실만한 책이있으신지요,

    • 보보 2019.05.31 0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시에 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후일에라도 관심사, 읽으신 책, 연령대를
      알려 주시면 정성껏 추천 드리겠습니다.


대화의 희열! (2018년 9월부터 시작된 KBS2 프로그램명입니다.) 이리도 매혹적인 제목이라니요! TV가 없기도 하고 잘 보는 편도 아니라 송해 선생님의 기사를 통해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관심이 갑니다. 위로, 희열, 감동, 자극을 얻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송해 선생님 편부터 보고 싶습니다. 아래 기사 때문이에요. 기사 만으로도 위로가 되더군요. 제 인생의 상실을 들여다보면 30~40대의 삶이기보다는 50~60대의 삶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이야 그렇다 쳐도 친한 친구들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기에 하는 말입니다. 

 

'92세 송해의 그리운 사람들'이란 기사의 마지막 두 문단을 옮겨 둡니다. 너무나도 슬픈데 희망적이어서... 


<송해는 올해 1월 부인 故 석옥이 씨와도 사별했다. 송해는 "어머니, 아들만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데 마누라까지 그러게 됐다"며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같이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갔는데 아내는 못 나왔다. 폐렴이라는게 나쁘다. 아내의 빈자리는 (나중에) 동행하는 날까지 채울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송해는 "내가 실의에 빠지지 않게 각오해야지 도리가 없더라. 견디기 힘들지만 손녀 둘과 손자 하나가 있는데 그 아이들이 내 희망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놈들에게 할아버지 본 때를 보여줘야지 하면 거뜬해진다"고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가족이야말로, 특히 자녀야말로 삶의 존재 이유이자 삶을 버티는 기둥이겠지요. "녀석들에게 든든한 힘(울타리, 기동, 희망)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이 고통과 힘듦을 버티게 만들고 삶의 무상함을 얼마간 덜어내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솔로 생활을 부러워하는 친구가 이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원아, 나는 정말 네 자유가 부럽거든. 그런데 주말이나 명절엔 네 생각이 안 나더라. 녀석들이 내 삶의 기쁨이거든." 두 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행복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이 '친밀한 관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요즘이네요. 친구, 연인, 스승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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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앙이 다가온다면 당신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1922년, 파리의 저명한 신문 <비타협>이 여러 인사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생기는 갑작스러운 삶에 대한 애착을 설명함으로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은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거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지! 언젠가 할 거라는 확신으로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진실을 숨겨 버립니다.


만약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협이 생기면 세상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 대재앙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갤러리를 방문하고, X양의 발아래 우리를 던지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텐데요.


실제로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상적인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요. 무신경이 소망을 죽입니다(Negligence deadens desire).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죽음이 당장 오늘 밤에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지구의 멸망 없이도 우리가 인간의 필멸성을 상상할 수 있다면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일상을 재편할 테지요.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습관적인 믿음, 다시 말해 무신경한 부주의를 던져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시도하지 못했던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을까요? 


알랭 드 보통이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 (How to love life today)"으로 건넨 이야기들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상상은 현재를 아끼고 몰입하는 비결이지 싶습니다. 저는 이사를 떠나려 할 때마다 그간 살았던 동네가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언젠가 이 지구를 떠날 때에도 그러겠지요.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상상입니다.(201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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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카페에 와서 100개에 달하는 카톡을 모두 읽었어요. 집에선 인터넷이 안 되니 이런 수고를 해야 하네요. 차를 타고 5분을 달려 양수리 카페에 오는 ‘수고’ 말이죠. 조금 불편하지만 재밌는 일상이에요. 월말 며칠 동안만 겪는 불편함이니 일시적이고요. 물론 카톡을 하러 카페에 온 건 아니에요. 오늘은 인문정신 수업이 있는 날이니 외출해야 하죠.


창밖 풍광이 아름다워요. 초록, 연두, 주황, 노랑, 붉음이 어우러진 단풍들이 고즈넉하게 한강을 바라보고 있어요. 정말 그래요. 내가 단풍을 바라보는지, 단풍이 나를 바라보는지 순간 혼동될 만큼 저네들이 사람처럼 느껴지네요. 이런 표현은 과장이나 의인화가 아닌 지금의 제 감상이에요. 이곳에서 우리 셋이서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요?


중고 도서로 『인생의 맛』을 구했다는 소식을 봤어요. 나까지 즐거워지는 기분이었죠.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에게 권하는 책이거든요. 부담 없이 읽히는데 깊은 인문적 풍미를 만나고, 문장이 좋은 데다 또 다른 책(『수상록』) 읽기로 이끌어 주니 누군가에게 추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입니다. 게다가 분량은 또 얼마나 착해요?!


내가 읽을 책을 선택하는 일은 그야말로 즐겁고 흥분되는 일상입니다. 반면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어렵고 힘들어요. 때론 곤혹스러운 정도죠. 훌륭한 책이면 다소 어렵고(『인생의 발견』처럼) 읽기에 편하면 내용이 아쉬워요(대다수 베스트셀러 입문서들). 『인생의 맛』은 복잡한 심경을 날려 줘요. 『고민하는 힘』, 『예술 수업』 등도 그렇고요.


공부에 대한 얘기를 나눴더군요. ‘혼자 하는 공부’와 ‘인식을 열어 주는 청강’의 조화라면 공부 여정에 힘이 붙을 테죠. 답사가 가능한 공부라면 길을 떠나면 좋을 테고, 동학과 함께 대화마저 곁들인다면 공부가 깊어지고 즐거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공부를 위해 내년에는 공자의 묘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최근 『논어』를 열심히 읽었거든요.


‘책방’은 예상하신 대로 <최인아 책방>입니다. 여느 책방이면 함께 프로그램을 하자는 제안에 뜸을 들이고 늑장을 부렸겠지만 이번에는 바로 "YES"라고 대답했죠. 사부님과의 인연도 한몫 했지만, 말씀하신 대로 지금까지 참여한 분들의 면면이 훌륭하거든요. 저도 슬쩍 끼어 후광효과라도 맛보고 싶은 겁니다. 책방에서 어찌 제게 제안을 했는지 의아하기도 해요.


토요일에 책방 홀에서 독서 특강을 했는데(그날 세미나룸에서는 김상근 교수님이 함께하는 독서 토론 모임이 있었죠) 선전했지만 기분 상으로는 ‘폭망’한 느낌입니다. 논리적으로 진행하지 못했고 재미가 결여되었고 무엇보다 청중의 몰입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이 경청해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분들께는 재미없었을 거에요.


이미 읽으시어 알고 계신 대로, 지난주부터 블로그 포스팅을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가꾸지 못한 곳이라 막상 첫 글을 쓰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엔 마음 준비의 문제지만 그 마음을 먹고 실행하기가 마냥 쉽진 않더군요. 마음 속 잡초를 뽑고(다음 주부터 하지 뭐), 밭을 갈아(무엇을 쓸까 고민하고), 씨를 뿌렸어요(글을 써 올리는 일이죠).


블로그를 가꾸는 일은 상징적인 출발이에요. 일상의 변화가 비단 포스팅에만 그친 게 아니거든요. 상실의 고통이 3개월 쯤 지나니 회복되기 시작하나 봐요. 책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어요. 어제는 하루키 단편을 읽고 서평을 하나 썼어요. 주말의 여유를 빌어 단편 소설을 읽고 그에 관해 마음 가는 대로 글을 끼적인다는 게 내게는 행복이더라고요.


제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하시겠죠? 이럴 땐 자진 신고가 살 길입니다. (함구한다고 해서 갑자기 죽는 건 아니지만 ‘살 길’이란 표현을 썼네요. 은근히 장난끼가 발동한 겁니다.)

『잠의 사생활』(잘 자는 법에 대한 최신 연구 결과가 흥미로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이젠 놀라지도 않죠?), 『어떻게 나로 살 것인가』(초반 1/3은 훌륭해요. 끝까지 괜찮으면 추천할게요. 자기다움이 아니라 꿈의 실현에 관한 책예요), 『반딧불이』(하루키 단편집입니다. 아주 재밌진 않으나 제겐 울림을 주네요) 등을 읽거나 읽는 중입니다. 


강원도의 여러 산들을 다녀오셨다고요? 강원도가 선사하는 숲 종합선물세트를 만끽하신 느낌이네요. 양평에선 그나마 가까운 산들인데 저도 얼른 시간을 내고 마음을 챙겨 다녀와야겠습니다. 아직은 마음이 쓸쓸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만나는 가을 풍광도 또 다른 맛과 멋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즈음이면 흔히 듣는 단풍 나들이인데(지난주에도 친구의 단풍 여행 소식을 들었거든요) 어찌 이번에는 ‘나도 가야겠다’고 결심한 걸까요? 가까운 이들끼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15%라고 했던가요? 친구의 친구면 6%(가물하네요)! 이 영향력은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까지 가야 소멸 된다죠?


오늘 아침 두 분이 전해 준 긍정적인 에너지와 행복의 기운에 감사드려요. 3개월 넘게 진행된 저의 불면증은 점점 떠나가는 것 같아요. 아직 정상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수면 시간이 확실히 늘었어요. 잠을 자니 기운이 생겨요.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면 기운이 필요한데, 불면이 악순환을 가속시킨 것도 같더라고요. 더욱 회복되어 저도 행복한 마음을 나누고 싶네요.


11월에는 분명 전환의 시간이 될 거예요. 이건 느낌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그리 만들고 말 테니까요. 월초에는 인문정신 세미나(4주 희랍 고전 과정)이 시작되고 중순에는 최인아 책방 독서토론(6주 과정)이 출발해요. 월요일마다 인문정신 수업이 진행되고요.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으며 글을 부단히 쓸 겁니다. 이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연지원이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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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종옥 2018.10.29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지원이 살아났다!”
    이 문장을 읽으며 소리쳤네요.
    "앗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