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짧은소설 긴여운 27

해결

[짧은 소설] K는 중고 믹서기를 2만원에 팔았다. 물건을 건네며 K가 말했다. “날이 여전히 날카로워서 어떤 과일이나 채소도 곱게 잘 갈려요.” 물건을 구매한 사람은 자신의 기대만큼 날이 날카롭지는 않음을, 이튿날 당근을 갈면서 알았다. 갈리긴 갈렸고, 불편하진 않았다. 아쉬움이 찾아든 것은 뚜껑이었다. 흘림 방지용 고무패킹이 조금 헐거웠다. 믹서기 용기를 거꾸로 뒤집으니 내용물의 수분이 약간씩 새어나왔다. 믹서기를 뒤집어 사용할 일은 없지만, 조금은 불만족스러웠다. 환불을 요구하거나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세하고 정확한 공지의 중요성을 느꼈다. 다른 중고 매매자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로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거나 갈등이 일어날 만한 일은 모..

정답

[짧은 소설] 여자 셋이 동네 카페에 모였다. 명품 빵과 맛난 커피로 유명한 이 곳은 Breakfast Time이란 메뉴가 있다. 6,500원만 내면 세 가지 종류의 빵과 세 가지 치즈 그리고 우유, 주스, 커피를 무제한으로 제공한다. "드실 만큼만 맛있게 드시고 남기지 말아 주세요." 작은 안내말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세 명의 여자는 시끄럽게 입장했다. 한 명이 팔을 들어 창밖을 가리키며 "주차는 저기 도로에 하면 돼요?" 라고 물었다. 필요 이상의 큰 목소리였다. 커피를 마시던 외국인 남자가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고객님, 카페 뒷쪽 주자창에 하시면 됩니다." 다시 주차하고 들어온 그녀는, 먼저 자리잡은 동행들과 합류했다. 두 명은 이미 빵 한 접시씩 들고오는 중이었다. 그때 젊은 여자 점원이 다..

원수

[짧은 소설] 성경공부를 진행하는 진수는 K를 미워했다. 말이 길고 많았다. 분위기 파악도 못했다. K로 인해 다른 멤버들의 발언 기회가 줄거나 마쳐야 하는 시간을 넘기곤 했다. 진수는 열 받으면서도 K의 발언을 적절하게 제어하지는 못했다. K의 말이 끝나면 얼른 끼어들어 다른 멤버들에게 발언권을 넘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진수는 K만 없으면 더욱 분위기 좋은 성경공부 소그룹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K는 가장 높은 출석율을 자랑했다.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던 진수에게 문자가 왔다. "진수오빠, 제가 이번 주 성경공부 참석을 못할 것 같아요. 저희 언니 결혼식이라 고향에 내려가야 해서요. 아쉽지만 다음 주에 뵐게요." 진수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이번 주는 최고의 성경공부 시간이 되겠구나.' 진..

감수성

[짧은 소설] 여자는 남편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알아 차렸다. 아이의 말투를 읽을 줄도 알았다. 때때로 달빛에 홀려 추억에 물들고 빗소리에 젖어 음악에 취했다. 여자는 홀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시원한 풍광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한다고 여겼다. 자신의 생각을 알고 세상살이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말수가 줄었다. 그들을 이해하기에 바빠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다. 상황을 헤아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발동되었다. 이해하기에 능숙해진 이들도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것도 섬세하고 정확하게 이해받기를 원한다. 정확한 이해는 드물었다. 여자는 외로워졌다. 그녀는 소통을 위해 바늘을, 상대는 두툼한 몽둥이를 내밀었다. 접점이 있었지만 교감은 충분치 못했다...

젊은 할머니

[짧은 소설] 진숙은 골프 연습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액정에 "내딸"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이내 미소가 맴돌았다. "엄마, 이번 주 토요일 오전에 예원이 잠깐 봐 줄 수 있어?" 딸은 언제나 '잠깐'이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잠깐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야, 구체적으로 말해." 반가운 투정이었다. 회갑을 넘긴 동네 언니들은 자꾸 봐 주기 시작하면 발목 잡힌다며 신중하라고 조언했지만, 진숙은 손녀딸을 잠시 봐 주는 게 싫지 않았다. 할미가 된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손녀딸을 보고 있으면 다시 젊은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알았어. 엄마가 2시에는 나가야 하니까 그 전에만 와." 연습장에 도착한 진숙은 몇 차례 스윙을 휘두르다가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선물

[짧은 소설] 엄마는 아이에게 책을 선물했다. 아이에게 맞춤한 선물이었다. 책은 새로운 인식을 선사했고, 아이는 인식이 확장될 때마다 경탄했다. "놀라워요, 엄마!" 엄마는 아이의 감탄을 기뻐했고,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했다. 아이의 미소 띤 경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쁘다가도 우울했고, 울적하다가도 신이 났다. 아이는 자의식이 강한 축에 속했고, 아쉬움도 큰 편이었다. '나는 왜 지금까지 이것도 모르고 살았을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놀라워하다가도 좀 더 일찍 건너오지 못한 지난 날들을 아쉬워했다. 주변 어른들이 자신을 식견 좁은 아이로만 보아왔을 거라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아이의 생각과는 달리, 대다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닌 아이들은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아이는 잠시 두렵기도 했다. '앞..

관리

[짧은 소설] 남자는 여자를 떠나려 했다. 여자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놀랐지만, 인생사는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아버지는 예정된 날이 아닌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회사에서는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갑자기 그녀를 해고했다. '갑자기'는 인생사의 본질이었다. 이번이 두번째 통보였다. 일년 전에도 남자는 이별을 고했었다. 그때는 붙잡았지만 이번에는 안 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여자는 부탁했다. "내게 조금만 시간을 줘. 마음 정리할 시간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그의 눈빛에서 사랑이 아닌 동정을 본 것 같아 슬퍼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튿날 오전 10시 20분에 여자는 카카오톡을 보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11시 3분이 되어..

또 한 명의 엄마

[짧은 소설] J는 퇴근하자마자 서둘렀다. 언니 집에 갈 생각이었다. 왕복 3시간을 달려야하지만, 오늘 가야만 하는 일이 그녀를 움직였다. 회사 문을 나설 즈음 핸드백을 열어 점심시간에 작성한 손 편지를 챙겼는지 확인했다. 이제 자동차를 달릴 일만 남았다. 운전대를 잡고 시내를 빠져나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나 수진이에게 가는 길이야. 일찍 올게.” 어젯밤에 미리 말해 두긴 했지만, 퇴근 후에 세 살, 네 살 아이를 보고 있을 신랑을 생각하면 언니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가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저 안아 주기만 해도 내 마음이 전해질거야.’ 수진이를 꼭 안아주기, 오직 이것만을 위해 J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분당으로 향했다. 딩동! 언니 집에 도착한 J는 벨을 눌..

성찰과 피드백

[짧은 소설]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불성실하게 준비한 학생과 열심히 노력한 학생의 점수 차가 크지 않았다. 선생은 ‘불성실’에게는 훈계를, ‘노력’에는 칭찬을 전해야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험 문제의 변별도가 떨어진데다가 불성실한 학생과 노력한 학생들로 구분되기보다는 한 학생에게 불성실과 노력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한 명 한 명에게 칭찬과 훈계를 모두 주었다. 스스로를 성찰하여 노력했던 대목은 기뻐하고 부족했던 점은 반성하기를 바랐다. “성찰할 때 성실한 대목마저 싸잡아 자격지심의 재료로 삼지 마세요.” 선생의 의도와는 달리, 학생들은 타고난 기질대로 칭찬과 훈계 둘 중 하나만 받아들었다. 시험 준비에 불성실했던 학생, 자격지심을 주된 정서로 느끼는 학생, 어렸을 때부터 잘했다..

기만

[짧은 소설] 목요일 밤, 시민대학에서는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강연자인 김 교수는 섬세하고 유능했다. 청중의 반응을 포착할 줄도 알고, 포착한 반응에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도 체험으로 터득한 베테랑 교육자였다. 연구에도 성실하여 모두가 강연 내용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했다. 12명의 청중들은 하나같이 열렬히 경청했다. 은영은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강연의 흐름에 동참한 청중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교수는 흥을 얻었다. 청중의 적극적 참여가 선생의 열정을 이끌어냈다. 김 교수는 기분 좋게 흥분했다. 은영을 위시한 청중들이 열렬히 배우려는 이들이라 판단했다. 평소에는 청중의 수용력이 어떠한지를 가늠하는 센서를 켜 두고 강연했지만 이 날은 센서마저 필요 없었다. 편안하게 열강을 토해냈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