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짧은소설 긴여운 27

합작품

[짧은 소설] K는 두 권의 좋은 책을 쓴 전문가다. 전문가들의 호평한 책인데도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종종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K에게 연락했다. 자문을 구할 때도 있었고, 책이나 토론 프로그램 출연을 부탁할 때도 있었다. K는 거절했다. 도움 될 말을 할 자신이 없었고, 그런 발언을 할 만큼 세상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방송작가는 K 다음으로 중요한 전문가를 찾았지만 비슷한 이유로 거절당했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지성보다는 센스 있게 말을 잘하는 인사가 방송에 더 적합하지만, 작가와 PD는 자기 프로그램만큼은 말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높은 지성을 소유한 이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그들의 의도는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대중서로 이름을 알린 저자 J를 초대했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월화수목금금금

[짧은 소설] “자기야, 지수 잘 보고 있어야 돼. 그리고 세탁기에 빨래 꺼내서 좀 널어줘. 부탁해. 나 병원 갔다가 슈퍼 들렀다 올게.” 아이 엄마가 집을 나서며 말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려 병원에 다녔는데 거의 다 나아서 마지막 약을 받으러 나간 참이었다. 아내는 ‘부탁’이라고 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말투였다. 그런 뉘앙스가 아니더라도 남편은 요즘 집안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었다. 아내는 몇 달 전부터 신경이 부쩍 날카로워졌다. 세살 짜리 아이를 둔 친구는 아기가 10개월쯤 되면 한창 힘들 때라고 했다. 그 말은 때때로 위로가 되었지만, 짜증이 날 땐 내뱉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하는 재갈이 되기도 했다. 지난 주말이 그랬다. 평일에는 퇴근 후 몇 시간을 잘 견디면 되지만, 주말이면 하루 종일 ..

월화수일금토일

[짧은 소설] 두블루 대통령은 격무에 시달렸다. 월요일마다 어제의 휴식이 그리웠다. 어느 날 UN 회원국이 모인 자리에서 의견을 상정했다. “일주일마다 일요일을 하나 더 만듭시다. 월화수일금토일로 살아가는 새로운 달력을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각국 정상들의 머릿속은 잠시 멈췄는데, 제안이 어리석을 만큼 엉뚱해서인지, 멍해질 만큼 반가워서인지 헷갈렸다. “뜬금없을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여섯 날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라는 성경 말씀도 모르십니까?”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삼은 나라의 대통령들이 한 마음으로 반박했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관습과 전통이 있다는 점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쉬면 언제 일을 합니까? 세계 경제가 멈추고..

경비

[짧은 소설] 나는 분리수거 의식이 투철하다. 작은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고, 재활용이 가능한지 헷갈리면 끝까지 검색을 한다. 음식을 담았던 1회용 용기는 세척해서 버리고, 박스에 붙은 스카치테이프도 별도로 분리한다. 사실 종이, 페트병, 유리, 고철류 등을 분류하는 일은 입주민 몫이지만, 분류를 충실히 따르는가의 여부는 입주민마다 다르다.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쓰레기들이 가득한 박스를 분류하지 않은 채로 던져만 놓는 사람도 있고,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부피가 큰 패트병을 공기도 빼지 않은 채 쌓아두고 간다. 어느 날 팻말 하나가 붙었다. “직접 분리수거 하고 가세요.” 우리 아파트 재활용쓰레기 처리장은 지하 4층에 있다. 어느 날, 나는 책이 배달되었던 택..

변신

[짧은 소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나는 한 마리의 개가 되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머리맡에 있던 안경을 집으려는데 내 손이 안경을 잡지 못하고 툭툭 건드려 안경을 미끄러뜨릴 뿐이었다. 왜 이러지? 잠이 덜 깼나, 싶었는데 평소와 달랐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사위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냄새일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냄새였음을 눈치 채자, 이상했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다. 시큼한 반찬 냄새도 느껴졌다. 주방으로부터 전해지는 냄새의 성분 하나하나를 맡으며, 무슨 음식인지도 구분해냈다. 이때부터 나의 개 됨을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 발로 일어섰다. 내 방인데도 시야가 낮..

우정

[짧은 소설] 여고생 진이, 경숙, 주희는 단짝이었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점심시간을 항상 함께 했다. 화장실도 같이 다녔고, 시험 때면 같이 밤을 새며 공부했다. 주말에도 만나 만화책을 보거나 가끔씩은 사소한 쇼핑도 함께 다녔다. 어느 날, 진이가 윤리 선생님의 말을 전했다. “어제 윤리가 그러더라. 고등학교 친구들이 평생 변함없는 우정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다고.” “야, 그건 대부분이 그렇다는 거고, 우리는 아니지.” “당연하지. 대학 가도, 결혼을 해도 우리는 변치 않을 거야.” 셋은 우정반지를 맞췄다. 반지를 깜빡한 날에는 두 사람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경숙과 주희는 서울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진이는 경기도로 대학을 다녔다. 새로운 문화와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자주..

하늘

[짧은 소설] 김씨는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평생을 열렬히 살았다. 이십 대부터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 날마다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최근에는 새롭게 착수한 프로젝트에 열정을 느꼈다. 겉보기엔 괜찮은 삶이었지만 내면의 힘겨움도 컸다. 일련의 불행이 그를 덮쳤던 것이다. 처음으로 승진에서 누락됐고, 단짝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로젝트를 둘러싼 부하 직원과도 갈등도 생겼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삶의 무상함이 몇 달간 지속되었다. 김씨는 강인했지만, 삶의 고뇌는 김씨보다 막강했다. 삶의 힘겨움과 무상함이 교대로 김씨를 찾아왔다. 격랑의 벌판에서도 그는 정신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일을 지켜 나갔다. 때때로 놀라운 집중력으로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시련은 더욱 모질어졌다.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머니마저 세..

천재

[짧은 소설] 성인 연주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놀라운 실력을 소유한 꼬마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아이는 국제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모두들 아이의 재능에 감탄했지만, 경이로운 실력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법이 없었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의 나이지만 두 돌이 지난 이후부터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니 십년 동안 많은 시간을 연습했다. 실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는데, '일만 시간의 법칙'의 2배는 족히 달성했다. 아이에겐 생계를 꾸려야 할 일도 없었고, 매일 끝없이 쏟아지는 집안일도 없었기에, 아이의 1년 몰입은 성인에 비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는 연습이 실력을 만든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지만, 뛰어난 실력을 본 어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얘는 천재네." 그 말이 떨어지..

에듀케이션

[짧은 소설] 아이는 엄마와의 약속을 기억했다. “아들, 두 시간만 놀다가 학원 시간 맞춰서 가야 해.” 명령조였지만 따뜻함과 친절함이 가득 담긴 말에서 아이는 엄마의 애정을 느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엄마를 좋아했다. 친구 집에서는 게임을 하나 한 후 만화 영화를 봤다. 재밌는 만화에 친구들과 빠져들었지만, 아이는 10분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만화를 다 보고 일어서면 학원 시간에 늦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을 좀 더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아이는 친구를 졸라 1.2배속으로 만화를 끝까지 시청했다. 아이의 예상대로, 뛰어가면 학원에 늦지 않을 시각이었다. 아이는 내달렸다. 기분이 좋았고 얼굴에 맞는 바람이 시원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아들, 왜 이렇게 숨이..

호기심

[짧은 소설] 나는 스스로 배웠다.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배움이 한결 깊어졌을 테고, 부모님이 다양한 체험으로 이끌어 주셨더라면 정신의 지경이 더욱 넓혀졌을 테지만, 내게 그러한 행운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엔 태권도나 컴퓨터 학원조차 다니지 못했고, 중고등학생일 때에도 과외는 내게 딴 세계 이야기였다. 좋은 환경이 아니어도 학습은 이뤄졌다. 때로는 무지가 도움이 되는 법!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행불행의 감정을 느낄 뿐,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었을 무렵, 나는 기본적인 지성을 갖추었다. 호기심 덕분이었다. 내면의 호기심이 나를 가르쳤고 지력을 키웠다. 어린 시절 눈에 비친 세상은 모르는 것, 궁금한 것들이 가득했다. 궁금한 것들에 대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