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짧은소설 긴여운 27

상업과비평사

[짧은 소설] 우신경은 국내 굴지의 문학상은 물론 해외 문학상까지 수상한 일급의 소설가다. 그녀의 대표작 『문학을 부탁해』는 15개 언어로 번역됐고 국내에서는 문단을 대표하는 출판사 ‘상업과비평사’에서 출간됐다. 찬란한 인생에 변고가 생겼다. 우신경의 소설에 표절이 의심되는 대목을 조목조목 밝힌 T의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표절 시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문예지가 아닌 온라인 매체를 통해 발표된 글이라는 점과 대상이 문단의 대표 주자라는 점 탓인지 논란은 삽시간에 번졌다. 우신경은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문제되는 작품을 모른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 표절을 전면 부인했다. 상업과비평사도 우신경을 옹호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일상적 소재이고..

연못

[짧은 소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상수는 과장스럽고 성급하게 반응한다. 모든 이에게, 재빨리, 화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지닌 듯이. 어떤 이가 “미처 일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달에 바빴습니다.”라고 말하면, 상수는 그의 바빴다는 말이 끝맺기도 전에 “바쁘셨으니까”라고 메아리처럼 화답한다. 어느 날, 상수는 고객과 부동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보아도 60대 중반으로 볼만한 노인이었다. 대화 도중 노인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끊은 노인이 “아까 말한 그 친구예요”라고 말하자, 상수는 노인의 말을 쫓았다. “아! 양평에 계신 분이요?” “아니 화곡동 친구.” “아! 골프장에 같이 가셨다는.” “그래요.” 상수의 퀴즈 맞추기식 대화가 아니었다면 불필요한 대화들이었다. “..

사랑의 사생아

[짧은 소설] 경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인교습을 하는 첼리스트다. 아이들의 재능을 발견하여 맞춤 교육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인내심으로 지켜볼 줄도 알았다. 그래서인지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이웃집 엄마들보다 현명했다. 앞집 엄마는 딸을 학원에 보냈다. 행여 자신이 다른 엄마들보다 뒤처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옆집 엄마도 딸을 학원에 보냈다. 엄마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고 믿었고, 학원을 보내는 일은 그 중 하나였다. 경숙 역시 딸을 학원에 보냈다. 딸이 원했기 때문이다. 경숙의 딸 지영은 학원 수업을 즐거워했고 곧잘 배웠다. 엄마의 직감으로 딸의 열심을 느끼고 있던 경숙에게 학원 선생님이 지영의 남다른 재능을 전하자, 경숙은 욕심이 생겼다. 딸의 필요로 시작된 학원 수업..

메르스

[짧은 소설] 메르스 감염자가 25명으로 늘었다. SNS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예방 대책이 나돌았다. “코에 바세린을 바르면 괜찮아.” “사람들 많은 곳에 가지 마. 마스크 꼭 쓰고.” “손을 열심히 씻어야 합니다.” 세화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남자 친구 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야, 메르스가 호흡기 질환이라 바이러스가 코 속으로 들어와 감염될 수 있는데 바세린을 발라놓으면 이 녀석이 메르스 바이러스를 몸 속으로 안들어가게 딱 잡아 준대. 지용성이라. ^^ 나는 바르고 나왔어.” 곧장 답변이 왔다. “우리나라 감염자가 지금까지 20명(?)이라는데, 5천만이 넘는 우리나라 인구에 비하면 극히 소수야. 차라리 나는 오늘 밤 움직일 때 교통사고를 걱정할래.” 영수의 머릿속에는 어제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

계승

[짧은 소설] 세탁소에 여인이 들어왔다. 하얀색 이불을 테이블에 무성의하게 올려두면서 세탁소 주인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금방 하나 더 가져올게요.” 잠시 후 여인은 커다란 검은색 천을 한 손에 들고 돌아왔다. 세탁소 주인이 받더니 “천이네요?” 라고 물었다. “네, 여기 어디 한쪽에 브랜드가 있는데” 하면서 여인은 족히 5m가 넘는 천을 이리저리 펼쳤다. 곧 “Westcock"라고 크게 쓰인 문구가 드러났다. “(브랜드를 가리키며) 페인트로 찍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거 손상 될까요? 그러면 안 되는데.” 주인은 브랜드를 손으로 만지더니, 문제 될 것 같다며 “집에서 솔로 지저분한 부분만 살살 문지르는 게 낫겠는데요”라고 말했다. “싫어요, 회사 거란 말예요.” 그렇잖아도 부드러운 주인의 말투인데 ..

내면일기

[짧은 소설] 그녀는 자주 자신의 내면을 성찰했다. 마음을 살피어 반성했고 신경 쓰이는 일들은 며칠에 걸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아 발견한 것들을 날마다 기록했다. 내면일기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그 기록물들은 꼼꼼하고 상세했다. 찬찬히 살피면 그녀 기분의 부침이 그래프로 드러날 정도였다. 기록은 사실이나 논리를 체계적으로 따르기보다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같은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작성되었다. 때로는 자신의 실망스러운 행동에 짜증을 냈고, 왜 그리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음의 심연 속을 헤매고 다녔다. 때로는 반복되는 패턴에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말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나에 대한 다른 이들의 오해는 불가피한 인생의 일면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평가가 조금이라도..

어느 날 문득 꽃이 피었다

[짧은 소설] 오래 전, 집 앞 꽃집에 갔다. 작은 꽃이 든 화분을 하나 사 왔다. 나는 꽃 이름을 잊었고, 화분이 놓인 곳은 어지러웠다. 가지각색의 화분이 나란히 놓인 것도 아니고, 화분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지도 못했다. 책과 종이 자료가 쌓인 데다 필기구와 메모지가 흩어져 있는 책상 위에, 화분을 놓아둔 것이다. 일상에 작은 생기를 더하기 위함일 뿐, 꽃이 자라날 만한 환경이나 책상 정돈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무심했다. 어머니께서 보시고서 “이렇게 책상이 지저분한데 화분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긴 하니?”라고 물으셨다. 핀잔이 아닌 호기심이었다. 22년 동안 키웠다는 이유로, 아들을 다 안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어머니의 훌륭함이다. 변화를 궁금해 하시고 작은 노력에도 기대를 가지신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