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 9

현실인식의 비결 하나

지하철에서 우연히 S를 만났다. 삼십대 초반의 그녀와 나는, 자기이해 수업의 선생과 학생지간이다. 3개월 전,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올해를 잘 살기 위한 약속 하나를 했다. (실은 두 개지만, 하나만 공개하련다.) 거창한 약속은 아니었지만, 연쇄적으로 긍정적 반응을 불러올, 또한 전반적으로 삶의 변화를 이뤄내야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당시 그녀는 지각을 자주 하는 편이라며 일찍 출근하기를 원했다.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기! 이것이 우리의 약속이었다. "약속은 잘 지키고 있니?"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나는 맞은편에 앉은 승객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S에게 물었다. "몇 번 해 보니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S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서 8시 30분으로 목표를 조정했어요." S는 ..

균형과 깊이를 갖춘 비평가

저는 요네하라 마리의 를 읽고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마리의 매력”에 빠졌다며 호들갑 떠는 서평을 썼습니다. 그것은 서평이 아닌 감상문이었습니다. 해석은 하지 못한 채로 마리에게서 느낀 친밀감과 감상만을 잔뜩 늘어놓았으니까요. 사실은 찬미였습니다. 에세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미에 대한 감탄! 인물을 그려내는 표현력과 서사를 꾸려가는 감각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감탄하고 찬미하느라 해석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탄탄한 서사에 몰입하느라 생각하고 음미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긴 에세이인데, 라면 면발처럼 후루룩 마셔버린 느낌입니다. 어쩌면 나는, 서평은 가급적 (혹은 반드시) 해석을 포함해야 한다고 믿어왔기에 글을 쓰는 게 힘겨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64년, 수잔 손..

내 삶에 흥이 필요할 때

허균의 제2권을 읽었습니다. 노장의 학문을 좋아하여 예법을 무시하고, 속세를 피해 죽림에 모여 제멋대로 살았다 해서 ‘죽림칠현’이라 불렸던 이들의 고사(古事)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의 첫머리에 다짜고짜 등장합니다. 이야기의 전문을 옮겨 봅니다. 혜강, 완적, 산도, 유영이 죽림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왕융이 늦게 왔다. 완적이 이죽거리며 말하였다. “속물이 또 와서 흥이 깨졌다.” 그러자 왕융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흥이 깨질 때가 있는가?” 이야기는 끝입니다. 이게 뭐야? 나의 첫 반응입니다.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책 내용은 계속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고사도 짤막한데, 나를 황당하게 만들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혜강은 성품이 대장장이 일에 잘 맞았다. 집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매..

가볍게 만나는 퇴계 선생

퇴계 선생의 시 한 수를 읊어 드립니다. 선생은 1548년 48세 때 충북 단양의 군수로 부임했는데, 백성들을 섬기면서도 자주 시를 지었습니다. 지금의 단양군 장회리 아랫마을에 있는 여울을 바라보며 지은 시랍니다. 힘을 써야 겨우 조금 앞으로 가고 손 놓으면 대번에 떠내려가지. 자네 만약 뜻이 있거든 잘 봐 두게 여울물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편역자의 해설처럼 “마음을 닦는 데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로 읽히기도 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면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괴로운 과정도 끝내 이겨내야 한다는 엄중한 조언으로 들리기도 하네요. 저의 해석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겁니다. 제자 이함형에게 보낸 편지에 아래와 같은 글도 있으니까요. “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했으면서 대번에 눈에 ..

자기실현의 3단계

자기경영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관리하여 삶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활동’이다. 중요한 단어는 자원, 활동 그리고 목적이다.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가졌는지 알아가고(자기이해), 생각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활동하며(자기경영), 자기 삶의 목적을 실현함으로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것(자기실현)이 자기실현의 3단계다. 자기이해 → 자기경영 → 자기실현 자기경영의 정의와 자기실현의 3단계에서, 세 가지 명제를 기억하자. 1) 효과적으로 경영하려면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잘 알아야 한다, 2) 자기경영은 목적지향적어야 한다, 3) 자기경영은 오늘을 바꾸어가는 구체적인 활동이다. 자기경영 이전에 자기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자기경영 활동은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하나씩 ..

자기 발견을 위한 꿀팁

1. 자기이해는 세상에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함으로 진척된다. 살다가 종종 '내가 이것을 좋아했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단어, 개념, 사람(의 일면), 분야, 장소, 활동을 만난다. 그때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자기를 발견한다. 비유컨대, 자기발견은 세상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이다. 지렁이 대신 '감정'과 '인식'을 미끼로 꽂아 자기 이해라는 퍼즐을 완성할 조각 하나 건져올리기. 이것이 자기 발견의 과정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자기를 발견하고 싶다면 다양한 만남(책, 사람, 장소, 활동)으로 자기를 보내어 그때 얻은 감정적 반응과 새로운 인식을 챙겨 두어야 한다. 미끼를 기억하자. 하나는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이다. 호불호의 감정 속에 자기가 있고, 인식한 것들에도 자기가 있다. 감정은 진솔하다. ..

벤야민 공부와 우정의 추억

눈을 뜨자마자 벤야민이 떠올랐다. 누운 채로 잠시 벤야민을 생각했다. 벤야민의 삶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고, '아침부터 왜 벤야민일까'를 묻는 성찰이기도 했다. 잇달아 떠오른 이는 숄렘이다. 게르숌 숄램, 그는 『한 우정의 역사 :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의 저자로 벤야민의 절친한 친구였다. 두 학자 모두 유대인이었고 지적 정신적으로 깊은 유대를 나눴다. 생각의 연쇄는 내 친구 P에게로 가서 멈췄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제 외출하고 나갔던 가방 속 내용을 꺼내 정리하고 책상에 앉았다. 아침 첫 생각은 무의식이 내게 보내는 인생살이의 작은 표지가 아닐까. 눈을 뜬 직후에 의식과 무의식이 찰나의 순간만이라도 교차한다면, 아침 단상은 의식이 달아나려는 무의식을 붙잡은 셈이다. 표지라면, ..

이대로 끝이라면 아쉽지

또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말았다. 읽지도 못할 책을 사들이고, 중요한 일들을 내일로 미루고, '언젠가 해야지'라는 생각을 남발하고 있다. 며칠 동안 그랬다. 내 고질병이다. 번개같이 찾아든 후회를 붙잡았다. 목욕재계하고서 '골목길의 오아시스 낙랑파라'에 왔다. 멋진 카페가 넘쳐나는 동네에 산다는 것은 일상의 축복이다. 때로는 환경이 축복을 선사하지만, 진하고 지속적인 축복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법. 나는 이곳에서 삶의 비평 시간을 갖기로 했다. 비평노트를 펼쳤다. 3월에 최대한 집중할 일들의 목록을 적었다. 한 페이지를 채우고 나니, 다음과 같은 말들이 파편처럼 노트에 쓰였다. - 매일 2시간은 쓸 것. 거르지 말고 무리도 말고. - 삶은 구본형처럼 쓰고 여행하고. 거기에 치열한 공부를 더할 것...

모든 순간은 연결되어 있다

1. 어제는 여유를 만끽했다. 2월을 바쁘게 보냈고 3월에도 강연이 많으니 커피 한잔의 여유가 절실할 때 찾아온 행복한 하루였다. 아침에 마음편지를 보내고 나서는 느긋하게 독서했다. 스퀴즈빌리지 홍대점에서 착즙주스를 사와 간식으로 먹으면서 독서와 업무를 즐겼다. 오후에는 낮잠을 잤던가. 기억이 가물하다. 아마도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낮잠 타이밍을 놓쳤던 것 같다. 저녁에는 홀로 티박스라는 카페에서 보이차를 즐기며 책을 읽었다. 2. 모처럼만의 독서는 맛난 음식처럼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교양과 무질서』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제법 읽었다. 매슈 아널드의 비평관이 정교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내 나름으로 보완하여 글로 적기도 했다. 이택광 선생이 말하는 문화비평은 문화 속에 숨은 정치적 구조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