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 10

저물어가는 햇살은

저물어가는 햇살은 반년 만에 친구를 만나니 6개월 전 내 모습이 보였다 반년 동안 이룰 것을 다짐하던 지금보다 조금은 젊었던 나 미루고 또 미루는 고질병에 세월이 끝없으리라는 착각까지 뜨거움도 결실도 없는 삶으로 친구 앞에 뻔지르하게 섰다 세월은 구름처럼 흘렀건만 웅덩이에 고여 있었던 나 다짐은 바람처럼 사라졌고 4월 햇살이 밝아 민망했다 그 누굴, 그 무엇을 탓하리 처음엔 친구에게만 부끄럽더니 이내 만물을 쳐다보기 힘들더라 저물어가는 햇살이, 빛났다 *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기뻤다. 우리는 밝은 햇살처럼 웃었고, 맛난 식사만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번 만남 때까지 해내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부끄러웠지만 자괴감에 빠지지 않았다. 눈 앞에 선 친구와 생각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수양을 추구하는 사람들

1. 주말에 안동 옥연정사에 다녀왔다. 서애 선생은 임진왜란의 기록을 담은 제132호 국보『징비록』을 '옥연정사'에서 썼다. 정사 출입문 앞에 서면 낙동강과 하회마을이 보인다. 부용대와 함께 하회마을 전경을 즐기기에 맞춤한 장소다. 정사에 들어서기 전 낙동강을 내다보니, 잠시 휴식하면서 강 너머 고향 마을을 바라보는 서애 선생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아름다운 고향과 전란의 비참함이 대비되면서, 『징비록』 집필에 박차를 가하셨으리라. '다시는 이런 전란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야.' ('징비'는『시경』 소비편 "나는 지난 날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基懲而毖後患)"에서 따온 구절이다.) 2. 퇴계 선생은 61세가 되어서야 도산서당을 완공했다.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감상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퇴계 뿐..

법칙 만능주의 벗어나기

믿고 따를 만한 법칙이 생겼다면 반가운 일이나, 법칙을 따르는 동안에도 높은 자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법칙 하나를 준수하고 있다고 해서 인생이 잘 풀릴 거라고 자신을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법칙은 인생의 만능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어있음은 잠을 못 자서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신경증이다. 무신경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민하게 반응하는 상태가 깨어있음이다. 이것은 고양된 의식이다. 그러니 법칙 준수와 함께 필요한 것은 인생길을 꾸준히 헤쳐나갈 힘을 연마하는 일이다. 관찰력과 애정력부터 키워야 한다. 법칙은 고체와 같다. 뻣뻣하여 난관을 돌파하긴 하지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는 못한다. 힘은 물과 같다. 상황에 적합한 반응으로 인생의 복잡한 ..

성공 법칙을 찾는 이에게

여기 행복과 의미 있는 성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법칙을 찾으려고 애썼다. 삶을 행복하게 만들 법칙을! 따를 법칙만 찾아내면 힘써 실천할, 열정적인 사람이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던 터라, 무엇이라도 빨리 실천하고 싶었다. 그는 책에서 법칙을 찾았고, 그것대로 살았다. 열심히 노력했고, 헌신의 결과로 인생의 한 영역을 바꾸었다. 해피엔딩인가? 아직은 모른다. 지속적으로 법칙이 주효한지 살펴보기 전에는. 법칙의 효과는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법칙이 삶의 어느 영역을 한 단계 발전시키셨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두 단계 퇴보시켰다. 직업적 일에서는 성취를 이뤘지만,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 법칙을 맹신하면, 행복과 성패를 좌우하는 다른 요인들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인생은 불..

카프카다운 이야기 두 편

20세기를 빛낸 작가 목록은 길 테지만, 20세기다운 작가라고 제한하면 목록은 짧아진다. 토마스 만이나 존 스타인벡처럼 리얼리즘이 빛나는 소설은 19세기에도 존재했으니까. 반면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며 쓴 소설이나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처럼 시대의 불안을 복합적인 알레고리로 포착한 시는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작품이었다. 카프카는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를 빛냈으면서도 20세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가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카프카가 1904년 문학 친구 오스카 폴라크(Oskar Pollak)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문학적 이상을 실현했다. 무턱대고 단정한 것은 ..

칸트의 식사 시간은 길다

“칸트는 오후 1시에 그가 초대한 손님을 맞았습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식당으로 안내되었는데 식당에서는 평균 4시까지, 손님이 많은 때는 6시까지도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뒤 약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합니다. 처음에는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다가 아무데고 앉아 사색을 하고 때로는 중요한 착상을 수첩에 적기도 했습니다. 산책은 항상 혼자 했습니다. 산책한 후 나머지 시간을 독서로 보냈는데 그 시간에 또 친구가 찾아오면 그 친구랑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칸트는 정확히 10시에 취침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칸트의 제자 제자 야하만의 전언인데, 칼같이 정확하게 생활했던 칸트에게도 지적 교류를 위해서는 융통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칸트는 3시간 동안이나 식사를 했다. 통상적으로 세 시간,..

봄날의 경리단길 투어

경리단길 투어의 핵심 키워드는 크래프트 비어와 장진우 거리 그리고 글로벌한 이국적 맛집이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근사한 카페 이나 (일명 조인성 카페)에서 즐기는 작은 호사다. 시래기 맛집 이나 스테이크 전문점 에서의 호젓한 식사를 끼워넣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경리단길은 핫한 지역이다. 연예인 부동산 고수 길용우 씨가 건물을 사들였다는 뉴스가 하나의 반증이 되겠다. 나에게 경리단길은 무엇보다 대한민국 로컬 문화의 중심지로 다가온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

1.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를 많이 하는 요즘이다. 천성이 치열하지 못해 매일의 공부량은 들쑥날쑥하다. 익힌 것도 있지만, 여전히 지성에 목마르다. 깊이 알고 싶고 제대로 알고 싶다. 본격적인 공부는 이제부터인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서양철학사의 얼개와 문예사조의 흐름을 잡은 공부였다. 지성사의 맥락을 잡은 것만으로도, 공부 갈피를 잡고 통합적 관점을 취했다는 점에서 유익했지만, 앞으로는 그 유익을 더욱 절절히 느낄 것 같다. 새롭게 배운 지식을 정돈하고 정리할 지식 아카이브를 만들어 둔 셈이니까. 지적 아카이브를 세우는 일은 3년 정도 걸렸다. 그리스 - 로마 - 영국 - 미국 - 이스라엘 다섯 나라를 중심으로 서양사의 거시적 흐름을 잡았고, 역사적 명장면과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얼개를 세웠다. 연표와 지..

어떤 텍스트를 읽어야 할까

20년 가까이 적지 않은 책을 읽어왔다. ‘앞으로 몇 권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인생의 유한함에서 기인한 자조적 질문이 아니다. 독서에 할애한 시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싶은 열망에서 온, 정열의 질문이다. 하지만 지혜롭지 않은 질문이다. 몇 권을 읽느냐보다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하고, 읽은 것들을 얼마만큼 살아내느냐가 성장의 관건일 테니까. 무엇을 읽을 것인가? 다시 말해, 한 개인의 조화로운 성장을 위해 어떤 텍스트를 읽어야 할까? 이 질문으로 한동안 고민했다. 세 가지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일차적 결론을 얻었다. 주체적 텍스트, 인문적 텍스트, 시대적 텍스트가 그것인데, 자기 삶의 발전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관심을 둔 이들이라면 세 가지 텍스트가 모두 중요하다. 주체적 텍스트는 세상 ..

2015년 성찰일지 (4)

1. 언제 삶의 비평이 잘 일어나는가. 사람마다 답변이 다를 이 질문을, 내게 불쑥 던진다. 2015년 4월 1일 포항 호미곶에서, 나는 대답한다. (구체적인 시간을 명시한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 답변이 바뀌는지, 훗날에 확인해고 보고 싶어서다. 정확하게 나의 변화와 성장을 관찰하고 싶다는 뜻인데, 이를 위해서는 진솔하고 구체적으로 살피고 기록해야 한다. 삶의 비평이란, 정말 중요한 자기경영의 핵심개념으로, 삶의 어떤 대목이 마음에 들고, 어떤 대목이 불만족스러운지를 찬찬히 성찰하는 행위를 뜻한다.) 영화 관람, 특히 드라마 장르. 거의 모든 책을 읽는 순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할 때.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긴 날. 시도하지 못했거나 실패를 자초했을 때. 가장 진하게 삶의 비평이 일어나는 때다. (누군가의..

카테고리 없음 2015.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