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 5

오래 전에 죽은 자

그는 죽은 자였다. 언젠가 죽을 줄로만 알았지, 이미 죽은 상태였음은 전혀 몰랐다. 세상은 곧잘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다. 그 역시 자신의 인식과는 달리 오랫동안 죽은 채로 살았다. 누군가에겐 헛소리로 들릴 테지만, 내겐 '그의 이른 죽음'이 자명한 사실로 들린다. 어느 소설 속의 문장이 진정 진실로 들리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숨을 쉬고 거리를 걸어 돌아다닐지언정 신의 눈에는 죽은 자입니다.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강합니다. 결정의 힘은 강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약해지는지를 엄포하는 선언이다. 그의 삶이 왜 그리 시시한지 역설하며, 정신은 또 왜 그리 비실한지 보여주는 문장이다. 그이의 시시함과 비실함에 대한 발언이 과격한데, 그나마 정제한 표현이고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

Vita Nova/단상 2026.04.20

어쩐지 뿌듯한 귀갓길

궁궐 답사를 다녀왔다. "계절은 봄인데, 가을 하늘 같아요." 일행 중 한 분이 말했다. 그야말로 화창한 날씨였다. 공기는 맑았고 하늘은 푸르렀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북악산도 희미한데, 오늘은 북한산 비봉 능선이 선연히 보였다. 설명을 위해 사진을 찍어 확대했더니 비봉 위의 진흥왕 순수비가 식별될 정도였다. 하늘의 축복 아래 따뜻한 봄볕과 함께 답사가 시작됐다. 육조대로, 광화문, 경복궁을 걸으면서 '세종의 문화 혁명'에 집중하고자 기획한 답사였다. 종업원이 7천 명쯤 되는 회사의 임원단이 참여했고, 나는 설렘 반 부담 반을 느끼면서 답사를 준비했다. 준비라고 하니 거창한 느낌이 든다. 실상은 1) 늘 진행하던 콘텐츠 중에서 강조하고 싶은 주제를 선정하여 관련 내용을 선별하고, 2..

Vita Nova/일지 2026.04.16

씻고 달리고 쓰는 하루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과를 시작하기 전, 세안을 위해 손에 물을 받으며 생각했다. '눈앞의 오늘을 잘 살아보자!' 얼굴을 씻을 때마다 자주 『소학 小學 』이 떠오른다. 조선의 학동들이 유학에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공부한다는 주자학의 기초 교재 말이다. 칠팔년 전 『소학』을 정성스레 읽었다. 당시 얻은 숱한 배움 중에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부터 쓸고 세안을 하고서 책상에 앉으라는 가르침을 참 좋아했다. 요즘엔 그리 못하지만, 아침마다 마당 쓸기와 세안하기를 오랫동안 실천했었다. 칠팔 년 전의 세월이 그립기도 하고, 몇몇 구절을 복기하고 싶기도 해서 책장에서 『소학』을 찾아서 펼쳤다. 찾으려던 구절은 '이른 아침에 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 하에 달린 글이었다. "안팎의 사람들은 첫닭이 울면 모두 세수하고..

Vita Nova/단상 2026.04.14

벚꽃과 갈매기와 언어적 환대

1.오후 4시의 햇살은 따뜻했다. 와우들과 함께한 1박 2일 MT를 마치고 일행들과 헤어진 직후였다.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져 화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흐린 날씨도 어느새 개어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귀여운 에피소드들로 출발선에 함께 서진 못했지만, 우린 같은 시간을 달렸다. 꽃은 거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새벽 3시까지 우리 숙소에서도 대화의 꽃이 피었다. 작은 소란들로 삶이 분주했던 와우도 먼 걸음을 달려와 함께해 주어 더욱 뜻깊었다. 표현을 하진 못했지만, 한분 한분께 참 고마웠다. 2.이번 MT의 핵심은 마라톤이었고, 귀가하는 길에 택한 원픽 여정은 무의도 해상관광탐방로였다. 느긋하게 거닐다가 갈매기를 말없이 관조했다. 활짝 펼친 두 날개로 활공하는 모습을 시샘하듯 바라보았다. 양파링을 던져주는..

Vita Nova/일지 2026.04.12

죽기 살기로 비타 노바

1. 고단한 삶이 3년 6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낱 꿈이길 바랐던 그 일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한 노력도 허사였다. 되돌릴 방도가 없었다. 하릴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야심차게 기획하여 추진하던 일이 순항하다가 뜻밖의 암초를 만나 좌초되고 말았다. 마음의 타격만 입었던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일로 내겐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 원의 빚이 생겼다. 그때는 몰랐다. 자산 1억과 부채 1억이 어떻게 다른지, 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1억이 얼마나 큰 돈인지, 단기간에 갚아야 하는 큰 빚이 얼마나 삶을 옥죄는지 정말 몰랐다. 무지의 대가는 혹독했다. 삶이 달라졌다. 한 끼 외식이나 카페에서의 커피조차 사치였다. 3년 6개월 동안 혼자 카페에서 커피..

Vita Nova/일지 202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