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면회에 관하여

카잔 2014. 7. 4. 23:47

 

몇 번이나 아산병원을 다녀왔을까? 얼추 계산해도 60~70회다. 한번 면회에 길게는 대여섯 시간 이상 있기도 했으니, 참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낸 셈이다. 배우고 느낀 게 많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며 사는 이들에겐 체험하는 시간 자체가 선생이니까.

 

#. 면회 목적도 다양하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환자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위로파)과 체면 때문에 발걸음 하는 사람들(체면파). 위로파들은 다시 안절부절형와 실속형으로 나눠진다. 안절부절형은 무언가 돕고 싶은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느껴진다. 실속형은 도움을 주기 위해 미리 조사하고 준비하여 환자나 보호자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 체면파, 다시 말해 체면을 위해 병원을 찾는 이들의 특징은 삶과 면회의 단절이다. 면회 시간에만 잠시 환자를 위할 뿐, 삶에서는 환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면회에 내어준 마음과 시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병원을 나서며 핸드폰에 접속해 네이버 기사를 검색하면서도 병실에서는 무척이나 환자를 위하는 것처럼 표정을 가장한 적이 있다면, 한번쯤은 고민해 볼 일이다. ‘나는 문안했던 환자를 진정으로 위했는가?’

 

#. 면회 전후의 마음가짐을 말한 것이지, 면회와 일상의 연결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 일과 삶이 있고, 돌아보아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그러니 아프다는 이유로 다른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서도 굳이 체면파의 유형을 언급한 것은, 환자를 위해 진정어린 기도 한 번 하지 않으면서도 병실에서 슬픈 표정을 지어내는 이들의 가식이 싫어서다. 가식 중 일부는 삶에서까진 아니더라도 잠시 병실에서만이라도 위로하려는 체면파들의 노력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 모든 면회자를 위로파과 체면파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에 위로의 마음과 체면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마음을 키워 가느냐가 중요하다.

 

#. 승자는 링 밖에서 만들어진다.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말이던가. 그를 흉내 내자면, 좋은 면회는 병실 밖에서 만들어진다. 면회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면회 초창기, 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에 책을 읽었다. 친구가 덜 아플 땐, 괜찮았다. 친구와 대화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많이 아파하면서부터는 준비 없이 가서는 안 되었다. 친구가 앓고 있는 병을 알수록 그의 현재 고민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 6월이 되어 매일같이 면회를 가면서부터는 ‘면회 준비’가 정말 필요해졌다. 시간을 내어 면회를 가는 진정한 마음만으로도 환자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겠지만, 다른 모든 일처럼 면회도 제대로 준비할수록 좋은 결실을 맺는다. (아무래도 나는 최상주의자인가 보다. 보통 수준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를 자주 생각한다.)

 

#. 면회 준비가 절실해진 때는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통보받은 이후다. 그때부터 친구는 의식을 잃는 일이 많아졌다. 대여섯 시간을 머물러도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극히 적어졌다. 죽음이 멀지 않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환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도 알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친구를 보자마자 충격에 빠져 멍해졌다. 면회 준비가 필요한 이유들이다.

 

#. 내게 면회 준비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두고 생각하거나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 면회인은 간병인이 아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지금의 상태에서 환자나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환자 가족은 어떤 마음 상태인가? 내가 알고 있으면 좋을 지식과 정보는 무엇인가?> 나는 주로 첫째 질문을 두고 많이 생각했다. 덕분에 6월에는 친구와 의미 있는 대화를 많이 나눴다.

 

#. 면회에도 감수성이 필요하다. 나를 위한 면회인지, 환자를 위한 면회인지 파악하는 게 관건인데... 이건 민감한 문제라 내 경우만 예로 든다. 지난해엔 존경하는 선생님과 사별했고 올해는 친구를 떠나보내게 생겼다. 두 경우 모두, 병세가 위중할 때에는 가족들이 면회를 사양했다. 당연한 일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시간이 금 쪽보다 소중하다. 가족과 가장 소중한 지인과만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나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일찍 선생님의 병세를 알았는데도, 면회를 가지 못했다. 한번쯤은 용기 내어 면회를 가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 이상을 갔더라면 그건 선생님을 위한 면회라기보다는 나를 위한 면회였을 것이다.

 

#.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친구에겐 굉장히 자주 갔다. 어렸을 적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친구가 나를 찾기도 했으니, 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염려로부터 자유로웠다. 가족들도 나를 아셨다. 가족들이 모두 대구에 살고 있어서 서울 아산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가족들이 자주 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내게 약간의 부담이기도 했지만, 마음만 낸다면 병원으로 가는 일이 자유로웠다. 가족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하거나, 환자를 둘러싼 누군가에게 환심을 사거나, 체면을 차릴 이유도 없었다. 오직 친구를 위해 갔다.

 

#. 빈손으로 면회를 가도 괜찮다. (몇 번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는 빈손으로 갔다.) 환자와 나눌 말들을 신중히 생각하는 것도 면회 준비니까. 하지만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가면, 환자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마음도 한결 낫다. 손에 든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위로파와 체면파를 나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환자를 위해 준비한 거라면 위로파요, 자기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라며 손에 무언가를 드는 경우라면 체면파다. (돈은 종종 우리의 마음을 가리거나 부풀리는데 사용된다. 그렇다는 것일 뿐, 나쁘다는 게 아니다.) 주로 먹거리를 사게 되는데, 환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면 좋다. 환자가 먹지도 못하고, 가족도 잘 먹지 않는 음식이 쌓이면, 결국 버릴 수밖에 없다. 환자의 병세가 깊다면, 환자가 아닌 면회객에게 내어줄 음료 세트 등이 무난하다. 장기간 입원인 경우, 보호자 건강을 위한 견과류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도 좋다.

  

#. 면회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무언가를 사는 일에서도, 나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한판 전쟁을 벌였다. 환자를 생각하면 돈을 좀 더 써서 더 건강한 음식을 사야 하지만, 언제나 이기심이 방해를 했다. 이런 경우, 환자가 나랑 친한가 혹은 내게 돌아올 게 있느냐를 따지기보다 그저 이타심을 따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나의 철학이다. (내 철학일 뿐이니 누군가에게 권할 때에는 다른 기준들을 따져야 할 것이다.)

 

#. 면회도 엄연한 방문이다. 그러니 언제쯤 도착하는지 미리 가족에게라도 알리는 게 방문 예절이다. 불쑥 방문해도 반기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갑작스런 방문을 부담스러워한다. 병세가 위중한 경우라면, 몇 씨쯤 도착한다고 말했으면 그 시각을 지키는 게 좋다. 환자와 가족도 면회 준비를 해야 하고, 병원에도 돌아가는 스케줄이 있고, 환자의 컨디션 조절 주기도 있다. 면회자 입장에선 항상 병실에 있으니, 편하게 가면 된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환자와 가족의 입장은 다르다. 방문자에 민감하지 않은 가족도 있지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예를 갖춰 손님을 맞이하고 싶어하는 가족도 있다. 감수성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규정한 면회 시간도 지켜주는 게 좋다. 병원에서도 일상이라는 게 있으니까.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고, 만남은 공간에서 이뤄진다. 공간에 따라 갖춰야 할 예의가 있다. 예의는 법이 아니라 교감이다. 지키지 않아도 괜찮지만, 지키면 서로의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니 나의 글을 격식을 갖추라는 의도로 오해하지 말기를!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그곳의 분위기에 맞추듯, 병원에 가서 그곳의 호흡에 맞추자는 의도로 썼다. 면회를 둘러싼 약간의 지식과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교감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글의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