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수아 프레데리크 기. 프랑스 태생이지만 음악적 고향은 독일.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관심. "베토벤은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고 또 가장 많이 연주하는 작품이죠."(월간 객석. 2012년 10월호)


2.

그는 내게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꿈을 이뤄가는 낭만주의자다. 다음의 인터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출처는 월간 객석)




3.

꿈을 이뤄가는 낭만주의자의 면모가 보다 또렷하게 보이는 대목도 있다. "만약 한국에서 연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연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고 싶어요." 월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인터뷰는 2012년 9월 파리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5년 후 그는 자신의 바람을 이뤘다. 2017년부터 2020년에 걸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게 된 것!


2017년은 베토벤 서거 190주년이고, 2020은 그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다. 4년에 걸친 연주회인데, 두어 번은 찾아갈 생각이다. 금호아트홀 측은 4년간의 '대장정'이라 표현했지만, 조금 멋적다. 이 표현은 올해 9월 일주일 동안 베토번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는 백건우 선생에게 더 어울리는 듯.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7번. 다니엘 바렌보임 연주>


4.

6월 1일 금호아트홀에서 그의 두 번째 연주회를 감상했다. (5월 25일 첫번째 연주회는 일정상 가지 못했다.) 피아노 소나타 5번, 6번, 7번, 23번이 연주됐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악장에서 감동했다. 23번에서 잠시 지루했을 뿐이다. 아르투르 슈나벨의 연주를 CD로 들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감격적이었다. 두 연주자의 실력차라기보다는 '아우라'가 빚어내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벤야민이 말한 그 아우라 말이다.)


5.

그나저나 클래식 문외한의 이 감흥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1)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사람마다의 수준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 감흥의 깊이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저 예전의 무감각했던 클래식 감상에 비한 개인적 성장이리라. 2) 클래식이 주는 감동은 흥분보다는 고요에 가까운 희열이다. 다소 관조적이기도 하다. 개인의 기질 탓이겠지만, 나는 클래식을 들으면 사색에 빠져든다. 3) 결국 음악에 조예가 없는 나의 감동은 화성학적 감동이 아니다. 음악이 불러오는 영감과 정서적 고양에 따른 감동이다. 이처럼 관련 분야의 전문가 뿐 아니라 대다수의 인류에게 다가선다는 점이야말로 예술의 대가들이 지닌 저력이리라.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피아노 소나타 제5번 c단조, Op.10/1
Piano Sonata No.5 in c minor, Op.10/1
Allegro molto e con brio
Adagio molto
Finale. Prestissimo
 
피아노 소나타 제7번 D장조, Op.10/3
Piano Sonata No.7 in D Major, Op.10/3
Presto
Largo e mesto
Menuetto. Allegro
Rondo. Allegro
 
 
INTERMISSION
 
 
피아노 소나타 제6번 F장조, Op.10/2
Piano Sonata No.6 in F Major, Op.10/2
Allegro
Allegretto
Presto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f단조, ‘열정', Op.57
Piano Sonata No.23 in f minor, ‘Appassionata', Op.57
Allegro assai
Andante con moto
Allegro ma non tro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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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Song" : Nat Adderley [Work Song] (1960, Riverside)

코넷 연주자 냇 애덜리(Nathaniel Adderley, 1931~2000)의 "Work Song"은 도입부의 코넷 선율이 “이제 우리 함께 일하자”는 권면처럼 들리는 곡이다. 그냥 일하자가 아니다. 신바람 나게, 명랑하게, 춤을 추면서 일하자는 권면!

만약 곡의 제목이 “Play Song"이었다면 나는 이 곡을 덜 좋아했을 것이다. 놀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란 얼마나 쉬운가! 일하면서 흥얼거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이 곡이 좋다. 일과 재미의 변증법적 통합을 시도하는 것 같아서.

냇 애덜리는 하드 밥의 대표주자 캐논볼 애덜리의 동생이다. 형은 동생의 곡을 즐겨 연주했다. 나는 캐논볼 애덜리 퀸텟에 동생이 피처링한 연주곡을 좋아한다(아래 첫번째 영상). 코넷과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합작품이어서가 아니다. 좀 더 경쾌하고 흥겨워서다. (맨 아래 영상은 형제가 1963년에 협연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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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을 참느라 혼났다. 좁은 작업실을 서성였다가 책상에 앉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세나절 동안 모차르트를 듣다가 벌어진 일이다. 아침에 피아노 협주곡 21번으로 잔잔한 울림을 느꼈다가 오후에는 피아노 소나타 12번 2악장을 듣다가 아름다운 고요함에 전율했다. 사실 눈물이 찔끔 났다. ‘아! 모차르트의 감동이 이런 거구나.’


모차르트 평전을 쓴 필립 솔레르스는 “아주 젊은 모차르트의 작품에는 사람들은 만족시키는 모든 것들이 있다”고 썼는데, 이 과장스러운 표현에 동의하게 된 날이다. 모차르트 감상이 처음은 아니다. 여러 장의 모차르트 CD를 차에서 듣기도 했고, <돈 조반니>를 시청하다가 졸았던 경력도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로 눈물의 감동을 경험한 날은 없었다.


어느새 저녁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듣자고 선택한 곡은 바렌보임이 연주한 <피아노 소나타 8번>이다. 오늘 왜 이럴까?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어 또 책상에서 일어나야 했다. 달랠 방도도 없다. 글을 쓰기엔 내가 차분하지 않고, 감동을 전할 연인도 없으니. 녀석에게 전화할 수밖에 없는 날이다. “박상, 통화 돼? 나 대학생 때 잠깐 피아노 배웠던 거 기억하냐?”


“글세, 잠깐만…. 아, 그래. 손톱만큼 배우다 말았잖아. 학원에 꼬마 애들 밖에 없어서 쪽팔린다고.” 기억하는구나, 역시 박상이다. “다시 피아노를 배워볼까 싶어서 오늘 좀 알아봤거든. 위드피아노라고 있어. 성인들을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야. 지점이 많은데 홍대에도 있고, 분위기가 꼭 카페처럼 근사해.” 뜬금없는 말에 친구가 묻는다. “잠깐만! 그런데 갑자기 웬 피아노야?”


“모차르트의 위대함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 왜 그런 거 있잖아. 괴테나 니체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독서가들이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랄까.” 한때 헬라어도 배우고 싶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독일어도, 헬라어도 한 마디도 못하는 걸 알면 피아노 교습을 말릴지도 모르니까. 자자, 진정하자! 나는 지금 흥분했다. 한숨을 쉬어보자. 휴우.


(아참! 이건 알리고 가야겠다. 전화 통화가 실제로 이뤄진 건 아니다. 박상은 이럴 때(흥분, 분노, 셀렘을 느낄 때)마다 떠오르는 친구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다. 녀석이 살아 있다면 오늘은 분명 전화통화를 했을 날이다.)


여느 때와 달리, 친구 생각에도 나는 지금 우울하지 않다.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피아노 소나타 11번 1악장>이 위로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모차르트가 속삭인다. ‘슬퍼하지 말고 명랑하게 살아가세요.’(내 나이가 모차르트보다 많다.) 이 젊은 음악 천재는 1악장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나를 경쾌함으로 초대했다. 신난다. 외출 시간이 코 앞이라 3악장까지 듣진 못했지만, 나는 이미 행진할 준비가 됐다(3악장이 그 유명한 ‘터키행진곡’이다).


내가 다시 피아노를 배울 가능성은 낮다. 유투브에서 어느 아마추어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연주는 전혀 '모차르트'가 아니었다. 처음 들을 때에는 피아노 소나타 8번이 아닌 다른 곡인 줄 알았다. 그도 꽤 오래 배웠을 텐데 나의 시청 소감은 간단했다. ‘직접 연주로 모차르트를 만나기는 쉽지 않겠구나.’ 내 둔한 귀를 훈련하는 게 빠를 것 같다.


"이번 생에는 글렀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윤회를 믿지는 않지만 재밌는 표현이다. 그래, 이번 생에서의 나는 연주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감상자가 되기에는 늦지 않았으리라(고 믿어볼란다). 당분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매일 하나씩 감상해야겠다. (2017.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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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
—침대의 필요
(시인 김선우)


그런 날 있잖습니까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 속의 사람이
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릴 때

그런 날은 열 일 제치고 침상을 정리합니다


날 선 뼈들을 발라내 햇빛과 바람을 쏘이고
가장 좋은 침대보로 새로 씌우죠


이봐요, 여기로


거울 앞으로 가 거울 속의 사람을 마주봅니다
거울 속으로 손을 뻗지 말고
여기서 손짓해 거울 밖으로
그를 꺼내야 합니다


어서 와요.


정성 다해 만져줘야 할 몸이
이쪽에 있습니다.


- 《문학동네》 2016년 가을호


*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피로감을 느끼는 이와 함께 읽고 싶은 시다. 거울 속 얼굴은 왜 사나워졌을까? 시인은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짐작해 본다. (아마도 격무에 시달려) 몸이 피곤해서, (아마도 누군가로 인해) 감정이 격해져서, (때때로 누구나 그렇듯이) 삶이 고단해서, 이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이유를 서술하는 대신 대책을 내놓는다. 이것이 김선우 시의 힘이다. 원인분석 대신 대책모색의 긍정성! 거울 속의 그에게 왜 그랬냐고 탓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 있는 만지기 힘든 내면적 자아의 원인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보듬을 수 있는 실체적 자아에 집중한다. “몸이 이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손짓한다. 가장 좋은 침대보로 침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으르렁’에게 ‘어서 와요’라고 하고 부른다. ‘으르렁’이 부드럽게 바뀌어가는 모습을 시정으로 느낀다.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몸’을 정성 다해 만져 주고 있으니! 행복은 마음에만 있지 않고 몸(의 활동)에도 있으며, 두뇌 발달에는 독서와 사유만이 아니라 운동이야말로 도움 됨을 최신 과학이 증명해 낸, 바로 그 몸을 말이다. 시인의 대책은 시쳇말로 과학적이다. 예술적 직관은 종종 과학을 선취하는 법이다.(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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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은 내게 위로자요, 때로는 눈 밝은 안내자다. 망각했던 것들을 일깨워 삶의 모양이나 방향을 제안한다. 추구할 만한 가치와 달려갈 푯대를 보여주어 나를 추동한다. 그러한 일급의 예술을 보았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

영화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힘겨운 삶 그리고 그들을 섬세하게 돕지 못하는 관료조직의 고루한 위선을 보여준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예순 살 정도의 목수다. 성실하게 살아왔고, 자신에게 떳떳했다.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심장병이 악화되어 일을 그만두게 됐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야 하지만 복잡한 절차가 번번이 그를 가로 막았다. 컴맹, 넷맹인 그에게 정부 기관들은 사전 신청을 하지 않았음을 타박한다.

 

블레이크는 절망의 순간에 우연히 자신보다 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케이티를 만났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에게 희망과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블레이크에겐 자녀가 없다. 자녀를 낳았다면 케이티와 비슷한 연배의 딸이 있었으리라. 둘의 관계가 때때로 부녀지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블레이크는 조건 없이 케이티를 지원한다. 어느 날 케이티가 말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할 거예요.” 새 삶을 꿈꾸는 그녀에게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응원하겠소.”

 

3.

케이티는 런던에서 집세가 없어 뉴캐슬로 쫓겨왔다. 새로 얻은 집은 허름하다. 전기를 들일 돈도 없다. 어두워지면 촛불로 실내를 밝혀야 했다. 블레이크는 슬쩍 전기요금을 두고 갔다. 어느 날, 케이티는 욕실 벽을 청소했다. 타일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사실 집 안 구석구석이 보수와 수리를 요구했다. 떨어진 타일을 들고 욕실을 나올 때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했다. ‘울지 마, 케이티! 다시 씩씩하게 일을 시작하고 구직을 위해 노력하면 돼.’

 

그때 딸 아이가 타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엄마에게 왔다. 엄마를 걱정하는 아이. 딸을 사랑하는 엄마. “내일 아침, 기분 좋게 목욕하게 해 주고 싶어. 먼저 자. 엄마도 곧 따라가서 잘게.” 아이가 돌아가자, 결국 케이티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내 가슴도 먹먹해졌다.

 

4.

케이티와 다섯 살,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의 두 아이 그리고 블레이크. 이들은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번은 무료 식료품 보급소에 함께 갔다. (케이티는 보급소를 이용할 자격이 있을 만큼 가난했다.) 점잖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받아들던 케이티는 갑자기 캔 하나를 따서 음식을 짐승처럼 입에다 넣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도둑질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정신을 차린 케이티. “죄송해요. 너무 배가 고팠어요.”

 

기다리고 있던 블레이크가 달려와 그녀를 다독였다. “부끄러워할 거 없어. 자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한 마디의 질책도 없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울고 말았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저리 이성을 잃을까?’ 앞선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5.

블레이크가 변기도 고쳐주고 전기요금도 보태주어 고마웠던 케이티였다. 그 날도 블레이크는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 먹고 가세요.” 아이 둘에게 식사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블레이크에게도 접시가 돌아갔지만 케이티는 사과 하나를 먹을 뿐이었다. 블레이크가 눈치를 챘다. “자네가 먹어. 난 괜찮아.” 식탁에 앉으며 케이티가 대답했다. “제 최소한의 성의예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말없이 음식을 먹어 준 블레이크가, 나는 정말 고마웠다.

 

6.

몇 주가 흘렀다. 그 동안 블레이크는 보조금을 받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고, 케이티 역시 일자리를 찾으러 다녔다. 그녀에게 검은 손이 뻗쳤다. 한 남자가 매춘을 소개한 것이다. 케이티는 딸 아이의 떨어진 신발도 사주지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위험한 세계에 발을 들이고 만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블레이크가 업소에 가서 케이티를 만난다. “이런 일까지 하지 않아도 돼.” “제발 가 주세요.” 갈등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관객인 나로서도 긴장이 고조되었다. 블레이크의 선의와 케이티의 자존심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타협을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려는 블레이크도 이해되었고, 마트에서 여성용 패드를 훔치기까지 전락한 자신의 삶을 구원하려는 케이티도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인 갈등도 이해되었다.

 

그것은 반목이 아니었다. 갈등은 때때로 애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모든 갈등이 애정일 수 없고, 갈등이 항상 애정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애정이 없으면 대체로 갈등도 없다. 친구와 이 장면에 대해 얘길 나눴다. 영화의 전개와 블레이크의 캐릭터 상으로 보면, 어쩔 수 없이 빚어진 장면이지만, 영화에서 벗어나와 지혜로운 행동으로 따져 보았다. 우리는 블레이크가 모른 척 했어야 했고, 적어도 그 업소가 아닌 다른 상황에서 넌지시 당부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7.

영화가 진행되는 곳곳에서 이 시대의 고질적인 문제를 절감했다. 정부는 매년 새로운 약속을 하지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실업’ 말이다. 내가 알기로, 아직까지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시간을 내어 ‘실업’이라는 21세기의 재앙에 관해 조사하고 좋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전했고 도우려고 애썼다. 그는 현실적 문제를 무시하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오지랖 넓은 낭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의로움과 자존감을 추구하는, 하지만 가난한 시민이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는 보조금 지급 상담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끝내 자존심을 읽고 말았던 계기와 자존심을 잃고 난 이후의 결말에 대한 언급은 영화를 감상하실 분들을 위해 삼가겠다.

 

이 영화는 관람할 때에나 보고 나서나, 가슴이 아팠다. 분명 슬프고 아픈데도 영감과 감동을 얻었으니 행복감도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이라니! 시종 잔잔하고 섬세하게, 세상의 어두운 한편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어떤 이는 고통을 겪으며 '고통 앞에선 모두가 하나'라는 연대의식을 회복한다. 눈물로도 내일을 그린다. 내가 그렇다. 한동안 뜸했던 재능 십일조 강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고작 1월인데, 2017년에 본 최고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보보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약속 시간을 기다리면서 선물로 챙겨 온 시집을 펼쳤다. 몇 편의 시로부터 미소와 깨달음을 건네 받았다. 그 중 한 편이 정희성의 <태백산행>이다. 시는 한 폭의 그림이요, 한 소절의 노래인가 보다. 시집에서 그림 몇 점(길 나서는 사내, 태백산에서의 대화들)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중년 부인이 투덜대는 소리가 귀에 울린다. 태백산을 울린 "좋을 때다"라는 말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의 현재에 침투한 느낌도 들었다.


지금이 좋을 때다.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행동하려던 참이었다면, 오늘이 맞춤한 날이다. '아, 잊고 살았구나! 지금이야말로 참 조오흘 때임을' 이라고 탄식해도 괜찮다. 오래 머무르지만 않는다면, 탄식과 후회가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폭발적인 에너지가 되기도 하니까. 나는 지금이 좋을 때임을 알고 있었다. 좋은 앎은 새롭지 않아도 자극과 감동을 주는 법이다. 삶에 밀착된 앎, 삶을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앎! 이것이 좋은 앎이 아닐까.


아름다운 예술이 좋은 앎마저 선사하니… 마음이 춤을 춘다.


Posted by 보보


* 1) 예술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대중영화와는 다르니,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어떻게 다르게 감상해야 하나, 저도 고민 중입니다. 2) 물과 기름은 섞이지 못하는 법이죠. 마법을 부린다면 또 모르겠지만! 깊은 외로움과 희망도 잘 섞이지 않을 겁니다. 평범한 의식과 사유로는 말이죠. 지혜와 예술은 그 일을 해냅니다. 예술과 지혜가 삶의 마법인 셈입니다. 3) 9월말에 개봉한 영화라, 전국에서 세 극장(부산, 광주, 서울)에서만 상영 중입니다. 


1.

인생 영화를 보았다. <태풍이 지나가고>가 ‘올해의 영화’라면 <다가오는 것들>은 ‘인생 영화’가 될 것 같다. 잔잔한데, 강력하다. 괴로운데, 희망적이다. 분명히 잃었는데, 새로운 걸 발견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결론적 사건은 없는데, 이 영화를 본 것이 하나의 사건이었다. 엔딩 크레딧은 올라가는데, 눈물이 흘러 내렸다.

  

2.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은 없다. 그것은 죽음이니까! 살아 있다면 ‘많은 것’을 상실했을 뿐이다. 영화는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느끼는 이들의 절망과 좌절을 위무한다. ‘모든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잃었을 뿐이라는 말은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게 전달되지 못하는 바람에 상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영화에 서투른 충고는 없다. 부드럽고 아름답고 따뜻하게 삶의 진실을 건네는 영화다. 

 

3.

그리고 ‘남은 것’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족, 자유, 희망이다. 전혀 시시하지 않은 것들인데도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있노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다. 영화는 괜찮은 위로의 차원을 넘어선다. 부드러운 치유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고통은 삶의 일부다. 고통을 당하는 우리에겐 위로를 얻을 안식처가 필요하다. “고통의 상처에서 얻은 지혜만이 진정한 안식처”다. <다가오는 것들>은 그 안식처로 안내한다. 깨달음과 지혜가 곧 안식처다.


4.

베스트 장면은 수없이 많다. 나탈리(이자벨 위페르)가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자신의 상실과 새롭게 얻은 것에 대해 제자에게 말하는 장면("딸은 독립했고, 남편과 엄마도 떠났지"로 시작되는 말), 가족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다. 관계의 상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려는 그녀였지만, 이제 곧 헤어지게 될 남편의 별장에서 흥분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뒤를 따라 뛰면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분노가 맺힌 그녀의 걸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흔들리는 화면, 고뇌하는 나탈리!


5.

상실이라는 사건과 그로 인한 외로움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데도, 영화는 희망적이다. 이것이야말로 <다가오는 것들>이 이뤄낸 미학적 아름다움이다. "나 힘들어!"와 "내일을 희망해"라는 양극의 감정이 부딪칠 때 빚어지는 긴장감이 영화를 떠받든다. 이쪽으로 치우치면 신파가 되고, 저쪽으로 치우치면 순진해진다. 시계추처럼 오가면서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을 때에 아름다운 미학이 된다. <다가오는 것들>이 그렇다.


6.

영화는 다소 지적이다. 여주인공이 철학 선생이기에 그렇다. 첫 장면에서 가족은 샤토브리앙의 묘를 찾아가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상황마다 레비나스, 아도르노, 쇼펜하우어, 루소가 등장한다. 학교 장면에서는 알랭의 <행복론> 읽기가 과제로 주어진다. 그녀의 외로움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제자 역시 철학책을 써낸 인물로 지적 논쟁을 즐긴다. 개인적으로는 가슴에 남는 지적인 열망(말초적인 호기심과는 다른)이 남기는 영화였다.


7.

(나탈리가 엄마에게 받아 키우게 된) 고양이의 이름이 ‘판도라’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다. 불의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온갖 고통이 쏟아져 나왔지만, 희망만은 간직한 '판도라'의 상자! 영화의 내용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름이다. 영화 제목은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이다. 영화 내용으로 제목을 짓자면 ‘떠나버린 것들’이어야 하지만, 영화는 상실을 치유하면서 시선을 돌린다. '다가오는 것들'에게로! (아, 이토록 아름다운 희망이라니!) -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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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이병률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이병률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p. 125, 문학동네


*
소망하여 만나자 했으면서도
만남 이후 겪을 격정적 슬픔이 두려운 그 날.
그런데도 만남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인연
집을 나서면서도 만나지 않길 바라는 슬픔.

바람과 절망을 뒤섞어 예술로 빚어낸 시.
예술이 불러온 소용돌이에 나는 울고 말았다.
지하철에서, 내 방에서,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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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개봉작 <걸어도 걸어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대표작이다.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평론가들도 있다. 추석 연휴 첫날, 히로카즈 감독의 세계를 음미하기 위해 홀로 KU시네마테크를 찾았다.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 드라마다. 특히 부모의 자식 사랑과 자식의 부모 사랑 간의 온도차가 크게 다가왔다. 영화는 울림을 주었다. 가슴에 돌맹이 하나를 얹은 마냥 묵직한 먹먹함과 쓸쓸함을 안고 건대 교정을 거닐었다. 하늘은 흐렸다. 바람이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영화의 여운은 내면에 고스란히 쌓였다.


1. 줄거리


15년 전에 죽은 장남의 기일에 온 가족이 모였다. (장남은 물에 빠진 아이 '요시오'를 구하다 목숨을 잃었다.) 제삿상에 모인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큰 딸 가족 그리고 막내아들(차남) 가족이다. 딸네 식구는 저녁을 먹기 전에 떠나고, 막내아들 가족은 하룻밤을 묵는다. 영화는 만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우리네 일상이다.


막내아들 '료타'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어린 아들도 딸린 여자다. 이로써 부모의 걱정을 샀다. 동네의원이셨던 아버지는 료타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료타는 그림을 복원하는 일을 한다. 아버지의 불만을 아는 료타는 아버지와의 대면을 껄끄러워한다.


영화는 고부 간의 갈등을 살짝 보여주기도 하고, 료타 어머니(키키 키린 분)의 가슴 아픈 비밀을 밝히기도 한다. 장남 덕분에 생명을 구한 '요시오'도 찾아온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취직을 못해 당분간 알바로 전전해야 하는 처지다. 너무 뚱뚱하여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집을 나서는 요시오에게 어머니는 "내년에도 꼭 오라"는 부탁을 거듭 한다. 그가 떠나자 아버지가 한탄을 내뱉았다.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준페이가 죽다니!"


2. 영화가 포착한 가족의 일상들


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소소한 사연들과 감정선을, 히로카즈 감독은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이를 테면 어머니(키키 키린)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독설가다. 료타 내외가 오기 전 딸에게 며느리 흉을 본다. "고르고 고르더니 결국 중고"라며 전 남편과 사별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불편을 숨기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인 바람에 얼굴이 달아오른 며느리에겐 "예전 우리 여인들은 술은 받되 잔을 비우지는 않았는데..." 라고 타박한다. 며느리의 서운하면서도 태연하려는, 불쾌하면서도 노력하는 표정까지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말은 그럴듯 하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사위를 꼬집기도 한다. 욕실 타일이 떨어졌다는 료타의 말을, "제가 고쳐 놓고 갈게요"라고 사위가 넉살좋게 받았다. 타일은 모두가 떠날 때까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다. 아들도, 사위도 그냥 떠나 버린 것. 가족이지만, 선 긋기도 분명한 어머니다. 집으로 들어와 살려는 딸네의 바람을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 "사위가 좋은 사람이긴 해도 이 나이에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는 힘들다"는 마음을 내비침으로.


3. 감독의 영화


영화는 잘 알려진 대로, 감독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영화다. ""우리 어머니는 남의 흉을 잘 보는 분이셨습니다. 제3자가 보기엔 우습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했죠. 키키 키린은 독설가로 잘 알려진 배우라, 어머니 역할에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를 제대로 기리고자 하는 감독의 마음이 전해졌다. 24년 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걸 생각하니, 감독이 부러워졌다.


4. 크게 다가온 영화의 메시지


내가 생각한 영화의 핵심은 준페이(와 료타)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회환 그리고 아들의 미지근한 효심이었다. '요시오'가 돌아가고 난 후 료타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는 예상했던 내용임에도 인상 깊었다.


료타 : 이제 내년부터는 요시오더러 오지 말게 하세요.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요.

엄마 : 그래서 오라는 거야. 일년에 한번쯤은 고통스러워야지. 아직 그 사건을 잊기엔 너무 일러.


내겐 엄마의 독설이 아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과 형제를 잃은 심정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형(준페이)의 묘소에 가려 한다는 료타의 말에 한걸음에 따라 나선 어머니였고(흥에 겨워 보일 정도였다), 정작 묘소에 가서는 아들을 향한 그리움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묘의 잡초를 뽑으며 중얼거린다. "자식의 산소를 찾는 것보다 힘겨운 일이 있을까?"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매년 이 길이 힘들어진다면, 차가 없으니 힘들다고 귀엽게 불평하신다.)


장남의 묘소를 찾는 장면에서 나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께서도 큰딸(나의 엄마) 묘소에 갈 때에는 기력이 샘솟는 느낌이다. 돌아올 때의 표정도 한없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묘소에서는 언제나 우신다. 묘봉을 어루만지며 "니가 왜 여기에 있노?"라고 울부짖으신다. 묘는 말이 없다. 곁에서 손자가 소리 없이 울 뿐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딸의 묘소를 60~70회를 찾아갔다(나는 매번 동행했다). 엄마는 동생이 셋 있지만, 내가 알기로 엄마의 형제들이 묘소를 찾은 적은 24년 동안 2~3회에 불과하다. 이모와 삼촌에 대한 원망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저 부모의 고통과 형제의 슬픔이 다름에 깊이 공감할 뿐.


5. "내년 설엔 안 가도 되겠지?"


둘째 날, 할아버지, 료타, 아들이 바닷가를 찾았다. "요즘은 야구 안 보세요?"라는 료타의 물음에 아버지가 답한다. "요즘은 축구를 보지. 기회 되면 같이 갈래?" 아들의 대답이 힘이 없는 데다가 상투적이다. "네. 그래요. 기회 봐서요." 영화는 이제 엔딩 장면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료타 가족(아내와 아들)이 버스를 기다린다. 료타 가족이 버스를 타고 떠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가 말한다. "이제 내년 설이 되어야 오겠지?" (나는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해서 좀 놀랐다.)


카메라는 이내 버스 안의 료타 가족을 보여준다. 료타가 아내에게 던지는 말이 슬펐다. "내년 설엔 안 가도 되겠지?" 부모의 마음과는 너무나 다른 자식의 심정에 공분이 일어나기보다는 공감부터 되었다. 나 또한 효심 적은 자식 같아서 쓸쓸하고 씁쓸했다. 명절을 기회 삼아 여행을 간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고향 가족에게 바쁘다고 거짓말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저런 유혹을 느껴본 바 있기에 씁쓸했던 것이리라.  


6.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엔딩 장면


료타의 나레이터가 이어진다. "3년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다투시던 어머니도 쫓아가시듯 돌아가셨다. 결국 축구장에는 가지 못했고, 어머니를 차에 태워드리지도 못했다."


세월이 지났다. 료타 가족은 딸이 태어나 넷이 됐다. 묘소에 찾은 후, 료타 가족은 언덕길을 내려 걸어간다. 그 걸어가는 뒷 모습을 언덕 위에서 롱테이크로 잡았다. 망자들은 떠나고 산 사람들은 걷는다. 카메라를 고정되어 있고, 배우들이 움직인다.


정지 화면은 영화의 여백을 만들어 주었다. 그 여백이 관객을 위한 사유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죽음으로 끝날 때까지 묵묵히 걸어가는 여정이 곧 삶임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가족이 사라지고 난 후 카메라는 도시의 전경과 그 너머로 바다를 보여준다. 정지 화면인가 싶을 때쯤 열차가 도시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고요함 속의 역동적인 열차의 등장이라니! 내게는 우리네 인생에 죽음과 삶이 교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메타포였다.  



7. <태풍이 지나가고>보다 예술적인


'명절에 딱 어울리는 영화구나!' 영화관을 나오면서 든 생각이다. (그래서 이 즈음에 재개봉했나 보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6년 개봉작 <태풍이 지나가고>은 감독이 친절하게 작업했다는 생각도 들었다(대부분의 메시지가 할머니의 발언으로 드러나 있으니까). 반면 <걸어도 걸어도>는 보다 예술적인 영화다. 감독은 단숨에 이해되는 '대사'보다는 영화가 발휘할 수 있는 '예술적 장치(미쟝센, 배우의 표정 연기, 카메라 샷)'를 통해 말한다.

히로카즈 감독의 섬세하고 느린 호흡을 따라간다면, <걸어도 걸어도>는 감동을 얻을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그런 이들이 많지는 않은가 보다. 예매율 1위 <밀정>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관객수였다. 7년 전의 개봉작을 이번 8월 4일 재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관이 극소수다. 15일엔 전국 어디에서도 상영되지 않는다. 16일엔 전국에서 유일하게 부산 영화의 전당, 17일엔 서울 KU 시네마테크에서만 상영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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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따뜻한 영화는 묻는다. "지금 당신은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감독은 희망과 위로와 함께 건넸지만, 이 질문은 내게 송곳이었다. 꽁꽁 묶어놓은 감정의 보따리를 찔러버린 송곳! 작은 구멍은 점점 커져 결국 꾹꾹 눌러놓은 감정들이 쏟아져나왔다. 후회, 아쉬움, 자괴감... 그리고 눈물.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료타'는 과거에 문학상을 수상한 현직 사설탐정이다. (아쿠타가와 같은 저명한 문학상은 아니지만, 제법 팔린 소설이다.) 철들지 못한 캐릭터로 책임감이 빈약하고 자기경영에 서툴다. "결혼 생활에는 어울리지 않는" 료타는 이혼남이다. 아들을 좋아하지만, 매월 양육비를 미뤄 아내의 핀잔을 듣는다. 돈이 없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어머니의 다락방을 뒤진다. 태풍이 몰아친 날, 료타와 아들 그리고 이혼한 아내는 료타의 어머니집에 하룻밤을 묵게 된다. 태풍은 지나가고 료타는 아들과의 다음 달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2.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 주인공 료타가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쓴 메모다. 그에게 의뢰한 한 여인이 내뱉은 말이다. 그녀는 내연남과 사귀는 중이고 그녀의 남편에게도 내연녀가 있다. 그녀가 불쑥, 덤덤하게, 던진 이 말을 료타는 주워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포스트잍에 옮겨 적었다. 언젠가 소설의 대화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이 말이 나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내게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묵직한 메시지다.


삶을 살다가, 이런 씁쓸한 독백을 내뱉지 않은 어른들이 있을까. 소수라도 있겠지. 나는 그 행복한 소수에 들지 못했다. 서른 후반부가 되면서, 저 말이 내 입술 밖으로 세어나오진 않았지만, 여러 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할머니(료타의 어머니 역, 키키 키린)의 대사에 열광하는 동안, 내 영혼은 "내 인생,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에 젖어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부침이 존재할 터! 나의 경우에는 2013년 이후 특히 2014년 하반기부터 줄곧 내리막길의 삶이다. 마음의 부담감은 크고, 출간은 멀어졌고, 삶의 순간마다 누리던 풍요로운 기쁨은 사라졌다. 어디에서부터 꼬였을까, 라는 질문이 내게 절절하게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지금 잘 나가는 인생을 구가하는 이들과 자기 삶의 파동을 섬세하게 관찰하길 싫어하는 이들에겐 울림이 적을지도.)


3.

"지금 당신은 당신이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영화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어른들을 위로한다. 꿈꾸던 대로의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자주 정의되는 행복의 모습이다. 그 일반적인 행복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료타 어머니의 입을 통해. 일흔 줄에 접어든 그녀의 묵직한 세 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날마다 즐겁게!“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왜 남자들은 현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지."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 "꿈꾸던 미래란 게 어떤 거였더라. 안녕, 어제의 나여!"


4. 

료타는 철부지다. 책임감 없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다. 몸은 어른이나, 정신 세계가 유아적이다. 성실하게 돈을 모으기보다는 경매와 복권으로 한건 올리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아들 싱고의 물음 "아빠는 되고 싶은 어른이 되었어?"라는 질문에 던진 료타의 답변이, 참 좋은 말인데, 그의 입에서 나오니 듣기 싫었다. "되었느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되고 싶은 꿈을 계속 품고 사느냐야." 나는 이 대목에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명제에 누가 되는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 료타를 어루만진다면, 싱고의 엄마 쿄코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밉지 않게 보여준다. 그녀가 밉지 않음은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한때 노력했기 때문이고, 료타의 일상을 보면 그녀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사랑만으로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함께 가족이었을 때 잘 하지." "당신은 왜 맨날 약속 시간에 늦어?" "다음 달에는 15만엔치를 줘야 해. 3개월치 양육비." 쿄코가 던지는 말은 곧 료타의 지질함이다.


5.

주인공은 지질한 아빠 '료타'다. 영화의 일차 관객은 료타처럼 삶의 한 영역이 꼬여버린 성인이리라. 영화는 그런 이들을 싱고의 할머니를 통해 위로한다. 동시에 엄마의 말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어떤 이들에게 현실 직시는 따끔한 정신적 고통을 동반한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현실 인식을 위로로 포장하여 전한다. 분명 좋은 어른이 되어 잘 살기가 어려움을 인식했는데,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참 좋은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내 인생의 10대 영화 정도에 포함될 것 같다.


영화의 원제는 "바다보다도 더 깊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대사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어"에서 따왔단다. 원제보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제목이 마음에 든다. 태풍이 오는 날 저녁과 밤에 료타네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는 태풍이 지나가 다음 날 아침에 끝난다. 몇 년 동안 내 인생에도 태풍이 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았다, 고 2016년 가을을 회상하고 싶다.


"아침 늦게까지 푹 잤다. 새로운 날이 축제일처럼 밝아왔다." - 『데미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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