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모든 팻 걸(Fat Girl)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지적이고 유쾌발랄한 페미니즘 책을 쓴 린디 웨스트의 말이다. 그녀는 강하다. "끔찍하게 뚱뚱하다"(한 영국 신문의 표현)는 말에도 그녀가 취한 반응은 '셀프 하이파이브'가 전부였다.(p.65) 이보다 훨씬 악랄한 댓글로 단련된 그녀에겐 이 정도는 분노나 절망할 사안이 아니다. 그녀는 '린디 웨스트'다. 거짓되고 저열한 문화와 투쟁하며 살아온 명랑한 전사! 


평생 팻 걸(Fat Gril)로 살아온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린디 웨스트는 용감하고 아름다운 결정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치에도 없는 머리 크리를 가졌고 팻 걸이었다). 결혼식의 당연한 의례처럼 여겨지는 다이어트 대신 예비 배우자와 마음껏 먹고 마시는 여행을 강행했다.  


결혼식 사진을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세상의 모든 팻 걸'들이 봐 주기를 바란다는 바로 그 포스팅이다. 혹시 그녀의 황홀한 글쓰기를 보고 싶다면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 될 테고.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의 뚱뚱한 복수천사’(NPR)라는 표현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녀는 '우리의' 친구처럼 살갑다. '뚱뚱한'은 단 한 장의 사진으로도 알 수 있고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복수천사'라는 모순된 표현에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강한 여자는 싫다고? 그럴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린디 웨스트는 강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따뜻하다. 게다가 웃음마저 안긴다. 페미니즘은 어렵고 복잡한 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고 유쾌 발랄한 삶의 투쟁기로도 전해질 수 있다.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은 후자의 노선을 선택한 책이다. (편견이 어디에나 존재하긴 하지만, 이 책이 ‘강한 여자’에 대한 편견마저 불식해 주기를! 아울러 강한 남자, 섬세한 남자에 대한 편견들도 없애주는 책이 등장하기를.)


결혼식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녀의 웃음에서 진리에 이른 이의 자유로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가 이른 진리는 다음과 같다.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몸이 곧 나’다. 페미니즘을 유쾌하게 설명한 이 책을 통해서든, 켄 윌버의 『무경계』를 통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이 곧 나라는 진리를 이해하고 체화하는 것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첩경이다.


덧. 포스팅의 제목을 '세상의 모든 팻 걸들에게'라고 달았다. 그녀의 바람을 담은 제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걱정을 하면서 택한 제목이다. '팻 걸'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욕을 안기는 표현이라는 비방 또는 이 제목 자체가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팻 걸'들의 외면을 부를 것 같아서다. 여러 가지 염려를 하다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녀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일은 독설을 퍼붓는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들의 무관심이 아닐까?'  


* 그녀의 결혼식 https://apracticalwedding.com/lindy-west-wedding/

* 린디 웨스트, 정혜윤 역,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세종서적




나도 이르고 싶은 자유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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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 『그리스인 조르바』 독법 하나

 

순진한 이상주의자는 어두운 현실을 곧잘 외면한다. 꿈을 추구하다가도 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면 절망하거나 힘들어한다. 이상성을 실현하지 못한 채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 이상성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이상주의자는 진흙투성이 현실 속에서 이상의 꽃을 피워낸다. 경멸스러운 현실이더라도 직면하여 그 속에서 삶을 일군다. 조르바는 자신의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는 사람 볼 줄을 알기에, 조르바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매료된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조르바와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나'는 자신에게 고용된 인부들을 이해하고 애정하려고 애썼다. 갈탄광이 성공하면 그들과 형제처럼 지내려는 계획도 세웠다. 이상이 있었기에 인부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조르바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두목, 인간이란 짐승 이예요. 그것도 엄청난 짐승 이예요. (중략)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p.81~82)

 

조르바의 의중은 무엇일까? 인간을 존중하지 말고, 비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조르바는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짓밟은 경험을 두고 괴로워했다. 적어도 전쟁의 야만성을 증오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지랄이 도저 우리에게 별로 나쁜 짓도 안 한 놈들을 덮쳐 깨물고 코를 도려내고 귀를 잘라내고 창자를 후벼내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그랬을까? (중략)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 봐요. 사람 잡아 먹는 야수 말이오.”(p.34)

 

인간은 짐승이다, 거리를 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당한다는 말은 인간을 존중하지 마라, 인격적으로 대하면 위험해진다고 섣불리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인 삶의 지혜와 모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이 책의 거의 모든 메시지를 조르바와 '나'의 특성을 모두 이해하여 통합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육감주의자 조르바의 가치는 경건주의자 ‘나’의 가치와 결합될 때 제대로 빛난다.

 

다른 하나는 조르바가 짐승이라 말한 대상을 엄밀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인지, 군중으로서의 인간인지 말이다. 전쟁 경험에 대한 그의 후회스러운 발언은 무의식적 집단행동을 일컫는다.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집단의 광기 말이다. 그렇다면, 조르바의 인간은 짐승이라는 발언은 개인은 존중하되, 무리는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라인홀드 니버의 책 제목이기도 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적 사회'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명제 중 하나다.

 

조르바에 매혹된 화자도 이번에는 동의하지 않고 대들었다.(카잔차키스는 대들었다고 표현했다. 문맥상 어색한데, ‘인간은 짐승’이라는 조르바의 신념도 일종의 믿음이기에 이에 대한 화자의 반발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조르바, 당신은 아무 것도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조르바는 관념과 이상보다는 구체와 현실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답변이 걸작이다.

 

"안 믿지요. 나는 아무도,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요.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p.82)

 

신뢰할 만해서가 아니라 그나마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여서 자기를 믿는다는 말은 내 생각을 끄집어 낸 것 같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자도 동의했나 보다.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채찍이 되어 날아들었다. 강인했기 때문에 그토록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려는 그를 나는 존경했다. 나라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금욕주의자가 되었거나 그들을 가짜 깃털로 꾸며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p.82)

 

조르바는 달랐다.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했다. 믿지 못할 것들을 불신하면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인생사를 즐겼고 순간마다 몰입했다. 살아보았더니 별 거 없더라, 고 말하는 부류와는 달랐다.

 

"조르바는 난장판이 된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며 늘 경이로 반짝이는 조그만 실눈으로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습관이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중략)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p.77)

 

조르바의 마법은 '나'에게 생기를 안겨다 주었다.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다시 태초의 신선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지겨운 일상사가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떠나던 최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다."(p.78) 조르바의 위대함은 양극적 지혜에 있다.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염세주의자는 세상에 많다. 아침이슬에 감격하는 감상주의자도 많다. 하지만 인간을 믿지 않으면서도 감탄을 잃지 않는 명랑한 회의주의자 또는 감탄하는 염세주의자는 드물다. 조르바는 그 드문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경멸하는 인간과 더불어 살고 일하는 조르바에게 감탄한 날, '나'의 가슴은 고무되었나 보다. "오늘 밤은 졸리지 않는데요, 조르바. 혼자 주무셔야겠어요."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얼굴을 묻고 침묵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밤과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p.83) 그는 유연한 학습자요, 신실한 명상가요, 뛰어난 수행자였다.

 

사실 조르바만 남달랐던 것은 아니다. 화자 역시 탁월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이의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화자는 조르바에게 매료되기 이전에 조르바를 발견했고 이해했고 수용했다. 매료보다 발견과 이해가 앞섰다. 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나’ 역시 대단하다. 그 날 밤, ‘나’는 다짐했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그리고 속삭였다. "아직 그렇게 늦은 건 아닐 거야."(p.83) 조르바의 펄떡이는 지혜와 반짝이는 영감이 화자에게 빛이 되었던 밤이었다. 이처럼 『그리스인 조르바』 읽기는 화자가 조르바의 가치를 익혀가는 과정, 즉 '나'의 조르바화(化)를 음미하는 과정이다. 독자들은 양극적 사유를 통해 즐겁게 ‘나’와 조르바의 가치를 익혀가면 될 것이다. (연지원)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세계문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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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일급의 저술가다. 나는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유통업자로 손꼽는다. 유통업의 가치는 유통하는 상품의 가치가 어떠한지 그리고 효과적인 매개가 이루어졌는지에 달려있다. 글로 지식을 유통하는 경우, 다루는 지식의 가치와 전달해내는 필력이 되겠다. 유시민은 섣불리 단정 짓지 않고 촘촘하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힘 그리고 정연한 문체와 독자를 사로잡는 문장력을 지녔다. 

 

나는 『나의 한국현대사』를 특히 좋아한다. 서문에서부터 일급의 저술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드러난다. 그는 현대사 서술의 위험성을 몇 문장으로 단박에 전달한다. "우리는 이승만 박근혜까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과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강한 호불호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왕처럼 느긋하게 대하지 못한다."(p.9) 그리고 역시 서너 문장으로 그 위험한 정글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헤쳐나간다.

 

"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 나는 이 권리를 소신껏 행사했다."(p.11) 노련하고 유능한 필력 앞에 현대사 서술의 위험이 대폭 누그러졌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뉴라이트의 등장 이후 우리는 두 개의 한국 현대사를 갖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든, 박정희 대통령이든,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은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유시민은 하나만 옳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대신 객관과 주관, 좌우의 관점을 모두 검토하여 취할 것이 있다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취한다. 관점이 없이 우유부단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관념에 사로잡혀 편협함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읽은 한국현대사 책 중 박태균 교수 다음으로 균형 감각이 빛나는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래,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서술을 보자.

 

"어떤 이들은 (1960~70년대의 경제성장을 두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반신반인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민생이 파탄에 빠지고 국민경제가 성장 동력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 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 비판하며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면 골고루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p.103)

 

이제 유시민의 균형감각을 보자. "어느 쪽이 맞을까? 나는 둘 모두 옳고, 또 둘 다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중략)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 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 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 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p.104)

 

유시민은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역사를 다룬 책에 걸맞게 하나의 사관을 쫓아간다. (욕망사관이라 부르면 어떨까.) 나는 대한민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민이 개별적 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며, 행동을 일으키는 욕망이다. 만약 모든 욕망을 다 채워서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면 더는 행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새로운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서, 인간의 욕망을 다섯 범주로 구분한 매슬로의 이론을 소개한다만약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일정한 순서가 있다면 사람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매슬로는 욕망에 위계(位階, hierarchy)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개인의 행동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개별적·집단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생리적 욕망, 안전에 대한 욕망,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망, 자기 존중의 욕망, 자아실현의 욕망 구분이 역사 이해를 돕는다는 말이다.

 

이제 매슬로의 이론으로 한국현대사를 설명한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거나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옛말을 틀리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긴 사람은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귀족과 지식인 계급이었다. 사회적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 천부적 인권, 자유, 평등, 연대와 같은 관념은 산업혁명으로 일찍이 없었던 부를 축적한 서유럽에서 먼저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경제가 발전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곳일수록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일수록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철학서가 많이 출간되고 읽힌다. (중략)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유시민은 보기 좋은 모양의 글을 만들려고 이론을 아무렇게나 갖다 쓰는 저자가 아니다옳고 그름을 따지는 합리성과 비판적 사유를 통해 이론의 접목 가능성과 한계를 고민한다. 매슬로의 이론을 적용할 때의 주의사항을 언급한 아래 대목을 보자.

 

 욕망의 위계 가설은 개인의 심리와 행위동기를 설명하는 이론적 도구여서 사회와 국가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매슬로도 이것이 경직된 위계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중략) 먹고 마시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려는 욕망을 다 충족한 후에야 더 차원 높은 욕망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생리적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다 충족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그렇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욕망은 사회적 존경, 자기 존중, 존엄, 정의, 자유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무척 유익하다."

 

좌우를 통합하는 양극적 사유와 옳고 그름의 합리성을 따지는 비판적 사유는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십분 발휘된 유시민 사유의 특징이다. 책의 내용은 제목대로 한국 현대사다. (현대사라고는 하지만 유시민 선생의 생몰연도에 한하여 서술되어 해방 이후의 정국과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 그리고 한국전쟁은 제외되었다.) 두 개의 한국현대사를 비교적 중립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이다. 진보사관의 대표주자인 서중석, 한홍구 대 뉴라이트 사관의 책들 사이 합리적 지점에 위치하려고 애쓴 것처럼 보였다.

 

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연구 결과와 사관이 백번 옳다고 믿지만(유시민 선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술 방식만큼은 유시민 선생이 더욱 지혜롭고 세련된 방식이라 생각한다. 덜 감정적인 태도를 취했고, 양극적 사유에 더 능통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쉬운 문체인데다가 필력이 좋아 지식인들과 대중 모두에게 편안하게 다가서리라. 한국은 지금 국정 교과서 등 역사 문제로 진통하고 있다. 깨어있는 국민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시대다. 내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의 한국현대사』와 박태균 교수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를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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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은 욕망의 몰락을 다룬 비극이다.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지는 리어왕의 어리석음, 거짓을 일삼는 딸들의 탐욕, 형제마저 죽이려 드는 그녀들의 욕정, 이 비극은 모두 끝없는 욕망의 결과다. 여기에 글로스터 백작의 아들 에드먼드의 욕망까지 곁들여져 <리어 왕>은 그야말로 추악한 드라마가 된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막장 드라마를 좋아한다. 막장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극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어왕>이 보여준 세상의 일면은 무엇이었나? 우선 제1막의 줄거리부터 요약해 둔다.

  

리어 왕은 브리튼의 국왕이다. 왕은 너무 늙어 세 딸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에게 국토를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딸들에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묻는다. 고네릴과 리건은 과장되이 표현하여 국토의 1/3씩을 얻었다. 코델리아는 자신의 애정을 담아낼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하여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에 노한 리어왕은 코델리아를 추방하고 막내 딸 몫의 영토까지 두 딸에게 나누어 준다.

 

1. 물어서 알 수 없는 것을 묻는 어리석음

 

사랑은 추상명사다. 추사명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추상명사를 인지하는가? 믿음, 사랑, 용기와 같은 추상명사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 행위를 통해 잠시 존재했다가 행위가 끝나면 사라진다. "나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예요"라는 말을 통해서는 용기를 알지 못한다. 물속에 잠겨가는 '세월호'에서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건넨 고등학생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용기가 무엇인지를 본다.

 

리어왕은 마음으로 느껴야 할 사랑을 자신의 귀로 듣기를 바랐다. 말보다는 '행위'로써 판단해야 하는 게 사랑인데, 불완전하게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언어'로 판단하려 했다. 언어는 인간 사회의 소통을 돕는 훌륭한 도구지만, 인간사를 모두 표현해주는 만능 매개체는 아니다. 리어왕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과오를 범했다! 과오는 삶에 크고 작은 결과를 가져온다.

 

누구나 리어왕의 욕망을 가졌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기 좋은 말을 원하는가? 말로 표현되기 힘든 것들을 얼마나 자주 한 두 마디의 말로 확인하려 드는가? 리어왕이 들은 말은 사실과는 매우 달랐다. 그러니 듣고 싶어하는 욕망을 컨트롤하라. 이성을 발휘하여 옳은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라. 욕망을 품으면 이성을 잃는다.

 

 

여인들이여 남성들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마라. 물으려거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감성을 내려놓고 먼저 이성을 챙겨 들어라. 부모들이여 자녀들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들지 마라. 지금까지의 행동이 곧 그들 사랑의 표현이니까. 나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그들이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마음에 정해 놓고서 묻는 이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진실보다는 듣기 좋은 말만 듣게 될 것이다. 진실에 화를 낼 것을 사람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로부터 진실을 듣고자 한다면, 진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부터 갖춰야 한다. 불쾌해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리어왕처럼 이성을 잃는다면, 아무도 진실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이 깊은 이들은 보지 않고서도 믿는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은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다. 신은 사람들의 의심이 극에 달할 때 기적을 보여준다. 그때  신은 '보지 않고서도 믿으면 좋으련만' 하시며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딸아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아비의 질문에 코델리아도 안타까웠을 것이다. '아버님, 제가 굳이 말씀드려야만 아시나요?"

 

2. 고네릴과 리건을 비난할 수 있는가?

 

고네릴과 리건은 부왕에게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표현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두 딸의 위선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녀들의 아버지는 권력과 부를 지닌 한 나라의 왕이었다. 대다수의 우리네 아버지는 부와 권력 둘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우리가 탐욕과 위선에 빠지지 않은 것은 고네릴과 리건보다 성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유산이 막대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만약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애국지사가 되었을까? 친일파 인사로 살았을까? 만약 1905년에 태어났다면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무려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일제 치하에서 인생을 보낸다. 거기에서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조국' 독립의 이상을 위해 투쟁할 수 있을까? 독립 투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서 장담하기란 힘들다. 막상 그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평소 했던 말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 태도를 넘어 기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일제시대에 태어난다면, 친일 성향의 삶을 살 확률이 높다. 태도는 상황과 결합하여 다양한 자식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태도'가 조국을 빼앗긴 '상황'을 만나면 나라를 버린다.

 

최근, 미국의 명문대를 다니는 학생이 포르노 배우로 활동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남부의 하버드라 불리는 듀크대의 학생 '벨 녹스'다. 비싼 학비를 벌기 위해서란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밝혔다. "오늘 나는 포르노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공개키로 했다. 내 이름은 벨 녹스이며 자부심을 안고 내 ‘주홍글씨’를 기꺼이 지니고 가겠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80%가 포르노물이다. 사회가 나를 소비하면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지극히 위선적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 처지에 맞는 효성을 다하지 못한 채로 고네릴과 리건을 비난한다면, 그것 역시 위선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사악한 자매보다 선해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녀들의 불효와 우리의 불효를 비교하려면 아버지의 부와 권력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부와 권력이 없는 부모를 모신 우리에게 효와 불효란 무엇인가를 묻고 그것을 잘 지켜가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평범한 가족의 초상은 어떠하며, 부모와 자녀는 서로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최근 개봉한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은 불행한 가족의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가족이다. 그들은 가족인데도 서로 무관심하다. 심지어 첫째 딸은 부모와 연락을 끊고 지낸다. 재벌집 자녀들이 탐욕으로 싸우는 것이 불효라면, 소시민적 가정의 자녀들에겐 무엇이 불효일까?

 

뜸한 연락(안부를 전할 줄 모르는 나의 불효가 부끄러워진다), 부모의 용돈이 부족한 줄 알고 여윳돈이 있으면서도 눈을 감아버리는 이기심(책 살 돈은 항상 있다는 사실이 한심스럽다), 부모를 돌보기 싫어 형제 자매끼리 떠미는 모습은 모두 불효다. 이런 자녀들이 리어 왕을 모신다면, 권력과 돈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불효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는 게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엔 효심보다 불효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저 그런 삶에 안주하자는 것은 아니다. 효성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되, 우리의 현실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은 인식하자는 말이다.) 우리의 고네릴과 리건 비난이 위선일지도 모른다. 막대한 유산을 받는 상황에 처하기 전, 누가 고네릴과 리건의 (서로 땅을 차지하려는 거짓말을) 비난할 수 있을까?

 

3. 코델리아의 순수함은 순진함이 아닐까?

 

막내 코델리아는 아버지를 지극하게 사랑했다. 그녀는 언니들의 교활함도 알았다. 부왕이 물음에 자기에게 오자, 그녀가 한 말은 고작 "아무 것도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였다. 언니들의 처사가 사악하다면 코델리아의 처사는 답답하다. 그녀는 선하지만, 비극적 상황을 헤쳐갈 용기나 지혜는 없었다. 코델리아는 왜 사랑 표현을 포기했을까? 모를 일이지만, 다음과 같이 자의적 해석을 시도할 순 있겠다.

 

1) 고결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결과 섞이지 않겠다는 태도다. 언니들이 거짓 수사로 사용한 도구는 말이었다. 말은 이미 더러워졌으니, 자신은 그 도구를 쓰지 않겠다는 고결주의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다. 말은 도구다. 도구엔 선악의 가치가 없다.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질 뿐이다. 

 

(어리석은 고결함의 예 : 말이 많은 사람(K라고 하자)도 자신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말이 줄어든다. K는 생각한다. '저 사람 정말 말 많군. 나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지.' 이것은 지혜로운 판단이 아니다. 사람들은 K가 말이 많은 사람임을 안다. 이미 비슷한 부류로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K의 올바른 판단은, 한 사람이 대화를 독차지하지 않도록 자신도 끼어드는 것이다.) 

 

2) 이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자기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기대하는 태도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을 말로 표현하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만이 빛난다고 여긴다. 이러한 은근한 기대 역시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속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고, 자기 식대로 상대를 바라볼 뿐이다. 소통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을 간과한 채로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지나치게 안일하고 이상적인 태도다. 코델리아가 표현을 하지 못한 원인이 이상주의 때문일 거라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상적인 태도를 배제할 수도 없다. 리어왕의 분노에 다소 의아해하고 당혹스러워하기 때문이다.   

 

3) 안목이 없었던 것이다. 리어왕의 코델리아의 대답에 분노했다. 이성을 잃고 단칼에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충신 켄트 백작이 목숨을 걸고 중재했지만 소용없다. 효심이 부족하지 않음을 충언하지만, 리어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코델리아는 착하기만 하고, 아비의 이런 성정을 전혀 몰랐단 말인가? "비옥한 영토를 받기 위해 너는 무어라 말하겠느냐?"라는 아비의 물음에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불러올 비극을 예상할 순 없었을까?

 

안목 없음의 불명예까지 코델리아에게 씌우고 싶진 않다. 리어왕의 분노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사건이고, 그러한 사건은 종종 캐릭터의 성격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코델리아의 대답이 언니들의 사악한 경지 만큼이나 답답함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들의 위선과 아첨에 기가 막혔을지라도, 아무리 비슷한 말을 늘어놓기 싫었을지라도 진실 해명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남성들이여, "나를 얼마나 사랑해?"라고 여인이 물어오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라. 당신의 사랑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을지라도 노력을 멈추지 마라. 어쩌겠는가. 상대가 표현해 주기를 원하는데! 괜히 고결함을 추구하다가 여인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목격할 필요는 없잖은가.

 

코델리아는 순진했다. 마음이 꾸밈이 없고 순박하다는 뜻을 가진 '순진'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하다는 뜻도 지난 단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줄꺼야. 그러니 나는 진실하게만 살면 돼' 라는 생각은 분명 맑은 마음이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모습이기도 하다. 순진함이 곤경을 불러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는 코델리아의 순진함, 언니들의 교활함 그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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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리뷰

 

다시(!) 피카소가 왔습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스페인 말라가시 피카소재단 25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2013.10.01~11.24) 기념, 특별, 기획이란 말들이 난무하여 복잡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스페인 남단의 항구도시 '말라가'입니다. 피카소의 고향이거든요. 그래서 이번 전시회 타이틀이 <피카소, 고향으로부터의 방문>입니다.

 

피카소의 방문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누군가는 그의 전시회를 찾아갑니다. 직접 전시회장을 가지 않더라도 방문 소식을 뉴스나 친구로부터 듣게 되고요.

어제 만난 두 명의 와우팀원은 이런 대화를 나누더군요. "이번 주에 피카소 전시회 갈 예정이예요." 듣던 이가 대답합니다. "저도 티켓은 샀어요. 전시회가 끝나기 전에 시간을 내 보려고요."

 

오늘(2013.11.05) 아침 뉴스에선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독일 나치가 1930~40년대에 유대인 미술상에게 약탈한 그림 1,500점이 발견된 겁니다. 나치 약탈의 미술품 규모로는 사상 최대의 규모이고, 가치는 무려 1조 4천억원을 넘는다네요. 세상에, 1조 4천억이라니! 작품당 평균 가격이 9억원을 웃도는군요. 피카소, 르누아르, 마티스, 샤갈 등 유명 화가의 그림이 대거 포함되어서 그렇겠지요. 

 

알랭 드 보통도 예술을 향한 우리의 관심과 예술에 매겨지는 엄청난 가치를 관찰했겠지요. 그는 <영혼의 미술관> 서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현대 세계는 예술을 매우 중요하게, 인생의 의미에 버금갈 정도로 소중히 여긴다. 이 높은 존중을 보여주는 증거는 새로 문을 여는 미술관에서, 예술의 생산과 전시에 상당한 투자를 하는 정부 정책에서, 작품에 대한 접근성(특히 어린아이들과 소외 계층에 돌아갈 혜택을 위해)을 높이고자 하는 예술 수호자들의 열망에서, 학문으로써 예술 이론의 위상과 상업 예술시장에서의 높은 가치 평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술과의 만남은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음에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선다. 그럴 땐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보통은 문제의 일차적 뿌리는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위로합니다.

 

짚어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변화의 경험을 기대하면서 미술관을 찾는 건 아니니까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적 예술관을 지닌 이들은 예술이 우리의 삶을 도와서가 아니라, 예술을 작품 그 자체로 존중합니다. 우리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말이지요. 

 

여기서부터 알랭 드 보통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강조합니다. (그가 설립한 아카데미의 이름도 '인생학교 The School of Life'입니다.) 유미주의자들은 경을 칠 말이겠지만, 그는 예술을 삶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더 아름다운 삶을 위한 도구! <영혼의 미술관>은 '도구로서의 예술'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쓴 책이고요. 

 

"도구는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신체의 연장물이다. 신체 구조상의 취약점에서 도구의 필요가 발생한다. 칼은 우리가 무언가를 자를 필요가 있는데도 자를 수 없는 무능함에 대응한 결과물이다. 예술의 목적을 발견하려면 어떤 문제들이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는 데 필요하면서도 우리에게 곤란함을 안겨주는지 물어야 한다. 예술은 어떤 심리적 취약점을 도울 수 있는가? 지금까지 일곱 개의 취약점이 확인되었고, 그러므로 예술에는 일곱가지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은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디자인, 건축물도 등장하지만 주로 미술 작품을 사례로 들면서 말이죠.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감상'의 7가지 기능을 읽다 보면, 인문적이고 심리적인 '실용서'라는 느낌이 듭니다. 글의 소재는 '예술'이지만, 글이 향하는 지점은 '삶'이니까요. 보통은 '외부 세계를 활보하는 행동'보다는 '내면 세계를 거니는 사색'이 더 자주하는 기질이기에, 그의 책에선 활동성보다는 성찰적인 색채가 짙습니다.

 

<예술의 7가지 기능>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 준다. 예술은 소중한 것과 우리가 찾은 최고의 통찰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매커니즘이며, 그것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예술에 우리의 집단적 성취를 안전하게 예치한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쾌한 것들을 시야에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쉽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 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에서 덜 당황한다. 곤경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는다. 그럼으로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끈다.

 

5. 자기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아트 오브제를 집어들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이게 나야."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경험에는 타인의 경험이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작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 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는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여기까지가 63쪽까지의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어서, 우리는 무엇을 훌륭한 예술로 간주하는가, 어떤 종류의 예술을 창작해야 하고 어떻게 사고 팔아야 하는가, 예술은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고찰합니다. 고찰은 깊되 서술은 간결합니다.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기보다는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입니다. 페이지 운운하며 설명한 까닭은 예술의 문외한들도 가뿐 사뿐히 읽으실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딴엔 예술서적이라고 일반적인 도록 크기의 판형입니다. 230여페이의 책이지만 값비싼 까닭은 큰 판형, 질 좋고 두꺼운 종이, 컬러 인쇄 때문입니다. 140 여점의 사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필요한 선택입니다. 책의 목차를 보시면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실 겁니다. 한 번 훑어 보시지요.

 

방법론 7

사랑 99

자연 129

돈 161

정치 197

 

책의 큰 목차로는 내용 짐작이 안 될 테니, '돈이'라는 챕터의 작은 목차도 소개합니다. 

 

자본주의 개혁의 길잡이, 예술

취향의 문제

취향 교육에서 비평가의 역할

진보한 자본주의를 향하여

진보한 투자

예술가들이 말하는 직업에 관한 조언

 

'삶의 도구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저자가 예술에 접근하는 실용적 태도가 느껴집니다. 제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책입니다. 저 역시 유미주의와는 거리를 두며 '삶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니까요. 빅토리아 시대의 저명한 비평가 매튜 아놀드는 <교양과 무질서>라는 책에서 예술을 '삶의 비평'이라 말했는데, 저나 알랭 드 보통은 모두 그의 견해를 따르는 셈입니다.

  

<영혼의 미술관>은 예술, 주로 미술 작품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는 법을 다룬 책입니다. 특히 미술이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다뤘습니다. 보통이 활동성이 강한 작가였다면, 예술은 어떻게 우리의 도전을 돕는가를 탐구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통의 통찰은 항상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독자인 우리는 그의 기질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종종 그도 실수를 하니까요.

 

"우리는 거의 항상 장밋빛의 감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기는커녕 과도한 우울로 고생한다"고 썼지만, 세상에는 항상 장밋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이 '순간적으로' 간과했을 이런 문장은 아쉽습니다. 그는 알랭 드 보통이니까요! 하지만 미묘한 기쁨도 안겨줍니다. 알랭 드 보통의 기질적 성향을 재확인하며 작가를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 말입니다. 

 

한 마디 더! 책을 읽으시면서 미술의 본질을 찾진 못할 겁니다. 앞서 말한 7가지의 기능은 미술 작품만이 아니라, 소설과 같은 다른 예술도 능히 해내는 것들이니까요. 삶으로 수렴하다보니 미술, 음악, 소설 등 예술 각각의 본질을 희석시킬 수 있음이 삶의 도구로서의 예술, 다시 말해 기능적 예술관의 한계입니다. <영혼의 미술관> 뿐만 아니라 <영혼의 음악감상실>, <영혼의 소설관> 같은 책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는 거죠. 요컨대, 저는 '본질주의를 추구하는 기능적 예술관'을 추구합니다.   

 

- 예술의 존재가 고마운,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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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을 읽는 기본지식

- 소포클레스 외 <그리스 비극 걸작선> 을 읽고


‘걸작선’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비극을 엮은 책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2편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번역하신 천병희 선생은 옮긴이 서문에서 세 명의 작가를 이리 설명했습니다.

 

“위대한 창조자였던 이들 3대 비극작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칠 줄 모르는 탐구심으로 그리스 정신을 가장 위대하게 구현해냈으며, 인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그리스 비극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

 

나는 인류에게 문화적 유산을 남긴 나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스를 공부하는 까닭입니다. 공부의 목표는 ‘그리스 정신’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제게는 그리스 비극을 읽어볼 이유가 충분한 셈입니다.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철학자들이 남긴 글들은 그리스 정신을 잘 살펴볼 수 있는 텃밭이니까요.

 

제가 그리스 비극을 진지하게만 접근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대에 가장 유행한 예술의 형태를 만난다는 즐거운 생각도 가졌으니까요. 무엇보다 그리스 인들이 펠로폰네소스와 같은 비극을 이겨낸 정신을 배우고 싶고요. 인생이 비극이더라도 명랑 정신을 가진다면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제 가설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와 노래, 춤과 웅변술 그리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을 한데 묶은 종합예술로서 비극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거니와,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에 소재와 주제를 제공하는 살아있는 이슈로 우리 곁에 있다.” - 천병희

 

그리스 비극은 종합예술이었습니다. 20세기 초에 영화가 발명된 이후로 종합예술의 자리는 영화의 차지였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극이 종합예술이었습니다. ‘비극 = 종합예술’ 이라는 등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 비극 읽기에 도움을 줍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이어가려는 이유입니다.

 

소설을 쓰는 현대의 작가들은 홀로 작업합니다.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결국 마지막 문장은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들의 손끝에서 마지막 작업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현대에 접어들며 작가들이 고독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러한 ‘고독한 작가’의 모습은 근대 이후의 작가상입니다. 요컨대, 현대의 작가는 1인 예술 행위입니다.

 

반면 시나리오 작가는 다릅니다. 그들은 무대나 촬영현장에서도 함께하며 자신의 시나리오가 극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핍니다. 배우와 감독이 극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하고 토론합니다. 최종 결과물은 작가의 손끝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에서 결정됩니다. 음악과 조명 등도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를 종합예술이라 부르는 까닭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시나리오 작가에 가깝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품을 책으로 출간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비극은 혼자만의 작업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집단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드라마를 전공한 다섯 명의 교수가 함께 쓴 <드라마 사전>은 집단 예술로서의 그리스 비극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합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3월말에서 4월초까지 약 일주일 디오니소스 신을 축하하는 축제를 열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상점은 휴업하고, 관청도 업무를 일시 중단했다. 외부로부터 사람들이 물려들어 아크로폴리스의 남동쪽 비탈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의 상연을 중심으로 한 축제를 구경했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주요 연극 관계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치고 앞으로 있을 연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선전을 한다. 배와 비슷한 장식차에 탄 지위가 높은 사제가 첫날의 행렬을 이끌었고, 그 뒤를 화려한 춤과 볼거리가 줄을 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습니다. 최고의 순서이긴 했지만 축제의 유일한 프로그램은 아니었습니다. 배우와 합창단원들의 도움이 없으면 비극이 상연될 수도 없었겠지요. 이런 점에서 그리스의 비극은 종합예술인 것입니다. 비극이 그리스인들의 문화생활을 엿보는 키워드이기도 한 게지요,

 

저는 지금까지 개별 비극 작품의 내용보다는 종합예술로서의 비극을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에는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비극이 공연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1) 그리스 비극은 폴리스의 모든 시민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종교적 의례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리스인 하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르고, 그들은 인본주의와 자유로운 정신을 지녔을 것 같지만, 비극을 만들고 관람했던 이들은 고대의 그리스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고대인이라는 점이 두 번째 특징을 불러옵니다.

 

2) 그리스 비극의 등장인물은 자유의지보다 구조와 형식에 매여 있습니다. 형식이 내용을 이끌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비극의 형식을 이해하면 내용을 파악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비극은 음악, 춤, 합창이 곁들여졌고 대사는 노래처럼 말해졌으니 뮤지컬과 비슷한 셈이지요. 줄거리는 유명한 전설을 가져온 경우가 많아 시민들은 모두 극의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리스 비극에서는 코로스가 등장합니다. 코로스도 극을 이끌어가니, 코로스를 건너뛰어 읽으면 안 됩니다. 코로스의 역할은 다양합니다. 극의 바깥에서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고, 주인공과 대화하기도 합니다. 사건의 전개를 설명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형식적 이해가 비극 읽기를 돕기에,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비극을 읽기 전에 비극에 대한 해설서나 배경지식을 읽기를 권했습니다. 책을 읽으면 가장 좋지만, 저는 노파심에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실까 싶어 간략하게 기본지식을 정리해 본 것이고요. 이제는 그리스 비극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6편 중 한 편 만이라도.

 

그리스 비극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일례로, 프로이트가 주창한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빌어왔고, 반대적 의미를 가진 칼 융의 ‘엘렉트라 콤플렉스’ 역시 그리스 비극에서 따온 개념입니다. 오이디푸스 왕과 엘렉트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의 비극에 모두 등장합니다.

 

“초보 독자들은 3대 극작가를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아이스킬로스는 드라마의 신학교수로서 신과 그 신의 준엄한 판결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소포클레스는 드라마의 예술가로서 인간의 고통에 집중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드라마의 비평가로서 그리스의 전설을 그가 살았던 혼란스럽고 환멸스러운 시대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삼는다.” - 클리프턴 패디먼

 

<그리스 비극 걸작선>에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패디먼의 말처럼 <오이디푸스 왕>은 가장 뛰어난 인간이 맞게 되는 비참한 고통을 다뤘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 운명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장엄하게 맞이합니다. 그러한 마지막 장면도 참으로 인상 깊지만, 저는 오이디푸스 왕이 고통을 초래하게 된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자기 인식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천병희 선생도 이런 해설을 덧붙였더군요. “이 비극은 인간의 인식 능력, 즉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스스로 저지른 행위들의 과정과 의미를 깨닫게 되며,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응하는지를 다룬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 관하여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나는 책을 읽다가 430행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쯤되면 기이히 여길 만도 한데’라고 생각했지만, 오이디푸스 왕은 그때까지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중의 무지’입니다. 모르면서도,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모르는.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한 6편의 비극을 담은 <그리스 비극 걸작선>은 그리스 정신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들이나 그리스인들의 종합예술을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유익한 선집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독일의 철학 거장 헤겔은 <안티고네>를 그리스 비극의 최고 걸작으로 꼽았습니다. 두 드라마는 모두 <걸작선>에 실려 있답니다.

 

- 요즘엔 걸작만을 소개하는,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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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랑을 전염시키는 책

-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

 

"그리스에 대한 콤플렉스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파리와 로마도 나 못지않은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역자의 말입니다. 파리와 로마의 그리스 콤플렉스를 운운한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저는 ‘콤플렉스’ 정도까지나 될까 싶으면서도, 역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왜 많은 이들이 그리스를 동경하지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행객들은 산토리니에서 바라보는 에게해 등으로 매력적인 관광지로서 그리스를 동경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주제는 식자들의 그리스의 정신과 지적 유산을 향한 예찬입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결국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유산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은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한 화이트 헤드의 유명한 말도 다소 과장인 듯 하나 실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지성인 매튜 아놀드의 유명한 말도 있지요. “세계의 문화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 두 축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리스 정신과 기독교 정신의 두축이 세계 문화를 이끌었다는 겁니다.  인간 본위의 사상과 신본주의의 구도입니다. 헬레니즘은 문명으로, 히브리즘은 종교로 이어졌다고 단순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지요.

 

“오늘날의 문명 국가들은 모든 지적 활동 분야에서 그리스의 식민지다.” 『철학 이야기』와 『문명 이야기』로 유명한 미국의 철학자 윌 듀란트의 말입니다. 그리스의 지식이 오늘날의 문명 국가를 길렀다는 뜻인데,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유산과 그리스 신화와 서사시가 세계 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스의 지적 유산에 대해서는, 영국의 고전학자 키토의 말도 인용해 보죠. “소설을 제외한 모든 학문 형식은 그리스인에 의해 창조되고 완성되었다.” 소설은 르네상스 이후에 등장했지만, 서사시, 서정시, 비극과 희극 등의 모든 문학과 전분야의 철학, 수많은 자연과학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고대 그리스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의 위대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부의 중요성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 노력이 조금이라도 성공했다면, 어떤 책으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할까요? ‘나는 한 권 정도만 읽고 싶은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한 권의 책은 무엇일까요?

 

세 권의 추천후보가 있습니다. 키토의『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김진경의『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앙드레 보나르의『그리스인 이야기』. 키토의 책은 그리스인과 그리스 정신에 초점을 맞춘 책이고, 김진경의 책은 그리스의 역사에, 앙드레 보나르는 위대한 그리스의 위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책입니다.

 

그리스 정신, 그리스 역사, 그리스 인물 중에 가장 흥미가 느껴지는 책부터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2012~2013년 출판가에는 몇권의 그리스 기행에세이가 출간되었지만,  저자의 느낌과 깨달음보다 그리스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방금 소개한 세 권의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학문적 엄밀함과 지적 헌신도에서 훨씬 앞서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책의 장점 하나는 저자도, 역자도 모두 그리스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는 데서 오는 뜨거움입니다. 그리스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책인데, 그 지식은 저자의 감상과 애정에 젖어있는 지식입니다. 역자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앙드레 보나르가 그리스를 말할 때는 일부러라도 건성건성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알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스에 가보게 될 것이다.” (P.357)

 

처음엔 역자의 흥분한 듯한 말에 의아했지만, 책을 읽고 나면 이해하게 됩니다. 역자의 그리스 사랑과 저자가 지닌 그리스 열정에 감염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역자의 그리스 순애보부터 들어보실까요?

 

“이번에는 꼭 가야지, 하고도 못가는 나라가 있다. 그게 내게는 그리스다. (중략) 꼭 공부해야지 하면서도 못하는 공부가 있다. 그게 내게는 그리스어다.”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를 향한 열정, 그 열정이 빚어낸 저자의 역량도 대단합니다. 그의 빛나는 역량은 해석력입니다. 보나르는 그리스 문명의 의미를,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와 서정시들을 뛰어난 통찰로 해석합니다.

 

“실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힘이 과학이라면, 상상 속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로 무장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요 인간됨이다. 인간됨은 다시 새로운 발견과 창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아주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지만, 문명이란 이처럼 발견과 창조의 연속이라고 정의해두기로 하자.” (P.17)

 

“신은 전능하며 힘이 세다. 가끔씩 시기에 불타고, 사소한 이익에 흔들리고, 곧 죽을 인간들에 대해서는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전투가 있고 상처가 있다. 하지만 전쟁에 투입된 인간들에게는 용기와 우정과 사랑이라는 무기가 있다. 고결한 사랑을 아는 인간은 신만큼이나 위대한 법이다. 호메로스는 그런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죽음의 그늘이 가득 드리워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역설적으로, 곧 끝나고 말 생에 대한 찬사이고, 목숨보다 그리고 신보다 더 위대한 인간들에 대한 증언이다.” (P.50)

 

“호메로스도 자연을 노래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을 알고 있었고 자연을 두려워했다. 호메로스의 자연에는 깊은 심연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며, 사나운 폭풍이 불어온다. 인생의 쓰라린 면들을 상징하는 것이 자연이다. (중략) 반면 삽포의 자연은 신비로운 옷을 벗고 인간에게 내려온다. 가까이 다가와 친구가 되며, 존재가 되고, 인간과 더불어 교감을 나눈다.” (P.171)

 

앙드레 보나르는 열정과 식견을 균형있게 갖춘 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열정과 뛰어난 지성이라! 흥분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하나의 자문에 저자의 메시지로 답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현대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스 문명의 목적은 하나다. 자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것,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휴머니즘이라 부른다. 그렇다. 그리스 민족의 문명은 인간의 문명이었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명도 그리스 문명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덧붙여 완성해나갈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 (P.21)

 

- 자연과 휴머니즘을 노래하며,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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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고전 문학 '단숨에' 읽기

   - 마틴 호제의 <희랍문학사>에 대하여

 

여러분이 만약 세계문학의 기원이나 인문학 공부의 정수를 공부하고 싶다면 고대 그리스의 유산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철학 텍스트를 말합니다. 그들의 문학과 철학이 인류 문명의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그 주인공들이니, 그리스 유산의 명성과 중요성을 짐작하시겠지요? 이야기를 이어가기에 앞서 이 글을 쓰는 제 입장을 전하겠습니다. 두 가지의 입장을 견지하며 오늘 글을 쓰려 합니다.

 

1) 여러분이 그리스 문학이나 서양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독서를 즐기는 평범한 직장인임을 명심하고서 글을 썼습니다. 몇 권의 책을 소개했는데, 전공자로서의 학술 공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의 인문 소양을 키우는 데에 실용적이고 필수적인 도움을 주는 책만을 추천했다는 말입니다.

 

이를 테면, 마틴 호제의 <희랍문학사>는 우수한 학술도서지만, 그리스 문학을 이해하려는 강렬한 열망이 없는 상태에서 400페이지를 재밌게 읽기는 힘들겠지요. 그러니 호제의 책은 추천 대상에서 제외입니다. 그럼 왜 이 책을 표제도서로 선정했냐고요? 제 대답은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책을 추천했습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목표입니다. '아슬한' 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생산적 독서는 자칫하면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으려는 욕심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되기 바로 직전의 최고로 생산적인 '인문 소양 공부'를 위한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2) 오늘은 표제도서에 대한 이야기보다 다른 곳에서 공부한 제 설명이 더 많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표제도서인 <희랍문학사>를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문 중에 추천한 도서를 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희랍문학사>를 들먹인 것은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잠시, <희랍문학사>라는 책의 제목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 나라를 '헬라스'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부를 때엔 '헬레네스', 그들의 문명은 '헬레니즘'이 됩니다.) 헬라스의 한자어가 '희랍'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한때 <희랍인 조르바>로 번역되기도 했지요. 책은 제목 그대로 그리스 문학을 다뤘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이곳저곳에서 배운 그리스 문학의 발전 양상을 설명하겠습니다. 잘 따라오시면, 제가 소개할 책들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시고 동의하실 겁니다. 그리스 문학은 다음과 같은 장르의 순서대로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서사시 -> 서정시 -> 비극 -> 희극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서사시는 중요합니다. 대표 서사시인은 호메로스요, 그가 쓴 두 편의 서사시가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입니다. 6세기에는 서정시가 등장합니다. 사랑을 노래한 '삽포'가 가장 유명한 서정시인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비극과 희극이 등장합니다. 장르마다의 대표 작가들을 아래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서사시 :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서정시 : 아르킬로코스, 삽포, 핀다로스

비 극 :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희 극 : 아리스토파네스

 

고대 그리스의 슈퍼스타급 시인들과 극작가들입니다. 이름만이라도 기억해 두시면 도움되실 겁니다. 이들 장르 중에서도 특히 서사시와 비극이 중요합니다. 서정시와 희극에 비해 후대에 미친 영향이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작가를 더욱 엄선하면, 호메로스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크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되겠습니다.

 

인문학 공부의 정수인 그리스 문학의 유산에 접속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리스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분들은 아래의 이름부터가 낯설겠지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낯선 것일 뿐입니다. 차츰 익숙해지실 겁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그리고 3대 비극 작가의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입니다. 만약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호메로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까지 포함해 두세요. 희극에 관심이 있다면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을 읽으시고요. 총 7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전히 어려움이 있지요? 7권이라는 책의 권수는 다소 많으니까요. 게다가 각권마다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지요. 그래서 더욱 엄선하여 단 2권으로 줄여보죠.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그리스 비극 걸작선>!

 

2권이면 도전할 만 하지 않으세요? 이제 두 권의 책을 읽는 법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읽기 전에는 우선 <일리아스>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면 좋습니다. <일리아스>가 먼저 쓰인 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용상으로 한 가닥이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작 한 가닥이니 두 서사니는 별개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일리아스>는 기원전 12세기에 일어난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서사시입니다.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죠.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아의 명장 '헥토르'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고 보았던 이야기지요? 가물가물하시면 영화 <트로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일리아스> 읽기를 대체하시면 됩니다.

 

<일리아스> 읽기를 영화 한 편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학인들의 노여움을 살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적은 노력으로 최고의 독서 효과를 얻는다"는 글의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렵니다. 영화 <트로이>로 트로이아 전쟁을 거칠게 스케치하시고 <오뒷세이아>를 읽으시면 됩니다.

 

<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 중 한명인 오뒷세우스의 귀향담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모험담이요, 여행담일 겁니다. 오뒷세우스가 낭만적인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고,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는 모두 중요합니다. 잠깐 영화를 보는 것보다 진득하게 달려들어 공부할 만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문학에 관한 단 '2권의 책'만을 고른다면, 저는 <일리아스>가 <오뒷세이아>에 밀린다고 생각합니다. <오뒷세이아>가 후대의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오뒷세이아>를 대신할 영화도 없고요.

 

<그리스 비극 걸작선>은 희랍 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시는 천병희 선생이 엮은 책입니다. 3대 비극작가의 작품들은 아이스킬로스 7편, 소포클레스 7편, 에우리피데스 18편이 후대에 전해졌는데, <그리스 비극 걸작선>은 세 작가들의 대표작 2편씩 총 6편을 엮은 책입니다.

 

그리스 문학을 엄선(!)하여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추천 드렸으니 분량으로는 만만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배경지식 없이 두 권의 책을 읽기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여기서의 배경지식이란 인문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서사시와 비극은 현존하는 모든 문학 텍스트보다 먼저 쓰인 책들이니 내용에 관한 배경지식을 갖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두 권의 책을 읽어 두면 다른 여타의 문학 작품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요. 두 권을 읽는데 필요한 배경지식이란, 어떤 '내용'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 서사시와 비극의 '형식'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두 원전을 읽는 데에는 그리스 문학 장르의 형식적 특징을 설명하는 참고서가 필요한 셈입니다.

 

우선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오뒷세이아> 원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 고전 문학을 처음 읽으신다면 형식과 언어가 낯설어서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대진 선생의 <세계와 인간을 탐구한 서사시 오뒷세이아>나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를 곁에 두면서 함께 읽으면 되겠습니다. 전자는 청소년용, 후자는 성인용 참고서이니 끌리는 책 한 권만 읽으시면 됩니다.

 

<그리스 비극 걸작선>의 참고서로는 천병희 선생이 쓴 <그리스 비극의 이해>가 있습니다만, 다음 주에 제가 직접 간결한 그리스 비극의 참고글을 작성하여 찾아뵙겠습니다. 천병희 선생보다 설명을 잘 해서가 결단코 아닙니다. 책 추천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읽을 책에 비하면 인생은 턱없이 짧으니까요.

 

이제 글을 맺겠습니다. 마틴 호제의 <희랍문학사>는 어떡하냐고요? 대부분의 독서가들에게는 희랍문학의 '역사'를 아는 것보다 희랍문학의 중요한 '작품'들을 읽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라면, 희랍문학사는 오늘의 제 설명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떤지요? 괜찮으시다면, 바로 '2권의 책'으로 뛰어드세요.

 

마틴 호제의 책 제목 정도는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스 문학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실 때, 손에 들어야 하는 책이니까요. <희랍문학사>의 역자는 옮긴이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읽은 다른 희랍문학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당히 긴 시기를 다루면서도 책의 분량이 훨씬 적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지지부진한 일일연속극보다 전개가 빠른 수목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과감한 생략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에 전체를 개괄할 수 있다는 장점이 들어 번역에 착수하였다."

 

희랍 문학을 2권으로 추천한 것은 과감하다 못해 무모한 생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두 가지의 유익과 장점은 있으리라 생각하며 글쓰기에 착수하였습니다. 2권의 독서를 실천하시어 장점과 유익을 제게 말씀해 주시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 독자를 위해서라면 무모함도 마다않는,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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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여, 오라! 끌어안아 주리니.

-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살아야 하는 이유! 제목에 이끌려서 읽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가져서 우울한 것도 아니고, 삶을 놓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것도 아닙니다. 나는 신이 주신 삶을 감사해하며 명랑하게 살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되어 답답함으로 집어든 책입니다. 인생에 대한 무상함이 삶의 의욕과 소망을 짓누르고 있는 요즘이거든요.

 

무상함 혹은 허망함! 지난 달, 존경하는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에 나를 지배하는 감정입니다. 살면서 힘든 일을 피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소중한 이와의 사별은 여느 힘든 일과는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렵니다.   


좋은 리더가 되는 것은 나의 꿈입니다. 조직의 리더로서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할 때에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때의 힘듦은 그들을 향한 미안함이기에 극도의 절망적인 상황이나 허무감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고, 좀 더 나은 리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별은 슬픔이나 힘겨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허무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별이란 나의 노력 따위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중대한 질병에 걸리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다가 문득 죽음의 실체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허무감과 덧없음이겠지요.


그렇다면 허무감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질병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질병을 치료하고자 괘락에 탐닉하거나 신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적인 질병이라면 나는 인간적인 방식으로도 해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의 내 상태를 진지하게 사유함으로 말이죠. 니체는 말했지요.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를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이런 목적의식 덕분인지, 나는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빠져들었습니다. 저자의 필력 덕분도 있겠지만 저자가 처한 상황에 공감했던 탓이 클 것입니다. 그는 최근 2~3년 사이에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함을 체험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고, 그가 살고 있는 나라 일본에서 대지진을 목격한 게지요. 그가 책의 독자를 향해 말합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해 번민하며 고민하는 사람들, 비참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을 안은 채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죽은 아들과 내가 합작한 기도의 말이다."


그는 첫째 장에서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높이'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행복방정식 대신 새로운 방정식을 제안합니다. 안이하고 피상적인 낙관론 대신에 인생의 고해를 정직하게 다루는 비관론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만큼이나 불행과 동행할 줄 아는 지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터라 저자의 문제제기에 공감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와 같은 행복론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게된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고뇌나 수고에 눈을 돌리고 그 의미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야 비로소 새로운 형태의 행복이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저자는 현대인들이 고독한 원인을 한시라도 자기를 잊는 일이 없는 비대해진 자의식에서 찾고(2장), 우리의 다섯 가지 고민거리(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에 대해 설명합니다(3장). 자기찾기 열풍이 어떻게 우리를 억압하는지에 대한 설명(5장)도 인상적입니다. 


"진짜를 찾아라! 라는 구호 같은 담론이 항간에 흘러넘치고 있는데, 지금의 제가 진짜가 아니라면 여기 있는 저는 가짜인 걸까요. 어떤 사람일까요. 투명인간일까요. '진짜가 되어라'는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진짜가 되고 싶다'라고 필사적이 되는 데에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제가 인상적이라고 한 것은 자기계발 담론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이미 <긍정의 배신>, <자기계발의 덫>과 같은 사회과학을 기반한 저자들이 자기계발 담론을 비판한 적이 있으니까요. 강상중 교수의 신선함은 '자기 찾기의 역사'를 나름의 혜안으로 풀어내었다는 점입니다.  


6장의 제목은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입니다.  저자의 생각은 '그렇다'입니다. 그의 조심그런 전망이 반가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거듭나기'의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빠져나간 지경에 도달하고, 세계의 새로운 가치라든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성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이 떠오릅니다. 방황과 혼돈을 견뎌내야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장은 혼란을 앞세우고 오는 걸까요? 아무튼 저자는 '거듭나기'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저는 3월 11일의 경험을 어떻게든 '거듭나기'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이고 좌절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철저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는 일조차 없이 그저 '실패를 망각하는' 방법만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부모님과의 사별, 뜻밖의 군입대 등의 마음병을 앓으면서 조금씩 성장한 듯 합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지금 저도 저자처럼 또 아픈 기대를 하게 됩니다. 사별의 슬픔과 허망감을 어떻게든 '거듭나기'의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책의 7장~9장은 제목은 이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갈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인생이 던진 물음에 답한다. 운명은 받아들이고 인위는 극복하자, 고통을 제대로 끌어안아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등의 지혜들을 설명한 장입니다. 


저자는 책을 출간하고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이한 낙관론은 범죄다. 미래는 밝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나는 그의 정직한 비관론에서 얼마간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책을 덮고서 얻은 유익은 또 있습니다. 거듭나기를 향한 비전, 성장하기 위해 아픔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약간의 의지가 생겼습니다. 독서를 통해 받은 위로와 의지가 쌓여가면 아픔을 겪기 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테지요. 


아! 한 가지 더.  책을 읽고서 인간의 필멸성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생의 의미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살아야 하는 이유와 생의 의미를 고민해 보려고요. 나도 머리를 달고 다니니까요. 


저자 강상중 교수는 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정교수입니다. 그는 2013년 봄, 일본 교수 사회에서 최고 명예로 꼽히는 도쿄대를 떠나 세이가쿠인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도쿄대 정교수 퇴직이 2~3년 남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년 퇴임 뒤 옮기면 갈 곳이 없어서 가는 꼴이 돼 세이가쿠인대학에 실례가 됩니다. 폐품처리가 아니라 재생을 위해 옮기는 거지요."


그는 거듭나기에 성공한 것일까요? 그의 거듭나기가 완료형인지 진행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끌어안으며 고민했을 거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순 셋 그의 인생은 어디로 행진할까요? 얼마나 더 성장할까요? 궁금해집니다. 그의 삶이. 그리고 나의 인생도.


- 고통을 포옹하며,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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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고 지혜로운 멘토, 찰스 핸디

- 찰스 핸디의『포트폴리오 인생』를 읽고

 

탁월한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 그도 경영학 구루로서의 경력에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1976년에 출간된 『Understanding Organizations』을 지금까지 4번이나 수정 보완하며 개정판을 낸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최고의 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제목으로 2011년에 초역되었지요.) 세계도 그의 경영사상가로의 업적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책 『텅 빈 레인코트 The Empty Raincoat』는 1994년 '올해의 경제 평론가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미국 선탑미디어와 유럽경영개발재단(EFMD)이 발표한 ‘50인의 사상가’에 찰스 핸디를 피터 드러커에 이은 2위로 선정했습니다.(www.Thinker50.com)

 

찰스 핸디를 경영학자로만 설명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철학을 전공하고 고전을 즐겨 읽어온 그는 이야기에 능하며, 삶의 지혜에 통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작가입니다. 책에서도 자신을 그리 표현합니다. 자신이 전하고 싶은 것들은 진솔하고 담백하게 풀어내는 훌륭한 작가입니다. 심오한 것들을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힘이 탁월합니다. 고전문학을 읽은 이력과 삶의 다양한 경험을 지닌 이가 비유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니, 독자로서는 달콤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됩니다.

 

찰스 핸디가 경영의 구루가 아니라, 인생의 멘토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탁월하게 해내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포트폴리오 인생 Myself and Other More Important Matters』입니다. 책의 원제가 이 책이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에 관한 혹은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담은 이 책은 핸디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소중한 텍스트지요.

 

포트폴리오 인생이란 분산투자를 의미하는 포트폴리오라는 개념을 시간활용에 대입한 것입니다. 찰스 핸디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대비하기 위한 포트폴리오 인생을 살라고 주장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포트폴리오 인생'이란 제목은 책의 일부를 표현할 뿐이라는 점에서 나는 제목에 불만이 있지요.)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높지만, 그는 해답을 제시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지혜를 추구해야 하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의 진정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독자를 성찰케 하는 그의 힘을 개리 헤멀도 잘 지적했지요. “대다수의 경영사상가들은 ‘어떻게’의 문제에만 집중하지만, 찰스 핸디는 독자로 하여금 ‘왜?’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찰스 핸디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고서, 그것을 찬찬히 돌아보며 이야기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를 사유케 합니다. 실제로 먼저 살아 본 ‘선생’으로서 계몽주의적 태도 없이 그저 이야기합니다. 재밌고 진솔하게. 작가 스스로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 책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책 자체가 나의 완전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다. 변화해온 삶 속에 등장했던 여러 찰스 핸디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들을 만나고 성찰하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우리에게 무슨 생각을 하게 만드는가? 이것이 책의 내용입니다. 우선 정체성을 다룹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주변 상황이 워낙 단조롭거나,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일 게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의 진짜 모습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누구인지를 묻게 됩니다. 답을 얻든 그렇지 않든 유익한 질문이 있는데, 핸디는 그런 질문만 던집니다. 정체성 외에도 공교육, 진정한 학습, 경력의 의미와 한계와 같은 삶의 중요한 가치를 다루는가 하면, 주방과 서재, 직장생활, 여행 등 손에 잡히는 일상의 소재도 훌륭히 요리해 냅니다.

 

지혜로운 스승이 마지막 챕터의 결론으로 내놓은 문장도 묵직하더군요. “누구나 시간의 모래 속에 족적을 남기겠노라는 원대한 희망과 야망을 품고 결연하게 길을 나선다. 그리고 결국에는 볼테르의 철학소설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처럼 ‘내가 하는 일은 중요성을 따지면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내가 이일을 하는 것 자체는 무한히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말 그렇다. 이제 나는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흡족한 마음으로.” 책은 경영이론이 아닌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으니 편안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언어는 쉽지만, 내용은 깊으니 찰스 핸디의 인생 수업에 흡족해할 테고요. 깨달음을 내놓을 뿐 억지로 쥐어주려 하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찰스 핸디, 그는 내 삶의 멘토입니다.

 

- 핸디 할아버지의 건강을 빌며,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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