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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십년 동안 맹목적으로 집단을 뒤따라 걸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뒤에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고 방향을 바꾸었다. 이렇게 몸을 돌리는 것이 바로 대전환이다. 이것은 생명의 돌파구이자 새로운 출발선으로, 자유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몸을 돌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몸을 돌린 뒤로는 나날이 생명에 가까이 다가서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며 빛을 추구하던 어린 시절의 본능에 가까이 다가선다."

중국의 실천적 지식인 류짜이푸의 말이다. 맹목은 눈이 멀어 시비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맹목성은 스스로를 책깨나 읽었다고 생각하는 이들, 하지만 아직은 지성이라 부르기 힘든 수준의 초보 독서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조바심과 함께 학습자의 성장을 빼앗아가는 2인조 강도다. 교만을 물리치는 것은 지혜다.

교만의 대비책으로서의 지혜란, 두 가지 태도를 갖는 것이다. 첫째,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일이면 틀렸다고 증명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믿는 태도이며, 둘째,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태도다. 겸손한 자가 지혜를 얻는다. 지혜가 교만을 물리치고, 교만하지 않아야 맹목성을 떨쳐낸다.

사실, 지혜의 모습은 다양하다. 겸손의 모습을 띄는가 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로버트 풀검은 말했다.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풀검이 제시한 것은 당찬 자신감이 아니다. 그의 훌륭한 책을 읽으면 지혜를 낳는 또 하나의 근원을 알게 된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정체된 것은 배워야 할 것을 아직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배운 것들을 실천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라고.

지혜의 두 가지 근원을 명심하자.
하나는 겸손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이다.


초보 독서가들에게 부족한 것이 겸손과 실천이다.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여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짓는다. 그들의 독서감상은 종종 "이 책은 그저 그런 책인 줄로 알았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런 말을 한다고 그가 교만하다는 말은 아니다. 초보 독서가의 독서는, 자신의 어줍잖은 지식으로 단정지은 어떤  책을 읽으며 오해를 걷어가는 과정인 경우가 많다는 거다.

또한, 실천의 場에 뛰어들지 않았기에 그들의 지혜는 성글다. 읽어야 할 실제로 책을 읽고 생각하며 자신의 사유를 형성해가기보다는 어딘가에서 주워 들은 견해를 자기 머릿 속에 가득 채우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한 실천의 부재란,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않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어떤 좋은 책을 실제로 읽지 않고 제목만 알고 어줍잖게 아는 척 하는 태도를 말한다. 책에 대한 정보를 들은 바 알지만, 정작 그 책이 어떠한 책인지에 대한 내용 이해는 결여된 경우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어느 신실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자기는 유교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이야기를 잠깐 나누다 보니, 그녀가 유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유교의 인간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유교에서는 인간을 중시합니다. 자연 자체나 인간이 죽은 후의 내세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세계관입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완성해 갈 수 있는지, 또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반영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실천 위주의 인간관에 대한 문제를 중시합니다."

유교박물관에서 주워 익힌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어긋나는 대목이 많다. 그녀는 이 얘기를 듣자마자, 자신이 유교와 온전히 어우러질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 성정이 유교의 이미지와 비슷한 게 있어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많아서 자신이 유교를 좋아한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유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유교 추구에서 맹목성이 떨어져 나간 순간이었다.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과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맹목성이 찾아든다.

독서 실천의 부재(제목을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책을 읽는 것)는 전문 지식과 내공을 쌓아주지는 못한다. 놀라운 사실은, 그러면서도 독서법에 대해서는 정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독서가들은 독서의 기술이 향상되는 것과 자신의 진짜 실력이 정비례하지 않음은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생겼다면 실제로 관련 분야의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한 사례 하나를 더 들어본다.

어느 기독 청년이 매트 리들리와 리처드 도킨스 모두를 싸잡아서 낮게 평가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고만고만한 저자들'이라는 평이었다. 비판의 이유는 간단했다. 두 저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바와 다른 세계관을 지녔기 때문이란다. 이 탁월한 두 과학자는 진화 생물학자들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창조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기독 청년에게 형편없다는 투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 청년은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교회 내 어느 분이 한 이야기라 했다. 읽을 가치가 없는 저자라는 식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이가 실제로 책을 읽었는지는 이 글의 논의가 아니다. 아니, 그렇게 말한 것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확대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맹목성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이렇듯 맹목성은 자기와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맹목적으로 좋아하든, 맹목적으로 거부하든 두 가지 모두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다. 나도 기독인이지만, 매트 리들리와 리처드 도킨스에게 열광한다.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은 깊은 감명을 받아 강연 때에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지, 두 저자의 책을 읽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에게 열광한 까닭은 그들의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학문적 깊이와 철저함 때문이니까. (사실 나는, 신념이 다른 저자가 쓴 책의 가치를 폄하한 기독 청년에게서 어느 기독단체의 봉은사 땅밟기가 떠올랐다. 땅밟기가 왜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기독청년과 겹쳐졌던 것이다.) 1)

맹목성을 떨쳐내야 지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오늘 글은 어떤 것이 맹목성인지를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맹목을 떨쳐낼 수 있는 지혜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았다. 언젠가 마음이 동하면 맹목성을 떨쳐내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써 보겠다. 글이 도움되는 독서가들이 있다면, 의견 주시길 바란다. 의견과 조언에 힘을 얻어 좋은 방법론을 담은 글을 올릴 수 있도록. ^^

1) 나는 절에 가서 땅을 밟으며 절이 무너지기를 기도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기독인이다.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인정한다. 아니 정말 존경한다. 신앙의 열정에서는 나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순수함에는 강건함과 지혜로움이 더해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순수함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면, 기특하기는 하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포교 활동에서 필요한 지혜는 관용이다. 그리스도인이 스님에게 가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은 순수한 신앙 열정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상대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비관용적인 태도다. 스님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안다. 그런데 스님에게 가서 잘못 살고 있다는 투로 전하는 포교 활동에서는 관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
Posted by 보보

물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성'은 '박식한 사람'이나 '정보통'과는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 강상중 『고민하는 힘』 중에서


정보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우리 지성의 발전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지성의 발전이 본질적으로 '정보'가 아닌 '사고'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네이버에게 물으면 답을 얻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머리로 사고하는 과정을 생략해 버린다면,
우리의 지성은 유아적 수준에 머무를 것입니다.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은 곧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등의 질문을 품고 고민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반면, 행동하지 않고 고민만 하는 것은 살아가는 힘을 앗아 갑니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지, 등의 생각이 강화되면
하나의 행동을 하기에도 참 망설여지고 어려워집니다.
행동이 없는 고민과 생각은 점점 삶과 동떨어지기 쉽다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하며 삽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니까요.
행동하며 삽시다. 그렇지 않으면 늘 같은 수준으로만 생각하게 되니까요.
우리를 지성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통합입니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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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칼럼] 산맥의 최고봉은 모든 산의 높이를 안다

저자의 박식함에 감탄을 하며 『역사란 무엇인가』의 책장을 넘겼다. 내 머리에 방아질을 해대지 않는 책이라면, 내가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고 말했던 이가 누구더라? 암튼, 이 책은 읽는 내내 나의 머리를 흔들어주었다. 정말 머리를 흔들면 그렇듯이, 책을 읽으며 머리가 어지럽기도 했다. 저자의 지성을 쫓아가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명저를 읽어나가야겠다. 명저를 읽으며 누리는 유익은 많겠으나, 요즘 나는 명저가 다른 유명한 책들의 진짜 위상을 찾아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말하자면, 명저는 인기 있는 책들의 ‘제 위치 찾아주기’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인기’와 ‘실력’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책의 날개와 띠표지에는 그 책을 선전하는 문구가 있다. 이런 문구들은 짧은 시간에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그 책이 차지하는 위상과 지성사적 위치가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다. 일반인들에게 지성인들은 모두들 대단한 분들처럼 보인다. 산 아래에서는 높이 치솟은 여러 산맥의 각 봉우리 높이를 가늠할 수 없듯이 일반인들은 각 지성의 높이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각 산맥의 최고점은 구름 위에 있기에 산을 조금 오른다고 하여도 여전히 구름 아래로 드러내는 산허리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산맥의 최고봉은 다른 봉우리의 높이가 어떠한지 안다. 어떤 산은 협곡이 깊어 위험할 수 있음도 바라본다. 어떤 산에는 과실나무가 가득하여 오르는 이들에게 온갖 종류의 영양분을 제공하지만, 어떤 산은 전혀 그렇지 못함도 본다. 일반인들에게는 모든 지성인들이 그저 대단히 높은 산맥으로 보였으나, 지성 중의 지성이라고 불릴 만한 탁월한 지성인들은 다른 지성인들의 한계와 그가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잘 보여준다.

이 생각은 지성인이라면 맹목적으로 존경해 왔던 나에게, 이제는 수많은 지성인 중에 내가 추구해야 할 지성인은 정말 소수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위대한 지성은 많지만, 나의 사명과 비전에 꼭 맞는 교훈과 가르침을 주는 지성은 소수일 것이다. 이 말이 모든 위대한 지성이 교훈과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지성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동시에, 내 안의 위대함을 발견해야만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길을 밝혀 줄 지성은 누구란 말인가? 이 분을 찾기 위해서 나는 부지런히 명저를 읽어나가고 싶다. 『일의 발견』이라는 책도 많은 유명 지성들의 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전까지는 유명한 지성들은 모두 같은 “위대한 지성‘이라는 범주 속에 집어넣었지만, 지금은 그 지성들을 사상에 따라, 나의 신념에 따라 분류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위대한 지성들의 견해를 많이 배우고 삼켜야 할 것이다. 나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부지런히 공부하며 삼키다 보면, 언젠가는 내 안에 나만의 사고의 얼개와 철학이 생겨날 것이고, 그 즈음에는 삼켜대기만 했던 지성들 중에 다시 게워낼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는 나의 스승만 남겠지.

나의 일생동안 내 안의 그 스승을 넘어설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제자로 남게 될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내 마음은 기쁘다. 멀리서 볼 때에는 험준하고 높아 보이는 산일지라도 산 아래까지 가까이 가게 되면, 반드시 오르는 길을 발견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요즘에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車到山前 必有路(거도산전 필유로 : 산 앞에 다다르면 반드시 길이 있기 마련이다)

                                                                                                            - 2007. 5月

글 : 한국성과향상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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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학생 리노의 인생수업 이야기. "삶은 여행이고 실천이 곧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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