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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 지망생이다. 누가 작가인가?
작가(作家)는 우리말로 지은이를 말한다. (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작가라 한다. 주로 문학작품, 특히 소설의 지은이를 작가라 부르지만, 사진작가와 같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작가다. 작가는 직업명은 아닌데, 직업으로서 글을 쓰는 사람은 '저술가'라 한다. 나는 좋은 소설 한 권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긴 하나, 소설가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 지망생'이라고 한 까닭은 사람들은 통상 책을 쓴 이를 부를 때에도 '작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의 꿈에 어울리는 표현은 작가보다는 '저술가'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다. 글쓰는 일이 나의 업이긴 하지만 뭔가 내 일은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차에 드러커의 책을 읽다가 적합한 표현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스스로를 '문필가'로 자처한다. "나는 대학교수 혹은 컨설턴트로 불리고, 때로는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경영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기본은 문필가다." 글을 쓰는 행위보다는 쓴 글을 발표하는 데 중점을 둔 단어가 '문필가'다.


문필가는 나의 꿈과 기질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단어다. 나는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글을 쓰지만, 무엇보다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나누기 위해 글을 쓴다. 내 이름을 빛나게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음은 물론이다. 쓰는 것 자체도 즐겁지만,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그 즐거움을 더한다. 그러니 '글을 쓰는 나'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주는 단어는 '문필가'다.

하지만, 나는 '작가 지망생'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내게 작가라는 단어는, 낭만적인 느낌이 깃들어 있고, 혼자 머리 싸매고 도전하는 치열함이 묻어나는 단어다. 그래서 작가 지망생을 자처하되, 그 의미만큼은 스스로 부여하기로 했다. 거듭 말하건대, 나는 작가 지망생이다. 나에게 작가란 이런 의미다. 작가 정신을 갖고 쓴 글을 세상에 발표하는 사람! 작가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인 셈이다. 설명을 더해본다.

작가는 작가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작가 정신이란, 자신만의 체계적인 세계관과 집필 철학을 말한다.


한 권의 책을 펴냈다면, '저자 아무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지만, 곧바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냈다고 얻는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 작가 정신을 가져야 작가가 된다. 한 권의 책으로도 작가가 될 수 있고, 열 권으로 책을 출간하고도 작가가 아닐 수 있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권으로 작가가 되었다. 그 책에는 이미 선생 사상의 두 기반, '관계론'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기본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세계관은 정보의 다량 습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삶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삶을 살면 더욱 쓸만한 세계관으로 다듬을 수 있다. 자기 세계관을 가지면, 다양한 주제로 책을 쓰더라도 그 책을 관통하는 흐름을 가질 수 있다. 짜집기를 해도 자기 향기가 나는 책을 쓸 수 있다. 나는 훌륭한 세계관을 갖기 위해 삶의 현장을 뛰어다니는 사색가가 될 것이다.

나는 깊이 있으면서도 매우 실용적인 자기경영 메시지를 만들고 싶다. 독자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잘 경영하여 멋진 인생을 살도록 돕고 싶다.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한 개인이 있다면 그는 예술가이고, 그의 인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자기경영의 예술가들이다. 자기경영의 달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일상을 변혁하는 일이다. 그러니 자기경영예술가로서의 나는 일상을 깊이 연구한다. 이러한 나의 집필 철학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일상 철학자(깊이)로 탐구 주제를 발견하고, 과학적 회의주의자로서 연구를 진행하며, 자기경영예술가로서 실용적인 자기경영 메시지(실용성)를 창조하여 세상의 누군가를 돕자!(공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 자기경영지식인/ 와우팀장 이희석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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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지역 방송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새해 시간관리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데, 아이고야! 며칠 전 피곤하여 터진 입술 언저리가 아직 낫지 않았다. 좋지 않은 피부지만, 어젯밤만큼은 푸욱 잠들어 조금이라도 뽀송한 얼굴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11시 잠들려는데, 최근 격동의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는 그 녀석(와우팀원) 생각이 났다. 잠깐 전화를 하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질문과 대답, 회의와 설득이 오고 가는 가운데 45분이 지났다. 피부의 뽀송함을 포기하고 개거품 물고 전화기에다 주절댔던 것은 그 녀석의 몇 마디 때문이었다. "저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막상 직장을 옮기려니,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아무것도 아닐까 봐 두려워요."

재능이 없다니! 아니, 재능이 없다니!
재능의 크고 작음은 있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다.
혹은 자신의 재능을 신뢰하지 못하여 계발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녀석의 말에 흥분한 것은 것은 재능이 없다는 생각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 인터뷰 때 푸석한 얼굴로 가더라도 대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야기해도 되지 않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귀한 사람이었기에 하룻 밤이라도 빨리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만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할 재능도 함께 지니고 태어난다." 세상에 떠도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말고, 현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보자.

경영학의 현자, 피터 드러커는 "강점 위에 (자신의 커리어를) 구축하라"고 했다. 약점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으니 강점에 집중하라고 했다. 언젠가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읽어보시길.  마커스 버킹엄 역시 누구에게나 보다 쉽게 배우고 활용하는 자신만의 강점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의 『강점에 집중하라』라는 책도 권한다. 심리학에서도 최근 20년 동안 큰 흐름이 바뀌었다. 심리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정상의 상태가 되도록 돕는 것이 심리학의 중심 과제였다면, 지금 심리학의 한 분야인 긍정 심리학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삶을 연구하고 있다. 긍정 심리학회의 중요한 인물인 마틴 셀리그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강점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법에 대하여 두 챕터에 걸쳐 설명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유교의 사서(四書)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말한다. 대학(大學)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큰 도를 설명한 책인데, 대개 사서 중에서 첫번째로 읽는 책이다. 대학의 첫 구절은 이렇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고, 재신민(在親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니라.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학문의 이상은 자신의 올바르고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사람들을 올바로 이끌어 새롭게 함에 있으며 이러한 노력이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놓이도록 처신함에 있다."
 - (김학주 역 『大學』서울대학교출판부, 40쪽)

학문을 하는 목적은 자신의 사람이 타고난 본체의 밝음(明德)을 더욱 밝히는 것과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새롭게 혁신하는 것이다. 명덕(明德)은 타고난 재능을 말함이다. 그것을 더욱 계발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롭게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스티븐 코비의 『8번째 습관』 핵심 메시지와도 닿아 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찾고, 다른 사람도 내면의 소리를 찾도록 고무하라.")

'타고난 재능'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말은 '아주 뛰어난 재주'라는 뜻이 아니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재능'이라는 뜻이다. 평범한 우리들의 재능은 남과 비교하면서 찾기는 힘들다. 자기 안에 있는 장점들을 비교해 가면서 재능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을 하지 말고, "나의 장점 중에 좀 더 뛰어나고 쉽게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남들과 비교하면 특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장점 몇 가지가 결합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이 되는 것이다.

나는 발음이 부정확하다. 어떤 주제가 떠오르면 할 말이 연이어 쭈욱 떠오른다. 주장과 사례가 구분되어 머릿 속에 정리된다. 한 10분 주어지면 조목 조목 얘기할 수 있을 자신감도 생긴다. 허나, 오고가는 대화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할 수 없으니 허겁지겁 말하게 된다. 이 때, 상대방의 시간에 최소한으로 끼어들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져 말을 빨리 하게 된다. (때로는 아예 침묵해 버린다.) 그것이 지속되어 말을 후루룩 내뱉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강사로서는 콤플렉스가 될 만한 일이다. 게다가 사투리 억양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강사 일을 하고 있다. 발음과 억양을 다른 강사들과 비교하면 프로답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잘 버텨내고 있다. 나에게도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습하여 개념을 정리하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잘 풀어 설명하는 편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려는 마음이 강하여 이것은 곧잘 열정적이고 진솔한 태도로 나타나곤 한다. 학습과 격려가 어우러져 나만의 강연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다운 면들을 한껏 발휘하면 자신만의 고유함을 만들어가게 된다.

이 글을 쓴 것은 42ko의 "저는 타고난 재능이 없으니"라는 댓글에 답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보보는 이렇게 생각하니, 자신에게는 재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검토해 주시기를 당부하고도 싶다. 인용글의 출처를 일일이 밝힌 것도 그것 때문이다. 보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다. 책에서 읽어서일 뿐만 아니라, 7년간 와우팀원들을 들여다 보면서 드는 확신이다.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 당신에게도.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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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드러커는 사회생태학자다. 생태학은 생명체를 보듯이 사물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 본래 생태학이라는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보고 전달하는 체계다. 자연생태학자는 남미의 정글로 가서 이 나무는 이렇게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생태학자도 사회에 관해서 이러이러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보는 것이 기본이다.
단 그것만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생태학자는 변화를 본다. 그 변화가 사물을 바꾸는 진정한 변화인지 아닌지 파악한다. 그 변화를 기회로 바꾸는 길을 발견한다. 
- 우에다 아츠오 『피터 드러커 다시 읽기』 p.228


기계는 분해할 수 있고, 다시 조립할 수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 된다. 세상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도, 조직도, 사회도 그것을 부분으로 분해할 수 없다. 부분을 합친다고 하여 다시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그 자체로 파악해야 할 유기체다. 누군가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를 슬픈 찌질이로 보아서는 안 된다. 눈물이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웃음도 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도 그가 아니고, 기쁨도 그가 아니다. 눈물, 웃음, 분노, 기쁨 이 모두가 바로 그다. 전체를 전체로 보지 못하면 잘못 보는 것이다. 부분을 보면서 전체를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은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고귀한 노력이다. 지혜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려 깊음이다.   
  
드러커의 처녀작은 『경제인의 종말』이었다. "정부는 경제의 날씨를 조종할 수 없다"는 대담한 말을 발표하기도 했다. 드러커가 1986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변모한 세계 경제'는 그 해에 반드시 읽어야 할 경제 논문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케인즈론'은 오랜 기간 동안 경제학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했다. 그러나 드러커는 스스로를 경제학자가 아니라 했다. 1985년, 드러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일을 이해하는데 경제학자만큼 시간이 걸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없다. 전혀 무의미하게 된 교조적인 이론에 얽매여 있는 것만큼 세상일 배우기에 큰 장해가 되는 것은 없다. 오늘날의 경제학자는 1,300년 당신의 신학자와 똑같은 상황에 있다. 너무나 교조적이다."

드러커는 경제학이 통합적인 시각으로 전체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시경제, 미시경제, 글로벌경제를 통합할 때 경제학이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따르는 듯한 학문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드러커는 보는 것이 모든 일의 기본이라고 믿는 사회생태학자였던 것이다. 드러커는 경제학을 사회의 중심이 아닌, 사회의 한 측면으로 두었고 항상 전체를 보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사회생태학은 분석과 논리가 아니라 지각과 관찰을 중심에 둔다. 사회생태학자! 드러커 자신이 창조한 이 단어는 그의 본질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드러커의 말은 이렇다. 이론은 체계화다. 그러나 창조하는 일은 거의 없다. 체계화는 정리, 분류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는 크게 변화해간다. 사회과학의 패러다임은 변화를 그치지 않는다. 가속적으로 변화해간다. 사회생태학은 그 변화를 본다. 변화가 본질을 나타낸다.
사회생태학은 부분의 인과가 아니라 총체로서의 형태를 취급한다. 전체를 본다. 전체는 부분의 집합보도 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부분의 집합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다. 
- 우에다 아츠오 『피터 드러커 다시 읽기』 p.229


※ [다음 글 안내] 사회생태학자 드러커의 '탈근대합리주의를 잘 살아가는 7가지 방법론'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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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데카르트의 근대합리주의는 의미 있는 것은 인과관계와 정량화라고 여겼다. 과학이란 인과에 대한 지식이며 의미 있는 것은 양이라고 했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며 더 나아가 부분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이 데카르트의 근대합리주의가 350년간 서양을 풍미하고 세계를 지배했다. 진정으로 믿는 철학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근대합리주의라고 불리게 된 시대의 세계관은 데카르트의 것이었다.
- 우에다 아츠오 『피터 드러커 다시 읽기』 p.94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었던 코페르니쿠스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정신을 바꾸어 인류에게 진보를 선물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데카르트도 그런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했던 것은 이성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은 스콜라 철학이었지요. 데카르트는 이성을 신앙에서 분리하여, 확실한 사유 주체로서의 이성을 주장했습니다. 이성의 발견은 인류에게 과학기술의 진보와 경제사회의 발전을 선물했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의 상태를 벗어나 논리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의 확실한 진리가 필요했습니다. 한 가지만 확실해지면 거기에서 인과관계를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데카르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임을 발견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성의 힘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이성이 인류에게 진보만을 안겨다 준 것은 아니었던 게지요. 과학 기술의 발달이 만들어낸 최신 무기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근대 문명을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전제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욕망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사유에 욕망이 개입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만물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역동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주체의식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한 결과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체, 마음과 신체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단절”시켜버렸습니다. 근대합리주의의 결함은 이원론의 모습으로 20세기 내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1957년에 이미 드러커는 이렇게 썼다. “우리들은 어느 틈엔가 근대합리주의라는 시대로부터 이름도 없는 새로운 시대로 이행했다. 어제까지 근대합리주의라 부르고 최신의 것으로 여긴 세계관, 문제의식, 근거가 모두 의미를 상실했다.” 『내일의 이정표(Landmarks of Tomorrow)』
드러커는 여기에 덧붙여 언어는 근대합리주의의 것 그대로이며 현실과 행동만이 탈근대합리주의로 이행했다고 본다. 즉 우리가 말하는 것은 350년간 지속된 세계관인데 보고 있는 것은 수단도 도구도 언어도 없는 현실의 세계라는 것이다.
- 우에다 아츠오 『피터 드러커 다시 읽기』 p.90


근대합리주의의 한계를 파악한 철학자들과 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기계적 세계관의 종말을 선언했고, 후설은 근대 합리주의는 세계에 대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합니다. 데카르트에 대항하여, 세계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인식은 완전하지 않다는 견해를 펼친 것입니다. 드러커 역시, 근대합리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탈근대합리주의 사회의 도래를 주장합니다. 드러커의 많은 저서들은 탈근대합리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작업이었지요. 요컨대, 탈근대합리주의는 드러커 저작들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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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1965년경에 시작된 지금의 전환기는 아마도 2020년 혹은 2030년경까지 계속될 것이다. 더구나 2030년 이후의 안정기라 해도 지식이 중심이 된 사회니까 변화는 늘 가까이 잇는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은 전환기밖에 모르는 희한한 세대 전환기에 태어나 전환기를 얻고, 그 후로도 지속되는 변화의 시대까지 활동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세대가 되는 셈이다.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아니 당연히 재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엄청난 드라마를 매일 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덤으로 역할까지 주어져 있다. 더구나 인터넷 시대이므로 각자가 주역이다."

- 우에다 아츠오 『피터 드러커 다시 읽기』 p.55


인간 역사의 의미에 대한 견해들은 다양합니다. 기독교 유신론자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연주의자들에게 역사란,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들의 연속이지만 목적성은 없습니다. 세계관이 다르면 이렇듯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서로 다릅니다. 역사에 대한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합의된 지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2C의 과정을 반복하며 진행됩니다. 2C는 계속(Continue)과 변혁(Change)의 균형을 말합니다. 변혁은 기존 제도의 과격한 파괴가 아닙니다. 더 나은(혹은 또 다른) ‘계속’을 위한 창조적인 파괴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계속의 시대’는 1965년경에 끝났다는 것이 드러커의 관점입니다.

드러커는 역사의 크나큰 단절을 보았을 것입니다. ‘계속의 시대‘가 끝나고 ’변혁의 시대‘가 시작된 지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경계는 1965년이고, 이 단절의 시대를 구성하는 키워드는 세계화, 다원화, 지식, 기업가 정신이라 생각했습니다. 1969년에 출간된 『단절의 시대』는 변혁의 시대로 돌입하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이러한 시대의 본질을 밝히는 책입니다. 단절의 시대 이전은 200년간 계속된 경제지상주의 시대였습니다. 돈이 중심이었던 사회였고, 정부가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던 시대였습니다. 드러커의 견해대로라면, 1965년부터 시작된 단절의 시대는 앞으로 10~20년 더 지속될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돈이 아닌 지식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말합니다. ’변혁‘의 기간을 거쳐 도래한 지식사회는 한동안 ’계속‘되겠지요.

이것은 “돈을 벌고 싶다”는 소원이 “지식을 얻고 싶다”는 소원으로 대체되는 사회가 된다는 의미일까요? 재테크만큼이나 지(知)테크가 인기있는 화두가 될까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미래 사회가 어떠할지는 모르지만, 드러커의 관심이 미래 예측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단절의 시대』 서문에서 드러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미래를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오늘날의 현실들을 면밀히 검토한다. 이 책은 ‘미래의 모습은 어떨까?’ 하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하고 질문한다.”

과거로부터의 단절은 새로운 기회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에다 아츠오는 우리 모두가 주역이라고 말합니다. 주역이 되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해결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드러커의 저서를 읽으며 이 질문의 답변을 모색하려 합니다. 지식사회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이는 드러커이고 그 용어가 처음 등장한 책이 『단절의 시대』입니다. 드러커에 대한 여러 입문서 중에 추천하고 싶은 책이 우에다 아츠오의 『피터 드러커 다시 읽기』입니다. 두 권을 읽으며 고민할 것입니다. 고민의 진행 상황을 나누겠습니다. 누군가의 사색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며.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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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12월 5일, 리츠칼튼 호텔에서의 CEO 조찬모임과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의 시간관리 페스티발.
두 개의 행사 모두 스티븐 코비라는 리더십 분야의 최고 석학이 메인 강사였다.
보보는 모두 참석했고 몇 가지를 느끼거나 배웠다.
스티븐 코비의 이론을 정리하기엔 역부족이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배움과 느낌을 나눠 본다.


#1. 독서의 힘은 위대하다

"스티븐 코비에게 솔직히 조금 실망했어요." 어느 참가자의 말이다. 
그럴 만하다. 책으로 접했던 그의 탁월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격했을까!
그들은 또 얼마나 큰 기대감을 안고 스티븐 코비의 강연회에 참석했을까!

한 시간 남짓의 강연을 통해 감동을 받아 자신의 삶이 도약할 것을 기대한 것만큼,
딱 그만큼의 실망감을 안고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대중 강연에서는, 그것도 짧은 강연에서 대부분의 유명 저자들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 
특별한 비법을 전수받기를 기대한 참가자들은 실망을 한다. 
이미 책을 통해 얻은 것, 그 이상의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연 참가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의 위대함을 한번 더 언급하려는 것이다.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고,  
독서하며 저자를 읽는 것은 실제적인 배움이 있다. 


#2. 위대한 강사라면 당연한 소리를 한다!

마크 빅터 한센도 그렇고, 스티븐 코비도 그렇다. 
그들의 강연은 퍽이나 이론적이었고, 자주 들었던 소리였다. 
'특별한 비법' 전수를 기대했던 이들은 '고귀한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실망한다. 

강사들은 이렇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주어진 한 시간 동안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우, 특히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 경우에는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태도, 가치, 마음가짐에 대하여 강연을 하게 된다.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책을 통해, 혹은 다른 강연을 통해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끝장을 본다는 마음으로 실천해 보지는 않은 것들이다. 
강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참가자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아! 만약 그 강사가 탁월함을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믿고 자신의 삶을 던져 볼 일이다. 

좋은 강사라면 당연한 소리를 한다.  특별한 비법이나 과장된 약속을 남발하지 않는다. 
훌륭한 강사라면 당연한 소리를 설득력있게 전한다. 
위대한 강사라면 자신의 삶으로 당연한 소리를 살아 내어 영향력을 발휘한다.
결국 그들도 당연한 소리를 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한다. 

어쩌면 나는 당연한 가치(모두가 알고 있는 성실, 정직 등)을
더욱 영향력 있게 말하기 위해 권위를 얻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지금 그대로의 생각을 전하게 될 것이다. 


#3. CEO 조찬모임에서 배운 점

난 명함이 없다. 없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조금 불편할 뿐이다. 
몇 마디를 더 해야 하니 말이다.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 제가 메일로 인사 드리지요." 
어떤 이의 명함이 그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름을 보며 無 명함이 순간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의 명함은 실력에 비하여 너무 뻥튀기 되어 있던 것이다. 
나는 명실상부하고 싶다. 명성과 실력의 조화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평소에는 명함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꼈는데, 
이번 스티븐 코비의 조찬 강연회에서는 슬쩍 부담이 느껴졌다. 
리츠칼튼 호텔에서의 CEO 조찬 모임이니, 나를 잘 보여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인사를 할 때, 명함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없으니 그냥 갈까 했는데 나는 책이 있으니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결국, 어색하게 두 권의 책을 내 옆에 앉으신 분들에게 드리긴 했다. 
지금 되짚어보니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 지금까지 책 선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 
물론, 진심으로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을 하긴 했지만
홍보를 위하거나 나를 드러내려는 목적으로는 한 권도 선물하지 않았다. 
내 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구나, 라는 자각을 했다. 
이것이 과도한 착각일지라도 나에 대한 발견을 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둘째, 이제는 책 선물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점.
나를 드러내려는 목적으로는 선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내게는 한 명에게 저자로 알려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는 열심으로 책을 썼고, 한 권의 값어치를 할 만한 가치를 담았다고 느끼는 자부심이다.
이 것을 스스로 지켜내는 것이 내게는 의미 있었다. 하하하.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 의미로, 고마움으로 선물했다. 
홍보로, 권위주의로 누군가에게 드리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해도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의 지력과 생각이 성숙하여 이러한 믿음이 바뀔 수는 있다.
그러나 나의 믿음과 행동을 어긋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곧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어긋나서 부끄럽기 때문이다.  
 

#4. 스티븐 코비의 탁월함

스티븐 코비의 이론은 체계적이었고 그의 저서들을 관통하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가 개인적인 우정을 나누기에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고 알게 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하지만, 그가 조직, 리더십,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최고의 지혜를 들려 줄 구루라는 점은 확실하다.

조찬모임 강연을 들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이 기억났다. 
어렵다고 읽기를 포기하기엔 아까운 책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권할 수도 없다. 어렵다는 얘기가 많았으니. 
(사실, 속도를 우선하여 읽는 독서 습관을 지양하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스티븐 코비의 책들이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코비의 관심 영역이 개인과 조직을 넘어 사회와 공익 분야까지 확대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의 지혜와 지식을 사회에 공헌하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나, 라는 생각도 슬쩍 들었다. 
『범죄의 종말』이라는 책을 집필 중이시고, 여러 공공 단체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시는 얘길 하셨던 게다.

스티븐 코비는 경영학, 성공학에서 손꼽을 만한 석학이고 깊이 공부해 볼 만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21세기에는 (작고하신) 피터 드러커와 스티븐 코비가 이 분야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짐 콜린스, 톰 피터스 등의 경영사상가들이 있지만, 한 수 높은 단계로 보인다.
그러니, 리더십과 경영, 성공학에 관심이 있다면
스티븐 코비와 피터 드러커의 저서들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물론, 주관적인 견해다. ^^


글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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